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결백>으로 스크린 데뷔했다. 그간 드라마 <학교 2017>, <저글러스>, <라이브> 등에 참여했다. 결과가 비교적 바로 나오는 드라마와 달리 영화는 개봉까지 시간이 참 오래 걸린다. (웃음) <결백>만 해도 2018년에 촬영했다.
맞다. 많이 해 본 것은 아니지만, 드라마는 결과가 비교적 빨리 나오고 그에 따른 시청자 피드백도 바로 확인할 수 있어 좋다. 영화는 촬영 후 짧게는 6개월 길게는 1년 정도 결과물을 기다려야 한다. 기다리면서 처음에는 내가 영화를 찍은 거냐는 생각이 들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개인적으로 좋았다. 촬영할 때는 미처 정리하지 못했던 부분을 한 번 돌아보고 결과물을 마주한다는 게 좋더라.
큰 스크린으로 자신을 본 소감은.
언론시사 때 처음 제대로 봤는데 촬영하면서도 완성본을 보면서도 혹시 방해되거나 누가 되면 어떨지 걱정이었다. 종옥 선배님, 준호 선배님, 철민 선배님 등 연극와 영화 등을 통해 연기를 워낙 오래하신 선배님이 많다 보니 그분들이 만든 공기와 파도 안에서 그 흐름을 잘 탈 수 있을지 걱정이 많았다. 솔직히 내 눈엔 (내) 부족한 면만 보이는데 다행히 선배님들 연기 덕분에 관객들이 너그럽게 봐주시는 것 같다.
아무래도 첫 영화라 관객의 반응에 좀 더 신경 쓸 것 같다. 좀 찾아보는 편인가. 인상적인 반응이 있다면.
좋은 이야기이든 나쁜 이야기이든 듣고 보완해야 한다는 생각에 많이 읽어보려고 노력한다. 어떤 분이 너그러운 마음으로 감사한 이야기를 적어주셨다. 주변에 장애아를 가진 부모가 있어 곁에서 그 친구를 계속 봐왔는데 극 중 ‘정수’와 정말 유사하다는 글이었다. 단순히 행동을 흉내 낸 것이 아니라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친구와 같이 현실적인 모습이었다고 말이다. 내가 겉모습뿐만 아니라 정수가 느끼는 감정과 생각을 이해하고 발견하려 노력했던 것을 알아봐 주신 것 같아 매우 감사하고, 소중한 의견으로 기억에 남는다.
살인 용의자로 지목된, 급성 치매를 앓고 있는 엄마 ‘화자’(배종옥)가 금쪽같이 아끼는, 자폐스펙트럼을 지닌 아들 ‘정수’(홍경)를 연기했다. 쉽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준비했는지.
알다시피 우리 영화는 자폐나 장애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영화가 아니다. 모녀 서사를 주축으로 해 나가고, 정수는 영화 속에 존재하는 캐릭터일 뿐이다. 때문에 (이야기 흐름에 방해될 정도로) 너무 튀거나 그렇다고 생동감이 없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타 작품에 등장했던 자폐 캐릭터나 영상은 참고하지 않았다. 특수학교나 복지관 등에 방문해 봉사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 관계자, 부모님, 선생님 등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들이 나와 다르지 않기에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지 진심으로 다가가고 싶었다. 행동을 연구하는 건 마지막 단계였다.
사람들이 어떤 편견이 있는 것 같다. 자폐를 가진 분도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으로서 생각과 행동, 감정이 다 다른데 그간 콘텐츠에서 다룰 때 특정화하는 면이 없지 않아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내가 한 연기에 관객이 설득됐다면, 그런 분(자폐) 중 한 명을 내가 표현한 것이 아닐지 감히 생각해본다.
그렇지, 자폐 스펙트럼을 가졌어도 다 똑같은 행동 양식을 취하진 않을 테니까.
<결백>을 하면서 배운 게 바로 그 점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게 다가 아니라는 것. 열린 사고와 열린 생각 그리고 열린 마음을 갖는 게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크게 깨달았다.
사실 <결백>을 보기 전에 박근영 감독의 <정말 먼 곳>을 봤다. 이번 전주국제영화제 시네마 프로젝트 선정작으로 아직 개봉 전인데 기회가 닿았다. 영화가 참 좋고, 당신의 퀴어 연기 역시 차분하고 안정적이었다. <정말 먼 곳>을 하면서도 지금 얘기한 지점에 대해 생각했을 것 같다.
<정말 먼 곳>을 봤나? 놀랍다! 연기하기 위해 인물을 이해해야 하는데, 그게 어렵다기보다 흥미롭고 재미있다. 인물에 대해 무언가 발견하고 그다음 이해하고 공감하고 그 인물과 소통해 연기로 표현하는 게 도전이고 기쁨이고 하고 싶은 것이다. 앞으로 어떤 배우가 되고 싶다고 구체적으로 정한 것은 없지만, 지금 하고 싶은 것은 10대나 20대 즉 밀레니엄 세대의 성장통을 녹여 나가고 싶다. 영화 하며 하나하나 해 나가고 있는 것 같아 어려울 때도 있지만, 웃고 떠드는 데서 오는 재미와는 다른 의미의 재미와 희열이 있는 것 같다.
