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이금용 기자]
(인터뷰에는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돼 있습니다.)
<강철비2: 정상회담>(이하 ‘강철비2’)이 개봉하고 ‘부함장’을 향한 반응이 정말 뜨겁다. 실상 주연인 정우성이나 유연석보다 더 자주 거론되는 듯하다.
촬영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반응이 이렇게 좋으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언론시사회 직후 지인들에게 연락이 쇄도했다. 요즘은 눈 뜨자마자 핸드폰으로 내 이름을 검색하는 게 일상이다.
관객 반응이나 전문가 평을 좀 살펴보는 편인가.
원래 촬영장에는 핸드폰을 들고가지 않는데 최근에는 항상 가지고 다닌다. 핸드폰을 너무 들여다봐서 노안까지 왔다. (웃음) 감사하게도 관객들로부터 칭찬이 많아서 즐겁다. 아직까지 부정적인 평가는 본 적 없는데 누가 나쁘게 비평하더라도 발전을 위한 쓴 조언이라 생각하고 달가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겠다.
1987년 극단 ‘하나’의 단원으로 시작해 1997년 <일팔일팔>로 영화계에 발을 들인 이후에도 무명 생활이 꽤 길었다. 조연으로 서서히 얼굴을 알리다 최근 몇 년간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남자친구>, <호텔 델루나> 등 유명한 작품에 연이어 나오면서 인지도가 급격하게 올랐다.
연극영화과를 나온 것도 아니고 연극하던 시절에도 대단한 배우는 아니었다. 당시에는 주로 포스터를 붙이거나 호객을 하고 다녔고, 가끔가다 작은 단역으로 무대에 서곤 했다. 그러던 와중에 극단 후배였던 아내를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겼다. 연극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가 어렵더라. 게다가 육아도, 경제적으로도 부족한 나 때문에 아내가 많이 힘들었을 거다. 결국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하기로 결심했다. 당시에는 연극판에서 방송으로 넘어가는 걸 배신으로 여겼지만 배신이고 뭐고 일단 아이를 키워야 했다. (웃음)
영화로 넘어간 직후에는 아주 작은 단역만 들어왔고 오디션도 많이 떨어졌다. 그런 상황에 주눅들지 않고 운동과 독서를 꾸준히 했다. 아마 이런 부분이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드러난 게 아닌가 싶다. 이 자리까지 오는 길이 순탄하지만은 않았지만 그래서 지금의 내가 있는 거 같다.
연극, 드라마, 영화까지 그야말로 연기 외길이다. 중간에 포기할 법도 한데 그러지 않았다. 연기의 어떤 점이 그렇게 매력적이었나.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자주 영화를 보러 다녔다. 그 때 봤던 작품들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당시에 어찌나 영화에 몰입했던지, 10살 땐 ‘수류탄을 안고 죽은 소령’의 이름을 묻는 시험지 질문의 답란에 신일룡(기자 주 <평양폭격대>(1972)의 조진형 소령 역)이라고 적었다. 어린 마음에 영화와 현실을 혼동했던 거다. (웃음)
중고등학교에 진학해선 연극반 활동을 했다. 그때까지도 전문 배우가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던 거 같다. 이후 자연스럽게 대학로 연극판에 뛰어들었고 가끔 팬레터를 받았다. 어느 날 내 연극을 감동적으로 보고 배우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편지를 받았는데 무척 놀랐다. 누군가에게 꿈을 심어준다는 건 절대 작은 일이 아니다. 이렇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으니 연기를 놓을 수 없더라. (웃음)
예전엔 지금보다 외모도 표현도 더 거칠었다. 그 때문에 배역에 한계가 있지 않을까 걱정한 적이 있다. 그런데 배우는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얼굴을 찾아간다는 어느 교수님의 말을 듣고 희망이 생겼다. 실제로 인상이나 사람 자체가 (좋은 쪽으로) 변하는 거 같다.
그리고 내가 웃으면 생각보다 귀엽다. (웃음) 처음 카메라 앞에 설 땐 선이 굵어서 표정이 잘 드러나는 점이 좋다고들 한다. 그런데 정작 브라운관에서는 과하게 보이더라. 지금은 노하우가 쌓여서 어떤 각도에서 내가 예쁘게 나오는지 다 파악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가 악역이나 웃긴 역할만 하는 줄 안다. (웃음) 이미지 소비가 걱정되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악역 연기를 좋아하지 않아 피했는데도 그렇다. <은밀하게 위대하게>에서도 내가 나오니 다들 간첩일 거라고 의심했다더라.
