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 *영화 관련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모니>(2010) 이후 <히말라야>(2015)와 <공조>(2016) 등 각색 작업에 참여했으나 연출은 오랜만이다.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시나리오를 썼지만 촬영으로 이어지지 않기도 했고, 자신 있게 할 작품을 찾았는데 내게 맞는 것을 못 만나 기다린 것도 있다. 그러다 <담보>가 왔다. 스스로 침체됐던 상황인데 (과장하자면) 심폐소생하게 해준, 다시 데뷔한 느낌이 들었다. 휴먼드라마는 개연성이 중요한 만큼 <하모니> 이후 다시 검증받는 시간이 아닌가 한다. 보편적인 가족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한편으론 매우 궁금하기도 하다.
건조하고 센 영화를 보다 보면 따뜻하고 촉촉한 감성이 그리워지는 순간이 있다. 코로나로 힘든 시기에 기분 전환이 될 법한 영화다. 손주연 작가의 원안을 각색하면서 주안점은.
원작이 워낙 뼈대가 탄탄했다. 사수였던 윤제균 감독과 각색하는 과정을 거쳐 내게 잘 맞는 휴먼드라마로 안착했다고 본다. 각색에도 상당히 긴 시간을 할애했다. 보편적인 사람의 마음을 다루는 휴먼드라마지만, 우리만의 표현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극 중 ‘승이’(박소이-하지원)-‘두섭’(성동일)-‘종배’(김희원)가 혈연이 아닌 인연으로 맺어진 2차 가족형태이기에, 기존의 틀을 넘어 광범위하게 포용하고자 했다. 덕분에 관련 영화와 다큐멘터리 등 자료를 많이 찾아봤었다. 93년 인천을 배경을 배경으로 불법체류자가 등장하는 것은 동일하지만, 원안이 다소 범죄드라마 같은 느낌이 있었다면 우린 극단적인 상황과 설정을 위한 하나의 매개체로서 사채업이라는 직업을 빌려왔다. 초반에 부정적인 의미가 강했던 사채업과 사채업자가 드라마가 흐르면서 점차 변모해 제목(기자 주: 담보는 다음에 보물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음)과 맥락을 나란히 한다.
못 받은 돈 대신 담보로 아이를 데려가다니… 현재에서는 감히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인데 다행히 극 중 ‘종배’의 입을 통해 잘못된 행동임을 명확히 짚고 넘어가 보면서 안심했다. (웃음)
빚 대신 아이를 데려간다는 설정을 해프닝의 하나로 영화적으로 받아들이길 바랐다. 두섭과 종배는 무서운 사채업자인 양 행동하지만 사실 딱한 처지의 사람이 남긴 빚을 떠안을 정도로 여린 사람들이다. 자칫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어 인물 간의 대화나 상황으로 무마했고, 또 아이로 시선을 돌려 어른이 바라볼 때 심각하게 느껴질 수 있는 지점을 희석했다.
두석이 사고를 당해 행방불명이 되면서 예상했던 스토리와 달라서 개인적으로 놀랐다.
그런가. 가장 행복한 순간에 비극이 닥쳐온다는 게 클리셰적인 효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이야기의 핵심은 시련을 거쳐 어떻게 성장해 나가는지, 서로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로 굳건히 자리하는가에 있기에 그에 충실했다.
한편으론 수십 년 산 거주지 근처에서 사고를 당했는데 무연고처리 돼 십 년 넘는 세월 동안 행방을 알 수 없다는 것이 살짝 억지스럽기도 하더라.
극 중에서는 단편적으로만 표현되지만, 두석이 ‘승이’ 하나를 잘 키우기 위해 맹목적으로 희생했고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 보여주려 했다. 두석이 어린 승이를 구원해줬던 것처럼 승이가 사고 후 정신을 놓아버린 아저씨를 구원하 듯 대응하며 극적인 구성으로 가져갔다. 표현이 부족했는지 뜬금없다는 시선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치매와 뇌 질환으로 기억을 잃은 두석이 ‘담보’만을 기억한다.
치매라는 증세가 파편적인 기억들을 붙잡고 있다고 들었다. 두석은 승이가 자신을 아버지로 받아들인 순간 사고를 당한다. 아마도 그의 무의식에는 자신이 다친 상태로 나타나면 짐이 된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지 않았을까. 기억을 잃은 상태에서도 자신을 감추고 숨고 싶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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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중 두석의 전사가 전혀 나오지 않는데, 살짝 들려준다면.
