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이금용 기자]대한민국 대표 미남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배우가 있다. 20대엔 <비트>(1997), 30대엔 <내 머리속의 지우개>(2004) 그리고 40대엔 <더 킹>(2017) 등 세월에도 빛 바래지 않는 외모를 자랑하는 정우성이다. 어느덧 연기경력 36년차에 접어든 그는 더 이상 ‘그저 잘생기기만 한 배우’가 아니다. 작년 <증인>으로 청룡영화제를 비롯한 4개 영화제에서 연기대상과 남우주연상을 거머쥐고 <강철비2: 정상회담>의 대한민국 대통령 ‘한경재’로 돌아온 정우성은 “외모보다 심도 깊은 연기로 울림을 주고 싶다”고 말한다.
<강철비>(2017)에 이어 <강철비2: 정상회담>에도 곽도원과 함께 출연한다. 제목과 캐스팅으로 보아 전편과 이어지는 속편인 줄 알았는데 예상과는 전혀 다르다.
강철비라는 큰 제목과 세계관은 같이 하지만 캐릭터와 스토리는 전혀 다르다. 특정 인물이나 사건이 아닌 ‘한반도’를 주인공으로 봐야한다. 1편과 2편을 별개의 영화라고 상정하면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양우석 감독은 영화에 <강철비>의 ‘상호보완적 속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전작의 출연진이 거의 그대로 나오지만 진영이 완전히 바뀌었다. 북측 전직 특수요원을 맡았던 1편과 달리 이번엔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맡았다. 곽도원도 마찬가지로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에서 북한 호위총국장으로 변신했다.
역지사지해보란 의도가 아닐까. 한 사람이 서로 다른 체제와 이념 아래에서 어떻게 변하는지를 보여준다는 설정이 과연 양우석 감독님다운 시도라고 생각했다.
제작보고회 당시 곽도원이 역할 변화를 두고 자신이 당연히 북한 수령을 맡을 거라 확신했다며, 남한 대통령만 너무 잘생겨 균형이 무너지지 않냐는 불만 아닌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건 내가 무슨 배역을 맡든 따라다닐 말이다. (웃음) 배우로서 외모보다 캐릭터 내면의 갈등과 고민을 더 심도 깊게 보여주고 싶다는 욕심이 있다.
미남 배우가 거쳐가는 숙명인 듯하다. 결국 북한 수령 ‘조선사’ 역엔 유연석이 캐스팅됐다.
적절한 캐스팅이었다고 본다. 유역석과는 처음 호흡을 맞췄는데 배역에 대한 책임감과 주인 의식이 있는 배우다. 그 때문인지 그에겐 자신의 연기에 대한 의심과 불안함이 있다. 첫 리딩 때 준비를 많이 해왔는데도 그런 불안함이 은연중에 비쳤다. 나는 그게 유연석의 장점이자 조선사와의 공통점이라고 생각했다.
조선사도 그렇지만 미국의 스무트 대통령 또한 굉장히 개성 있게 그려진다.
미국의 스무트 대통령은 영화에서 가장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이다. 사실 자신감이 지나쳐서 예의가 없어 보이기도 한다. (스무트 역의) 앵거스 맥페이든은 원래 셰익스피어 연극판에 있던 배우라 희극 연기에 강하다. 그래서인지 화장실 유머처럼 자칫 과할 수 있는 풍자들을 과감하면서도 선이 넘지 않게 잘 조율했던 거 같다.
공감한다. 스무트가 등장할 때마다 관객들이 빵 터졌다. (웃음) 유독 관객들이 좋아하던 신이 하나 더 기억나는데, 염정아 배우가 당신의 엉덩이와 등을 때리는 장면이다.
염정아씨가 흔쾌히 응해줘서 데뷔 이래 처음으로 같은 작품에 출연하게 됐다. 고맙긴한데 손이 제법 매웠다. (웃음) 아무래도 가족과 함께 있을 때의 편안한 분위기가 웃음에 한 몫 한 거 같다. 한경재는 대통령이기에 앞서 한 가정의 가장이고 아내에게 굉장히 의지하는 남자다. 기둥 같이 든든하게 중심을 잡아주는 아내와 아이 덕에 밖에서의 고단함을 잊고, 또 새로 움직일 수 있는 에너지를 얻는 그의 모습에 많이들 공감했을 거다.
영화의 재미를 논하면서 후반부 잠수함 추격전을 빼놓을 수 없다. 세트는 물론 CG 구현에도 공을 많이 들인 티가 난다.
1999년 찍었던 <유령>도 잠수함이 배경이었다. 지금같은 CG는커녕 상상력에 의존해 세트를 만들었다. 외관은 미니어처로, 내부 디자인은 미술팀이 사진 몇 장을 참고해서 만드는 게 전부였는데 이번 작품을 하면서 촬영 현장이 그 때와 굉장히 달라졌다는 걸 실감했다. 실제 잠수함들을 견학하고 조사한 걸 바탕으로 세트를 만들고 현장에 쓰이는 장비를 그대로 썼다. 짐볼을 활용해서 잠수함이 이동할 때의 경사각과 진동 등을 사실적으로 구현한 덕분에 보다 현실적인 연기를 보여드릴 수 있었다.
