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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끝에서 영화를 길어 올리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 김초희 감독
2020년 4월 6일 월요일 | 민용준 영화저널리스트 이메일

[무비스트= 민용준 영화저널리스트]

영화를 보기 전에는 인생에 대한 지독한 농담처럼 느껴지던 제목이 영화를 보고 나면 따뜻한 덕담 같아서 품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좀처럼 알 수 없는 다가올 시간에 대한 두려움을 품고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위해 마련한 시간이다. 되돌리기 버튼이 없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후회와 아쉬움이 뒤따라오는 것이 인생이지만 되돌릴 수 없는 인생이기에 다가오는 매일이란 그만큼 소중하고 절실해지는 것이기도 하다. 어쩌면 인생이란, 그래서 어떤 영화보다도 영화 같은 시간이 된다.

푸근하고 구수한 제목만큼이나 정겨운 사투리가 인상적인 찬실이의 삶은 녹록하지 않지만 결코 쓸쓸하지만은 않다. 매몰차게 느껴지는 삶의 한 켠에는 피할 구석을 마련해주는 이들의 온정이 어김없이 피어오르고, 열렬하게 끓어오르지 않는다 해도 끝내 꺼지지 않는 열망을 부채질하듯 응원하는 이들의 마음 덕분에 살아갈 용기를 지필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믿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보고 싶은 걸 다 이룰 수 없어서 비참한 것도 삶이겠지만 그 모든 것을 꿈꿀 수 있어서, 함께할 수 있어서 나아갈 수 있는 것도 삶이라는 희망을,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끝내 안겨준다.

지극히 현실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천연덕스럽게 초현실적인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결국 어제를 돌아봄으로써 내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용기를 끌어안게 만든다. 보이지 않는 빛을 찾아가던 막막함으로 떠밀려가지만 내 안의 빛을 바라보게 만드는 평안함으로 다다른다. 사람은 죽어서 꽃으로 돌아오지 못하지만 꽃을 보며 누군가를 기억할 수 있는 삶이란 그래서 필경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그런 삶에 관한 깊은 성찰과 따스한 온정에 관한 영화다. 자신의 지난날을 돌아본 뒤 비로소 그토록 원했던 감독으로서 첫 영화를 만들어낸 김초희 감독의 삶은 그렇게 영화가 돼서 수많은 이들에게 오늘의 온기를 전하고 있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가 개봉하는 과정 자체가 찬실이(강말금)의 인생 같다.
맞다. 정말 찬실이 같다.(웃음)

시국이 시국인지라 개봉을 앞둔 영화가 대부분 개봉을 연기하는 가운데,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3월 5일 개봉을 결정했다. 고민이 적지 않았을 거 같은데.
개봉을 미룬다고 해서 극장 상황이 좋아질 거라는 확신이 없었다. 살다 보면 위기는 언제든 찾아오기 마련이고, 위기는 늘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 코로나 바이러스처럼. 결과적으로 개봉을 미룬다는 건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연출 의도나 내 삶의 태도와 어긋나는 선택이라 생각했다.