<강철비2>에서도 당신이 당연히 웃긴 캐릭터일 거라고 확신했다는 사람들이 꽤 많다. 하지만 예상을 뒤엎고 북한 최고의 심해 전략가이자 핵잠수함 ‘백두호’의 부함장 ‘장기석’으로 등장해 진중하고 프로페셔널한 모습으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역할이 너무 근사해서 대본을 전달받았을 땐 내게 들어온 대본이 맞는가 의심했다. 당연히 그 자리에서 수락하고 싶었지만 일단 회사 측에 실수가 없었는지 다시 확인했다. (웃음) 나중에 양우석 감독님에게 물어봤더니 정우성 배우가 추천했다더라.
원래 정우성 배우와는 잘 아는 사이였는가.
같은 소속사 식구다. 회사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편했는데 시사회장 등에서 마주칠 때마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따뜻함이 뱄다고 느꼈다. 어느 정도냐면 정우성과 화장실에 같이 가면 티슈로 자기 손을 닦은 뒤 내가 티슈를 버릴 때까지 휴지통을 계속 잡고 있는다. (웃음) 이번에 영화를 찍으면서 그와 더 가까워졌다. 요즘은 날더러 라이징 스타라며 (북한군) 분장이 따로 필요 없다고 놀린다. 오늘 아침에도 인터뷰 잘하라고 문자가 왔다. 여러모로 참 든든한 존재다.
실제로도 친분이 있는 만큼 연기하기 더 편했으리라 생각된다. 극 중 두 사람은 이념, 나이, 신분 모든 것을 뛰어넘은 브로맨스를 선보였다.
딸이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미리 봤다. 아내가 영화 어땠냐고 물으니 아빠가 주인공인데, 마지막엔 정우성이랑 사귄다고 대답했다더라. (웃음) 원래 잠수함을 타는 사람들끼리는 소속 진영과 무관하게 공유하는 유대감이 있다. 영화에선 삭제됐지만 ‘한경재’(정우성) 대통령과 장기석이 농담을 나누며 교감하는 장면도 있다. 거기다 한 잠수함에 갇혀 죽기 직전까지 갔으니 사이가 가까워질 수 밖에.
남한 대통령이 북한 장교에게 농담을 던지는 건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지만 그 반대는 상상하기 어렵다. 장기석은 그런 면에서 특별하다. 소신을 지키려 당에 반목했지만 뛰어난 능력으로 부함장으로 강등된 데 그쳤다는 설정부터가 다른 캐릭터에 비해 입체적이라는 평이다.
북한 사람이라고 우리와 다를 건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념의 대립이 아닌 형제애와 동지애에 중점을 뒀다. 20년 정도 연극인 축구단을 하면서 후배들 챙기는 데 익숙해졌고 병사들을 아끼는 장기석의 모습이 공감 갔다. 북한에선 어린 나이부터 입대한다고 하더라. 극 중에는 17살짜리 북한군도 나온다. 그들이 막내동생 같기도 하고 애틋해서 부함장이 지닌 전우애와 동지애가 크게 와닿았다.
절제됐지만 호소력 짙은 감정연기만큼 뛰어난 전술력도 인상적이다. 적과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펼치며 빠르지만 정확하게 지명, 위도, 방향 등을, 게다가 북한 사투리로 전달해야 하는데 연기하기 쉽지 않았을 듯하다.
북한 최고의 전략가다운 면모를 보여주기 위해 신경을 많이 썼다. 바다 지형을 모르는 상태에선 대사가 안 외워지길래 직접 지도를 그려가며 외웠다. 구조를 알고 나니 현장감이 생기면서 연기할 때 느낌이 더 살아났다.
