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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루한 청춘들의 카니발 <파이프라인> 유하 감독
2021년 6월 2일 수요일 | 이금용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이금용 기자]
<말죽거리 잔혹사>(2004), <비열한 거리>(2006), <강남 1970>(2015). 일명 누아르 3부작으로 확고한 매니아층을 쌓은 유하 감독이 이번엔 도유 범죄를 소재로 한 범죄 오락 영화 <파이프라인>을 신작으로 들고 왔다. 그런데 수천 억이 걸린 범죄를 저지른다는 사람들이 허술하기 짝이 없다. 드릴 대신 호미로 땅을 파고, 땅굴을 파다 죽을 고비도 몇 번 넘긴다. 유하 감독은 왜 이렇게 어설픈 사람들을 범죄 오락물의 주인공으로 설정했을까. 그는 이 질문에 “범죄라기보단 어떤 상황에서든 악착같이 버티며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몸부림에 가깝다”고 답한다.

<말죽거리 잔혹사>, <비열한 거리>, <강남 1970> 등 진지하고 무거웠던 전작들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다.
사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들은 B급 정서가 담긴 컬트 영화인데 어쩌다보니 누아르 영화를 많이 하게 됐다. 이렇게 심각한 분위기의 영화만 계속해서 찍게 될지는 나 자신도 몰랐다. (웃음) 그래서 이번에는 초심으로 돌아가 B급 정서가 담긴, 가성비 있는 블랙코미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만들고 보니 내 작품이지만 좀 낯설다.

1993년 <바람부는 날에는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로 연출 데뷔한 이래 케이퍼 영화는 처음인데.
처음부터 정통 케이퍼 영화를 만들 생각은 없었다. 이미 많은 케이퍼 영화들이 나왔고 여기에 내가 하나 더 보탠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었다. 게다가 원래 김경찬 작가가 쓴 초기 시나리오는 형에 대한 동생의 복수극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그 시기에 복수극이 많이 나오는 바람에 결국 장르를 바꾸고 꽤 오래 각색 작업을 했다.

기존의 시나리오보다 규모도 많이 축소했고, 케이퍼 영화의 기존 공식을 키치적으로 뒤틀고 조롱하면서 B급 정서를 많이 담아내고 싶었다. <파이프라인>을 정의하자면 한마디로 ‘비루한 청춘들의 카니발’이라고 할 수 있겠다. (웃음)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가.
‘핀돌이’(서인국)를 제외하면 영화에 나오는 도둑들은 전부 범죄에 있어서는 초보다. 영화를 보면 첨단 장비 대신 호미 하나로 땅을 파기도 하고 굉장히 무모하고 원초적으로 일하지 않나. 범죄라기보다는 꼭 몸부림 같다. 도유팀 멤버들은 성실히 살았지만 막막한 현실에서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지하세계로 내려온 이들이다. 카니발이라는 단어도 방탕한 축제를 뜻하는 게 아니라 버틴다는 뜻이다.

평소 있는 자들의 이야기보다는 루저들, 결핍된 자들, 출구가 막힌 채 살아가는 청춘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왔다. 그래서 이번 영화에서도 묘사해봤다.

그간 해보지 않았던 장르와 분위기인 만큼 촬영하면서도 느낌이 색달랐을 것 같다.
영화를 찍을 때마다 주인공에게 감정 이입을 많이 하게 된다. 그래서 폭력성이 두드러지는 영화를 찍다보면 상당히 우울해진다. 그런데 이번 영화를 촬영할 땐 생동감이 느껴졌다. 배우들이 지닌 열정과 자부심, 즐거움이 내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흥행 결과와는 상관없이 즐거운 연출 과정이었다. 출연진들끼리 케미도 좋아서 별다른 의견 충돌도 생기지 않았다. 내가 뭔가를 조율할 필요 없이 현장이 일사천리로 잘 돌아가더라. 특히 ‘핀돌이’ 역의 서인국에게 촬영을 할수록 점점 더 매료됐다. (웃음)