<정말 먼 곳>의 박근영 감독은 ‘어렵게 섭외한 배우라 각별했고, 후반으로 갈수록 놀라운 집중력을 보여줬다’고 평했다.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작품 안에서 감독이 구상한 것들을 잘 그려내는 게 배우의 역할이다. <결백> 박상현 감독님도 박근영 감독님도 본인만의 색깔이 매우 뚜렷하시다. 박근영 감독님은 특히 굉장히 섬세하시다. 그런 부분에서 많이 배웠고, 후반부 집중할 수 있던 것도 다 감독님 덕분이다.
<결백> 박상현 감독과는 대화를 많이 나눴다고. 또 현장 분위기는 어땠나.
박상현 감독님은 감수성이 섬세하시면서도 리더십이 뛰어나시다. 촬영 중간중간, 식사 시간이라든지, 다음 장면에 대해 고민하면 바로 피드백을 주시곤 했다. ‘정수’가 관객에게 친근하게 다가갔다면 다 감독님 덕분이다. 영화의 분위기상 현장이 엄숙하고 무거울 것 같겠지만, 서로 챙겨주는 화기애애한 현장이었다. (신) 혜선 누나는 내가 긴장한 것 같이 보이면 먼저와 어깨동무하고 일상적인 이야기를 건네는 등 하면서 긴장을 풀어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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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중 ‘정수’가 반복하는 말과 행동이 있다. 위해를 가하려는 상대의 뺨을 먼저 때리며 ‘엄마가 한 대 맞으면 두 대 때리랬어’이다. 캐릭터를 부각하는 언행인데 톤을 어떻게 가져갈지 고심했겠더라.
때리는 행위 자체보다 그 친구가 어떤 생각과 마음으로 그렇게 행동하는지에 주목했었다. ‘정수’는 엄마에게 굉장히 의존적이고 애착이 강한 인물이다. 엄마와의 관계, 엄마의 훈육방식, 그 과정에서 정수가 느꼈을 감정, 정수의 마음속에 각인된 행동 양식 등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박상현 감독이 한 사전 디렉션이나 조언이 있다면.
감독님께서 내가 특수학교와 복지관 등에 나가면서 직· 간접적으로 그들과 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열심히 하라고 격려하면서 높낮이를 조절하라고 조언하셨다. 말했듯 영화 자체가 자폐 캐릭터를 조명하는 영화가 아니니 말이다.
높낮이 조절 관련해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한다면.
음.. 법정에서 엄마가 심문받는 장면이 있는데 엄마 바로 뒤에 ‘정수’가 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구도다. 재판 상황에서도 엄마와 떨어지려 하지 않고 가능한 한 엄마 옆에 붙어있는 거지. 법정 안 사람들이 기립할 때 정수만 혼자 한 박자 늦게 일어나거나, 재판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만의 세계에 빠져 있곤 하는데 그 정도가 좀 과하다 싶으면 조정해 주셨다.
좋아하는 장면은. 또 당신만의 코멘트를 한다면.
여러 장면이 있는데 하나를 꼽자면, 비록 촬영하는 모습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동생으로서 관객으로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엄마가 면회 온 딸을 잘 알아보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아들 ‘정수’만 걱정하니, 누나 정인이 ‘정수, 정수, 그만 좀 하라고’ 하는 장면이다. 모녀의 애증이 너무 잘 드러난 대목이다. 서러움, 분노, 아픔 등 복합적인 감정을 얼굴의 살 떨림과 눈빛 등으로 혜선 누나가 너무 잘 표현했다. 집중력과 순발력, 딕션요정이라고 불릴 정도의 발성은 물론 감정선까지 그 디테일한 연기에 감탄했다. 게다가 딸을 보낸 후 엄마의 기억이 살아나 딸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는 장면은 뭐,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다.
신혜선 배우가 맡은 ‘정인’은 냉철한 변호사인데, 가까이 본 누나는 어떻든가.
고백하자면, (웃음) 누나의 진짜 팬, 혜선 덕후였다. (웃음) 함께 하게 돼 굉장히 기뻤다. 곁에서 본 누나는 아주 밝고 털털하다. 경험이 부족한 내가 집중할 수 있도록 공기를 만들어줬다. 집중력이 저절로 끌어올려지더라. 처음엔 팬이어서 긴장했었는데 원체 편하게 대해줘서… 극 중 ‘정수’가 엄마와 떨어져 불안한 상태라 누나에게 많이 의존하지 않나. 실제로 누나 같고 편해서 연기할 때 불편하거나 눈치 볼 필요가 없었다.
엄마는 어떠셨나. 배종옥 배우 역시 잘 챙겨줬나.