평소에 작품 들어가기 전 공부를 많이 하는 편이다. 그런데 양 감독님이 이 방면에 완전히 전문가라 질문만 하면 전문 지식이 쏟아져 나온다. 그래서 굳이 깊게 공부하기보단 잠수함이나 군사 전략과 관련된 부분을 주로 조사했다. 그 과정에서 < U-571 >, <유령>, <헌터 킬러>를 참고했다. <헌터 킬러>에 잠수함의 청원병들은 다른 잠수함 안에서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까지 잡는다고 하더라. 그런 전문가적 태도를 표현하고자 했는데 잘 전달됐을지는 모르겠다. (웃음)
잠수함 구조는 유튜브로 공부했다. 김용우 전 함장의 자문을 구해 만든 세트라 실제 잠수함과 똑같다고 하더라. 그래서 나중엔 침대에 누워도 보고, 식판을 들고 세트 곳곳을 누비기도 하면서 점점 익숙해졌던 거 같다. 명칭, 지리, 잠수함 구조부터 사투리까지 공부해야 할 게 많았다.
잠수함 내부가 무척 협소해 보인다. 양 감독은 25평에 40명의 남자가 모여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설명했다.
좁긴 하지만 그 덕에 출연진끼리 더 친해질 수 있었다. 일단 세트에 들어가면 제작진이 사다리를 전부 제거하고 주위를 둘러싼다. 세트가 아니라 진짜 잠수함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아침에 들어가면 점심 때나 나오는데 세트장 안엔 먹을 것도 없고 촬영에 방해될까 소리도 못 낸다. 대기중인 출연진은 물도 못 마시고 한 구석에 숨어있어야 했다. 어린 친구들이 그러고 있는 모습을 보는데 걱정돼서 더 챙겨주려 했다. 그들도 그런 내게 유대를 많이 느낀 거 같다.
극 후반부에 구급약 통을 들고 반대편으로 넘어가는 장면이 있다. 순간 함선 내부를 둘러보는데 친동생과 다름없는 동지들의 피와 희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걸 보는데 가슴이 너무 아렸고 마지막까지 잠수함을 지켜야한다는 결의가 증폭됐다.
아마 그런 이유도 있을 거다. 팩트에 가까운 대한민국 대통령과 북 위원장, 미국 대통령과 달리 부함장은 가상인물이고 병사들과 대한민국 대통령을 구하는 모습이 영화의 돌파구로 보이지 않았나 싶다.
양 감독이 정우성 배우에겐 눈빛 연기를 부탁했다고 하던데, 특별히 주문 받은 사항은 없었나.
감독님은 속내를 비치지 않는 포커 페이스를 요구했다. 작은 소리로도 바다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캐치하는 전문가 특유의 카리스마와 예민함이 강조되길 바라셨던 것 같다.
어떤 관객은 당신이 정우성보다 멋지다더라. (웃음) ‘신스틸러’라는 별명도 붙었다.
일전에 한 예능 ‘명품조연’ 특집에 출연한 적 있다. 좋은 의미로 붙여준 호칭이지만 사실 그냥 배우로 불리고 싶다. 별명이란 게 기억은 빨리 되겠지만 마냥 좋은 건 아닌 거 같다. 보통 자기 길을 잘 가는 사람들에겐 별명 대신 이름을 부르지 않나. 연기자에겐 배우란 말이 최고로 좋은 것 같다.
<강철비2>의 흥행으로 전보다 작품의 선택지가 더 다양해질 텐데 특별히 관심 있는 역할이나 장르가 있다면.
야비한 역만 아니라면 장르와 배역을 가리지 않을 생각이다. 늘 그랬듯 서민적인 역할도 괜챃고 감동적이고 코믹한 작품도 좋다. 한번쯤 도전하고 싶은 장르가 있다면, 누아르다.
그런데 작품 선택에 있어 배역보다 환경을 더 중요하게 본다. 성향이 맞지 않는 사람들과 일하는 걸 어려워해서 즐겁게 일하는 감독, 배우들과 작업하는 게 좋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이준익 감독님의 영화에 다시 출연하고 싶다. 대중적 인지도가 높지 않을 때, 감독님이 나를 많이 챙겨 주셔서 영화 찍을 때마다 날 불러주셨다.(기자 주 <왕의 남자>(2005), <라디오 스타>(2006), <즐거운 인생>(2007), <님은 먼 곳에>(2008),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2010), <평양성>(2011) 등 2005년부터 2011년까지 이준익 감독의 전 영화에 출연했다).
최동훈 감독의 신작 <외계인> 촬영에 들어갔다고 들었다. 바쁘겠지만 그래도 최근 소소하게 행복한 순간이 있다면.
가방 안에 쉬운 역사소설 한 편과 막걸리 반 병을 넣고 등산하는 걸 좋아한다. 한 병을 다 마시면 취하고 반 병이 딱이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