서인국 배우는 역할도 역할이지만 외모에서 풍기는 느낌이 권상우, 조인성, 이민호 등 이전에 함께 작업했던 배우들과는 사뭇 다르더라.
솔직히 서인국과 작업하게 될지 꿈에도 몰랐다.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는데 몇 년 전 직접 만난 뒤 생각이 달라졌다. 섹시한 악동과 아티스트의 이미지가 섞였다고 할까. 집에 가서도 그 얼굴이 자꾸 머릿속에 맴돌더라. (웃음)

어떤 계기로 처음 만나게 됐나.
서인국과 만난 건 다른 영화의 미팅 자리였다. 만나기 전엔 딱히 영화에 어울리는 얼굴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보니 드라마보단 스크린에 더 적합한 얼굴이었다. 그 때 (서인국이 맡을) 역할이 마약중독자 형사였는데 그런 어두운 배역도 꽤 잘 어울리더라. 안타깝게도 그 영화는 무산됐지만 이번 <파이프라인> 캐스팅을 하면서 서인국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실제로 같이 작업해보니 어떻던가.
머리가 좋고 끼도 다분하다. 어떤 배우들은 현장에서 자신이 준비해온 컨셉과 다른 연기를 주문하면 피드백이 늦어지거나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기도 하는데 서인국은 달랐다. 적극적이고 모험을 좋아한다. 당황스러울 수 있는 디렉션에도 무조건 ‘해볼게요.’라고 말하는 모습이 신선하더라. 덩달아 나까지 의욕적으로 변하기도 했고. (웃음)

이수혁이 연기한 ‘건우’도 인상적이었다. 폭력적인 건 물론 탐욕에 빠져 비이성적인 결정을 내리기도 다반사다. 냉철하고 이성적인 역할만 해오던 이수혁의 새로운 모습이라고 할까.
평소 드라마를 잘 안 보다보니 이수혁이라는 배우의 이미지를 잘 몰랐다. 그런데 현장에서 보니 이수혁과 망상가, 몽상가 기질이 다분한 악역 ‘건우’의 싱크로율이 굉장히 높았다. 이수혁에게 귀공자스러운 이미지가 있지 않나. 까딱하면 허무맹랑한 역할이 될 수도 있는데 그런 이미지가 잘 들어맞아 큰 시너지가 났다.

이외에도 순박하면서도 화가 나면 헐크 같은 괴력을 발휘하는 ‘큰삽’ 역의 태항호는 그가 지닌 친근함이 좋았다. 처음엔 험상궂어 보였는데 알면 알수록 순박하고 귀엽고 소탈한 사람이더라. (웃음) 음문석은 스펙트럼이 넓어서 미래가 기대되고, 배다미는 청순하고 깨끗한 얼굴이 주무기다.

서인국을 비롯한 주요 출연진들의 흥행 파워가 세지 않은 편인데 불안하진 않았나.
어떤 배우를 캐스팅하느냐에 따라 투자 받는 금액이 달라지는 게 현재 영화판의 현실이다. 하지만 투자액이 다소 줄어들더라도 재능 있지만 기회를 잘 얻지 못했던 배우들을 기용하려 애썼다.

감독으로 데뷔한 지 30년이 넘었고 조금 있으면 나이도 예순이 된다. 앞으로 내가 어떻게 영화계에 기여할 수 있을지 고민했는데, '배우 기근'이라는 말이 없어지도록 배우들의 저변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되고 싶다. 그 일환으로 이번 영화를 통해서도 그동안 재능에 비해 주목받지 못한 배우들의 포텐을 터뜨려주려 했다. 아마 앞으로도 이런 식의 작업을 이어나갈 것이다. 흥행 여부를 떠나 내 작품을 통해 다양한 배우가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도록 힘쓸 계획이다.

차기작 계획은?
당장은 드라마를 준비 중이고 그게 끝난 다음에 영화 작업을 할 예정이다. 아무래도 영화만 오래 하다보니 쳇바퀴처럼 되풀이되는 과정에 답답함도 있고 타성에 젖기도 했는데 때마침 드라마 연출 제안이 들어왔다. <친애하는 X>라는 제목의 웹툰 원작 드라마이고 현재 각본 작업을 하고 있다. 캐스팅이 끝나고 올해 말이나 내년 초 찍지 않을까 한다.

사진제공_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리틀빅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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