또 실사 촬영과 CG의 접합이 자연스러워야 하는데 <강철비2>는 그걸 성공적으로 해냈다. 후반작업까지 마친 결과물을 보고 관객들이 안심하고 영화를 온전히 즐길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다고 생각했다. 한국의 기술과 스태프들의 실력이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라왔다는 게 감격스러웠다.다시 캐릭터로 돌아와서, 한경재의 얘기를 더 듣고 싶다. 개성적인 북·미 정상들이나 신정근 배우가 연기한 ‘부함장’ 역할 사이에서 눈빛과 표정, 호흡만으로 감정을 전달하기가 쉽지 않았을 거 같다.
한경재는 상황에 수동적으로 대처해야하는 입장이고 그러다보니 감정을 강하게 드러낼 수 없다. 그래서 명확하게 드러나는 대사나 액션은 없지만 울분, 무력감, 연민 등의 정서와 내면을 한숨이나 눈빛으로 보여주고자 했다. 촬영에 앞서 캐릭터 디자인을 위해 연구를 많이 했지만 막상 촬영에 들어가면 그 때 그 때의 감정을 따라가는 편이라 연기하기 어렵지는 않았다.
양우석 감독이 당신의 눈빛에 감탄했다는 후문이 들린다. 본인도 만족스러웠는지 궁금하다. 또 호흡을 맞춘 다른 배우들의 연기는 어떻게 봤나.
양우석 감독님이 평소에 내 눈빛이나 리액션을 좋게 봐주셨고 연기할 때 그 부분을 살려주길 바라셨다. 영화에서도 한경재의 눈빛을 소중하게 다룬다는 게 느껴졌다.
함께 한 배우들은 워낙 베테랑이라 다들 안정적이고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줬다. 영화에 그려지는 인물들이 소속된 진영을 대변하는 성격을 지녔는데 기발하면서도 동시에 굉장히 위험한 아이디어라 어떤 식으로 표현될지 궁금했었다. 조선사, 스무트 대통령과 그 밖의 많은 배우들의 눈빛과 표정을 전부 느낄 수 있었다. 스쳐 지나가는 단역일지라도 그 얼굴이 하나하나 기억에 남는다는 건 드문 경험이다.
배역 연구를 많이 한 것이 느껴진다. 혹시 참고한 인물이 있다면.
과거 회담을 성사시켰던 전 대통령을 조사했지만 캐릭터에 직접적으로 반영하진 않았다. 더불어 역사와 정세 공부를 틈틈이 하기도 했고. 한경재는 실제로 있을 법한 상황과 인물이지만 그렇다고 실존인물을 베끼는 건 배우의 책임을 져버리는 일이다. 그래서 누군가를 따라하기보단 한경재의 선택과 갈등에 정서적으로 접근하고 독창적인 캐릭터로 구현해내려 했다.
정서적 접근이란?
미국, 중국, 일본 등 열강 사이에 끼인 대한민국은 남북관계의 당사자지만 중재자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아이러니함을 마주한 한경재가 느낄 무력함과 답답함이 시나리오를 읽을 때부터 절절하게 전해졌다. 평화와 통일에 한 발짝 나아가는 과정에서 그가 마주할 외로움, 고뇌, 무게에도 공감이 갔다.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지도자상을 캐릭터에 투영한 게 아닌가 싶다.바람직한 지도자상이 무엇인지 자세하게 설명해줄 수 있을까.
대통령 한 명에게 국한하기보다 정치인 전체로 확장해서 얘기하고 싶다. 이들은 국민의 선택을 받아 나라를 책임지고 운영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책임을 지는 건 늘 국민, 수혜를 받는 건 정치인이라는 생각을 지우기가 어렵다. 자신의 가치관과 사심을 내려놓고 사회 전체를 위해 다양한 이해관계 속에서 균형을 잡는 사람이 내가 정의하는 이상적인 정치인이다.
평소 사회적인 사안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표했는데, 지도자상이나 캐릭터 해석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은 거 같다. 당신의 행보에 대체로 긍정적인 반응이지만 너무 ‘정치적’인 게 아니냐는 일부 시선도 분명 존재한다.
정치적으로 편향된 말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데 어째서 그런 의견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웃음) 나는 오랜 시간 대중에게 사랑받아왔고 그에 대한 보답의 의미로 세상에 관심을 가지려 한다. 그렇기에 항상 우리,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과 관련된 보편적인 이야기를 해왔다. 그것들이 특정한 이익을 위한 건 아니었다고 자신한다. 다만 외부의 평가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일부 사람들이 앞서 말한 것과 같은 오해를 할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점은 <강철비2>가 한반도와 그 안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주어진 과제를 말하는 ‘영화’라는 거다. 풍자와 액션이 가미된 재밌는 작품일뿐 어떤 강요나 설교를 하려는 의도는 없다. 영화를 보고나서 해석은 각자의 몫이다.
이정재 배우의 신작이 개봉을 앞두고 있다. 평소 두터운 친분을 자랑하는 두 사람인데 나란히 개봉하는 소감이 어떤지.
시민과 정부가 대처를 잘 해준 덕분에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는 시기지만 영화를 개봉할 수 있었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는 우리 영화와 다른 장르, 소재의 작품이라 경쟁작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관객 입장에서 선택지가 다양해진다는 건 좋은 일이다.
마지막 질문이다. 최근 소소한 행복이 있다면.
커피 한잔하는 여유로운 순간, 아침 일찍 차를 타고 창 밖을 바라볼 때 등 작지만 행복한 순간이 많다. 최근에는 그간 잊고 지냈던 일상의 소중함이 더 크게 느껴진다. 친구와 자유롭게 카페를 가거나 술 한잔 기울이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적이 없었다. 그러니 다들 행복을 멀리서 찾는 대신 직접 만들어갔으면 한다.
사진 제공_ 롯데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