두석의 집을 보면 오랫동안 생활의 흔적이 묻은 고풍스러운 공간이다. 그의 방에는 자개장이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게 다 할머니와 살았던 집이라서다. 어떤 이유로든 할머니 손에 자랐고, 나이 든 할머니가 치매로 고생하는 것도 봤겠지. 이런 이력을 세세하게 극 속에 모두 드러낼 수는 없지만, 배우들의 연기에는 크게 영향을 미친다. 두석과 종배의 관계도 궁금하지 않나? 어떤 상황이면 성인 두 남자가 한 지붕 밑에서 티격태격하며 친가족처럼 동고동락할 수 있을까.
군대에서 만난 인연이라고 막연히 짐작했다.
가정환경이 어려운 종배가 입대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 할 때 두석이 말리고 이후 그의 고충을 들어준, 어떻게 보면 은인이라 할 수 있는 관계다. 심연의 마음을 교감한 관계라 관용도가 높은 거지. 그렇기에 성격이 달라도, 티격태격해도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거다. 말했듯 이런 전사를 영화 속에 전부 직접적으로 드러낼 수 없지만, 배우의 연기 호흡에 다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성동일, 김희원, 하지원 세 배우 모두 워낙 베테랑 배우들이라 척하면 척이었겠지만, 당신이 특히 끌어내고 싶은 얼굴이 있었을 거다.
배우에게 모니터링하면서 마지막까지 당신들의 눈을 봐 달라고 얘기한 적이 있다. 사람의 감정을 전달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눈이라고 생각하거든. 특히 휴먼드라마는 백 마디 말보다 눈으로 전하는 이야기가 중요하다. 또 아무리 신파 코드가 있다고 해도 그것을 느끼고 그에 따라 우는 것은 관객의 몫이라 배우는 때때로 감정을 절제해야 한다. 그래서 어떤 때는 눈물이 나와도 참아달라고 부탁했다. 마지막 감정은 카메라가 포착할 것이니 말이다.
어린 ‘승이’역을 연기한 박소이 배우에 관해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야무지고, 천진한 얼굴로 초반 웃음과 눈물을 길어 올리며 확실하게 극을 견인한다.
<하모니> 때도 그렇고 아이들과 인연이 많은 것 같다. 아무래도 어린 연기자는 촬영장의 환경에 지배를 많이 받는데 소이는 촬영 공간을 즐기고 정말 흥미로워했다. 4월 크랭크인 예정인데 2월까지도 ‘승이’를 캐스팅하지 못한 상황에서 든든한 아군인 윤제균 감독에게 에스오에스를 쳤었다. 감독님이 준비하는 영화의 오디션이 있다고 와서 보라고 하시더라. 소이 본인은 계산 하에 연기했을지 모르나 본능에 가까운 연기를 보여줬었다. 나를 포함한 전 스태프가 무조건 하자고 한눈에 결정했다.
캐스팅 후 소이와 어머니에게 ‘레미제라블’을 보라고 부탁했다. ‘코제트’ 같은 캐릭터를 그렸었거든. 나중에 소이와 극 중 ‘승이’에 대해, 또 코제트에 관해 이야기하며 역할에 접근해 갔다. 사실 많은 사람에 둘러싸여 카메라 앞에서 연기한다는 게 무섭고 두려운 일이라 수시로 아이컨택을 했던 것 같다. 봐서 알겠지만, 눈물 연기가 많아 감정에 집중하기까지 시간이 걸리고 강약 조절이 중요했는데, 현장에서 다른 배우 모두 천천히 기다리며 독려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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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반 인천 차이나타운, 주택과 거리, 나무로 인테리어 된 집 내부 등 공간에 신경 쓴 흔적이 역력하다.
입간판, 글씨, 도로 표지판, 가옥 등 최대한 보존된 장소를 찾은 후 그 뼈대 아래 리터치를 많이 했다. 또 2019년 현재의 공간을 일부러 감췄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 자연광을 많이 사용했다. 기차역 옆에 상주하던 소외당한 사람들, 컨테이너 가건물 등은 90년대를 보냈던 내 기억을 많이 살렸고, 연변의 경우 실제 답사를 다녀와 소스만 반영하고 실제 촬영은 강원도 정선에 있는 유사한 가옥을 찾아 진행했다. 두석의 집의 경우 외관은 인천에 있는 집을, 내부는 세트로 지었고, 거리는 주로 인천에서 촬영했다.
촬영 일정과 기간은.