당연하다. 뭔가 물어보면 여러 아이디어를 내주고, 또 내가 준비한 게 있다고 하면 슛 들어가기 전에 해보자고 먼저 손 내밀어 주셨다. 나에게뿐만 아니라 현장의 해결사 같은 분이셨다. 감독님, 스태프와 배우들이 고민하거나 의논할 거리가 생기면 선배님이 해결책과 대안을 찾아 주시곤 했는데 놀라운 경험치를 곁에서 지켜보며 감탄했었다.
그간 꾸준히 작품을 해왔지만, 이번 <결백>을 통해 ‘홍경’이라는 배우를 확실히 대중에게 각인할 것 같다. 앞으로 어떤 연기자가 되고 싶나. 신혜선 배우의 ‘딕션요정’처럼 혹시 앞에 붙이고 싶은 수식어가 있다면.
딱히 어떤 수식어를 붙이기보다 앞으로 10대나 20대가 겪는 일에 공감하고 잘 이해해 이를 작품을 통해 드러내고 싶다. 불안감, 답답함, 두려움, 성장통 등의 복합적인 감정을 (연기로) 잘 표현한 20대를 보냈으면 하는 바람이다. 수식어까지는 아니고 내 마음가짐이 그렇다. 이를 위해 장르나 역할을 특정하기보다 최대한 열어 두고 하나씩 해 나가고 싶다.
20대 중반으로서 어떤 감정을 크게 느끼나.
오디션을 보러 다니는 게, 마치 취준생 같은 느낌이다. 지금 작품이 결정됐다고 해서 다음 작품이 저절로 따라오는 게 아니니 다음에 또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감이 크다. 또 작품이 결정되고 난 후에는 단순히 겉핥기가 아닌 어떻게 하면 그 인물을 발견하고 이해하고 공감해 설득력 있게 연기하고 다가갈지 많이 고민한다.
데뷔 초보다 연기하는 게 좀 편해졌겠다.
처음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선배님들을 옆에서 지켜보니 나는 그야말로 갓난아기와 같다. 매 순간 긴장하는데 한편으론 이런 긴장감이 좋다. 스스로 너무 옥죄지 않는 선이라면 기분 좋은 자극이 된다. 그럴 때 좋은 감정이 나오는 것 같다.
어쩌다(?) 연기에 입문했나.(웃음) 원래부터 배우가 되고 싶었던 건가. 또 부모님의 반응은.
어릴 때부터 부모님과 영화관을 많이 갔었다. 두 분 모두 완전히 씨네광이셨거든. 고등학교 2학년 때 진로 고민하던 중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니 자연스럽게 영화가 떠올랐다. 당시 거의 매일 영화관에 가고 집에서도 매일 돌려 보곤 했거든. 그게 시작이었다. 단편 영화에 출연하고 셀프 영상도 찍다가 좋은 연기 선생님을 만났다. 그때 내가 어떤 사람이고, 지금까지 어떤 감정으로 살았는지, 캐릭터의 상황과 감정을 어떻게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읽어낼 수 있는지 등에 대해 배웠다. 배우가 되겠다고 하니 부모님이 처음엔 놀라셨는데 내가 뭔가를 해보겠다, 하고 싶다고 한 게 처음이라 믿고 맡겨 주셨다
영화광이라니,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은 감독이 문득 궁금해진다.
폴 토마슨 앤더슨! 그의 영화에 나오는 나무라도 되고 싶다.(웃음) 그만큼 좋아한다. <매그놀리아>(1999), <펀치 드렁크 러브>(2002), 최근작 <팬텀 스레드>(2017)는 수십 번 돌려봤을 정도다. 또 자비에 돌란이 들려주는 가족, 특히 어머니 이야기 역시 좋아한다.
<펀치 드렁크 러브>(2002)와 <팬텀 스레드>(2017), 모두 강박에 사로잡힌 인물이 등장한다.
그렇지. 두 영화 모두 단순히 러브스토리가 아닌, 좀 더 복합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펀치 드렁크 러브>에서 좋았던 점은 겉보기엔 괴짜 같은 남자가 등장해 집착하고 어딘가에 꽂혀 직진하는데 그게 진짜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위에 그런 사람 많지 않나. 개개인이 그런 면을 어느 정도 지니고 있어, 굉장히 독특하면서도 현실적이라 특히 좋았다.
다음엔 어떤 작품으로 만날 수 있나.
아직 정해진 것은 없다. 말했듯 매해 취준생인 입장에서 오디션을 열심히 보러 다니는 중이다. 좋게 봐주시면 곧 정해질 거라고 기대하며 노력 중이다.
마지막 질문! 최근 소소하게 행복한 일은.
코로나로 영화계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이 힘들었는데 와중에 한국영화가 재개해서 기쁘다. <침입자>, <결백>, 개봉 앞둔 <#살아있다> 등 한편한편 스타트를 끊는 것 같다. 철저한 방역과 띄어 앉기 등의 조치로 걱정을 덜 하며, 다시 영화관을 찾을 수 있다는 게 평소 영화팬으로서 소소한 기쁨이자 행복이다.
2020년 6월 24일 수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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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박광희 (Ultra Stdud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