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꽃 기자]
윤성현 감독의 <사냥의 시간> 줄거리는 꽤 간단하다. 폐허가 된 도시를 살아가는 희망 없는 청년들이 의문의 추격자와 맞닥뜨린다. 주인공들 앞에 “사연 없는 악당이 등장해 ‘캣앤마우스’(Cat And Mouse) 장르처럼 서로 쫓고 쫓기는” 작품이라는 게 감독의 설명이다. 자연스럽게 서사의 힘은 최대한 빼고 젊은 세대의 혼탁한 지옥도 안에서 서스펜스를 끌어내려 했다. 방대한 대사를 무기 삼아 인물의 심연을 들여다본 감독의 전작 <파수꾼>(2011)과는 전혀 다른 접근법이 필요했고, 장르 영화 특성을 제대로 살리기 위해 영상, 미술, 음악, 음향에 집중했다. 그 과정이 종종 “계란으로 바위 치기”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고 말하는 윤성현 감독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본다.
*코로나19 국면의 ‘사회적 거리두기’ 캠페인에 맞춰 화상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사냥의 시간>은 폐허가 된 도시가 배경이다. 근미래를 다룬 작품을 연상시킨다.
남미, 미국의 디트로이트 등 슬럼화된 많은 도시를 참고했다. 남미에서는 음료수 하나를 사려고 해도 돈다발을 건네야 할 정도로 화폐가 무가치해 놀랐던 기억이 있다. 프랑스 빈민가 청년들 이야기를 다룬 <증오>(1997)의 느낌에 영향을 받은 부분도 있다. 그런 것들을 참고삼아 세계관을 만들되 현실적인 영역을 다루고 싶었다. <마이너리티 리포트>(2002)나 <블레이드 러너>(1982)만큼의 미래를 담거나 ‘사이언스’가 들어가는 SF영화는 아니다. 우화적인 공간이라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주인공은 4명의 청년들(박정민, 안재홍, 이제훈, 최우식)과 의문의 추격자(박해수)다. 그들이 머무는 곳은 어떤 우화적인 공간인가.
한국 사회를 생존하기 어려운 지옥에 빗대 표현하는 청년 세대의 이야기를 장르적으로 풀었다. 내 주변에 현실에서 벗어나 낙원으로 도망가고 싶은 심정인 친구들이 많다. 이들의 지옥도를 어떤 형식으로 풀어나갈까 고민이 많았고 범죄, 서스펜스, 엔딩에 가서는 서부극까지 한가지 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여러 장르를 차용해 표현했다.
전작 <파수꾼> 이후 9년 만의 신작이다.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는데.
<파수꾼> 이후 굉장히 규모가 큰 드라마 장르의 시나리오를 썼다. <사냥의 시간> 순제작비가 90억 수준인데 그 두 배 정도 되는 작품이었다. 그게 잘 안되면서 2011년부터 2016년까지 4~5년 정도의 세월을 보냈다. 좀 더 여우같이 대비를 해야 했는데 너무 정직하게 한 작품에만 집중했다. 변화에 대응하는 움직임이 빠르지 못했다. 좀 더 여러 작품을 준비해야 2~3년에 한 편씩 연출할 수 있구나 싶다.
<파수꾼> <사냥의 시간> 모두 직접 시나리오를 썼다. 시나리오 작가와 함께하는 작업도 염두에 두고 있는가. 작가가 좋은 시나리오 집필에 힘써주면 감독으로서는 연출에 집중할 수 있는 여지를 확보하고 신작을 내놓는 시간이 더 빨라질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금도 소통하는 작가님들이 있다. 감독이 꼭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게 감독의 의무도 아니다. 내가 존경하는 감독인 스티븐 스필버그, 구로사와 아키라처럼 직접 쓰지 않은 시나리오도 연출할 수 있다. 감독의 능력은 어떤 구성, 연기, 음악, 효과로 장면과 영화를 보여줄 수 있는지 고민하는 것이다. 나도 내 에너지를 축적해서 거기에만 쏟아붓고 싶은 마음이다. 무엇보다 감독에게는 다음 작품을 만드는 게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그런 순간을 많이 맞이하려면 더 영민해져야겠다는 생각이다.
<파수꾼>과 달리 <사냥의 시간>은 보다 장르적인 측면에 집중했다는 인상이다.
청년 세대의 고민을 다룬다는 점은 공통적이지만 두 작품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파수꾼>은 대사 위주의 드라마다. 영화 전반에 대사밖에 없고 그래서 비주얼을 보여줄 영역도 없었다. 대신 그만큼 깊이 있게 인물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반면 <사냥의 시간>은 결이 다르다. 대사가 많지 않다. 이야기도 단순하고 직선적이다. 배우의 표정, 분위기, 장면 등 이미지와 사운드의 힘으로만 영화를 끌고 나가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다. 시행착오가 많았다.
예컨대.
독립영화보다 제작비가 많이 투입되니 무언가를 표현하는 게 더 쉬울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물에 초점을 맞추고 다른 영역에는 크게 집중할 필요가 없는 <파수꾼>이 더 편했던 거더라. 우리나라 (영화계)는 드라마 중심적이고 나 역시 드라마에 특화돼 있다. 그런데 드라마를 배제하고 미술과 CG 작업에 신경 쓰려니 어려움이 컸다. 전문가의 도움을 많이 받았지만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만큼 많이 배웠다.
베를린영화제에 초청받은 기쁨이 그만큼 컸겠다.
1,600명의 관객 앞에서 영화를 처음 선보이다 보니 부담이 굉장히 컸다. 하지만 롤러코스터처럼 내려갔다, 올라갔다 하는 호흡을 함께 가져가는 관객과 같이 관람하니 영화가 더 특별하게 다가오더라. 잊지 못할 순간이다. 서스펜스를 잘 전달했다는 점에서 영화제에서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장르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라는 평을 들었을 때 일차적인 목표를 이뤘다고 생각했다.
영화는 극장 개봉을 예정했던 것과 달리 넷플릭스로 공개됐는데.
어려운 상황에서도 넷플릭스를 통해 190개국에서 동시 개봉할 수 있어서 너무 영광이다. 많은 사람이 볼 거라고 생각하니 설레고 겁도 난다. 아무래도 영상과 사운드에 집중한 영화인 만큼 핸드폰보다는 조금 큰 TV 화면이나 사운드를 크게 들을 수 있는 스피커를 이용해 관람해주십사, 부탁드리고 싶은 마음은 있다. 그러면 영화의 재미를 더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사진_ 넷플릭스
2020년 4월 24일 금요일 | 글_박꽃 기자(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무비스트 페이스북 (www.facebook.com/imov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