작년 4월에 시작해 7월에 마무리했다. 후반작업을 길게 하다 보니 코로나 시국과 맞물렸는데, 개봉이 지연되면서 내부 모니터링을 여러 번 거쳤고 보완할 부분은 추가로 촬영했다.
추가 촬영된 부분이 궁금하다. (웃음)
후반부 두석과 승이가 만나는 장소다. 원래는 성당에서 운영하는 기도원으로 설정해 촬영했는데 나중에 보니 공간이 너무 깨끗하고 좋더라. 슬픈 감정이 한껏 끓어오르다가 잘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는 마음이 들 수 있어 좀 낙후된 공간으로 바꿨다. 비인간적인 대우로 악명 높았던 형제복지관의 이름을 따와 열악한 환경을 연상하게 했다. 승이 입장에서 두석이 그런 공간에서 긴 세월에 거쳐 홀로 방치됐다는 사실에 미안함과 회한의 감정이 극대화됐을 것이다. 잘 변경했다고 생각한다.
김윤진 배우가 승이의 엄마 ‘명자’로, 또 나문희 선생님이 ‘명자’의 엄마이자 승이의 할머니로 특별출연했다. <하모니> 때의 인연이 이어진 것 같다.
김윤진 배우의 경우 자신이 연변 아줌마와 이미지가 맞느냐고 하면서도(웃음) 말만 그렇지, 너무 열심히 준비해줬다. 연변 사투리를 얼마나 연습하던지 정말 열정파에 노력파다. 연변에서 할머니-엄마- 승이가 만나는 장면에서 아픈 사람을 연기하기 위해 며칠 동안 굶고 왔을 정도였다. 아프면 단순히 마른 게 아니라 다리에서 허리에서 다 표가 난다. ‘명자’의 엄마로 감정을 툭 하고 쳐줄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문희 선생님밖에 안 계셨다. 내가 오랜만에 연출한다고 하니 작더라도 맞는 역이 있다면 도와주고 싶다고 적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출연해 주셨다. 정말 감사하다. 오랫동안 떨어졌던 승이와 명자 모녀가 만나고, 아픈 딸 명자를 지켜보는 또 한 명의 엄마(나문희)가 있고, 혈연으로 이어진 가족을 한 발자국 떨어져 바라보는 두석, 그 순간 두석은 혈연을 넘어 아버지가 된 것 아닐까.
나만의 한 컷, 즉 가장 마음에 드는 장면을 꼽는다면. 코멘터리도 부탁한다.
어렵다. 빈말이 아니라 실제로 다 좋아한다. 준비하면서 배우들과 동고동락하며 교감을 나눈 시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배우의 오감이 발휘되도록 연출하고, 그에 또 배우가 호응해 얻은 결과물이기에 하나하나 모두 소중한데 임팩트 강한 장면을 꼽는다면 ‘차차차 룸살롱’의 유리창을 깨부수는 시퀀스다. 승이가 부산의 부잣집으로 입양을 간 것이 아니라 룸살롱에서 허드렛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두석이 한밤중에 내달려 아이를 데려오는 장면이다. 가게 문이 잠겨 있어 유리창을 깨는데 실제로 나라도 그렇게 했겠더라. 그 장면을 촬영할 때 스태프가 모두 숨죽였었다. 배우가 집중하도록 카메라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좀 더 멀리 떨어져 바라봤다. 두석이 아이의 상처를 보며 마담을 향해 인간 같지 않다고 욕을 하면서도 차마 때리지는 않는데, 그 순간이 아마도 아이에 대한 무한 책임과 사랑의 시작이 아니었을까 한다.
다소 뜬금없고 원론적인 질문인데, 당신에게 영화란.
내게 영화는 사람을 만나는 것과 비슷하다. 인연처럼 느껴진다. 극한의 상황에 부닥쳐있는 사람이 만나고 이별하고, 재난을 당하고 해결하고 결국엔 사람들이 극복하고 이겨내는 데 그 과정 자체가 감동이고 그게 드라마가 지닌 힘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이야기를 만들어 대중 앞에 내놓는 것이 영화이고 그 작업을 하는 게 감독의 역할이 아닌가 한다.
마지막 질문! 평소 소소하지만 행복한 일은.
동료 감독과 시나리오와 관련한 이야기를 할 때가 가장 즐겁다. 안부 건네듯 서로 모니터링을 해주곤 하는데, 좋은 점을 부각해주기도 하지만 때론 냉정하게 또 방향성도 구체적으로 지적해줘서 평소 도움이 많이 된다.
2020년 10월 7일 수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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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_CJ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