어떤 의미일까?
5년 전 영화 PD를 그만두고 나서 인생에 위기가 찾아왔다고 느꼈다. 40대라는 나이가 뭔가 새롭게 시작할 수 없는 시기는 아니지만 뭔가 시작하기에도 애매한 때 아닌가. 생계와 직결된 위기감이 느껴져서 슬기롭게 헤쳐 나갈 길이 없을까 고민하던 과정에서 구상한 것이 <찬실이는 복도 많지>다. 그리 대단한 건 아니지만 주어진 조건 안에서 하루하루 잘 살아보는 것이 내가 바라는 삶의 태도인데 위기가 닥쳤다고 계획을 미루는 건 삶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생각할 필요도 있겠지만 어차피 인생이란 게 계획대로 되지 않더라. 무엇보다도 힘든 위기가 닥쳤을 때 그걸 받아들인 결과가 <찬실이는 복도 많지>라는 영화였으니까. 영화가 만들어질지 모르는 상태에서 열심히 시나리오를 쓰고 보니까 시나리오 제작지원도 받고, 제작지원금도 생기고, 기회가 이어졌다. 그런 좋은 운을 맞아 영화를 완성했고 개봉까지 하게 됐으니 내 의지에 대한 보답은 이미 받은 셈이다. 물론 개봉 이후의 결과도 중요하지만 그 결과가 어찌 됐건 영화가 없어지는 건 아니니까. 그래서 어렵지만 용기 내보기로 했다. 성적이 좋지 않을 가능성이 커도 결과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고, 결과가 좋지 않아도 그 과정을 통해 남는 게 있겠지. 한편으로는 지금 너무 어려운 사람이 많다는 걸 걱정하다가 내 영화만 생각할 때도 있고, 가끔씩은 그게 너무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이런 상황을 통해 그런 나 자신도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것 같아서. 어쨌든 이런 이유로 개봉을 결정했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2019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가장 뜨거운 영화 중 한 편이었다. 무대인사나 GV를 통해 상영관을 가득 채운 관객들을 만난 기분이 궁금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오히려 걱정이 많아서 영화제 기간 내내 숙소에만 있다가 영화 상영할 때 잠깐 나가곤 했다. 그만큼 관객을 만날 때에는 기뻤다. 이렇게 많은 관객이 내 영화를 보려고 앉아있다니 이런 날도 오는구나 싶었고, 이런 순간을 염원했던 만큼 너무 행복했다.

시나리오 작업에 1년이 걸렸다고 들었는데 <찬실이는 복도 많지>라는 제목은 처음부터 염두에 둔 제목이었을까?
사실 다섯 가지 버전의 시나리오가 있었다. 조금씩 수정된 버전의 시나리오가 아니라 뼈대만 같고 각기 다른 내용을 가진 버전이 다섯 개였다. 그래서 버전마다 제목도 달랐다.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할 때 버전의 제목은 <기다리는 마음>이었는데 그저 영화를 다시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제작이 될지도 모를 시나리오를 쓴 것이라 그런 제목이 떠오른 거 같다. 그 이후로 <눈물이 방울방울> <눈물이 안 나와> 같은 제목이 붙었다.

그렇다면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다섯 가지 버전의 시나리오 중 하나의 제목이었을까?
영화를 다 찍고 나서 정한 제목이었다. 편집을 끝낸 영화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찬실이가 참 복이 많네’라고 말하고 있더라. 그게 제목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약간 촌스럽긴 해도 영화에 제일 잘 어울려서 그렇게 결정했다.
10년간 홍상수 감독의 영화 PD로 일하다 그만둔 뒤로 한동안 영화 현장과 멀어졌던 것으로 안다.
5년 전쯤 실직한 뒤 영화를 그만 두려 했다. 영화 PD라는 직업을 갖고 일했지만 감독님이 아침에 시나리오를 쓰고, 그렇게 나온 시나리오로 그날 촬영하는 식으로 영화를 만드는 PD는 다른 제작 현장에 통용될 수 없더라. 영화 제작이란 게 완성된 시나리오가 있어야 가능한데 시나리오가 없는 영화를 제작해왔으니까. 일할 때는 몰랐는데 막상 나와보니까 그렇더라.

그렇다면 감독을 생각하게 된 계기가?
나는 원래 스물세 살 때부터 감독이 되길 꿈꿨던 사람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냥 영화 PD로 살아도 좋겠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지. 그런데 다 관두자고 생각한 이후로 뭘 해 먹고살지 막막했다. 그러다 반찬 장사를 해볼까 마음먹을 즈음 평소 친분이 있었던 윤여정 선생님 전화를 받았다. 당시 준비하던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에서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캐릭터를 연기하게 됐는데 사투리 지도 선생을 해볼 생각 없냐고 물으시길래 당장 반찬 장사를 하는 거보단 낫겠다 싶어서 일단 그것부터 해보고 다시 생각해보기로 했다. 그렇게 다시 영화 현장에 나간 게 거의 1년 반만이었을 거다.

오랜만에 찾은 현장에서 어떤 기분을 느꼈을까?
다시 영화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영화에 대한 열망이 여전히 내 마음속에 남아있다는 걸, 감독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 너무 크다는 걸 알았다. 절박하고 간절한 마음이 있었다. 결국 그거 말고 다른 길이 없더라.

<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연출하기 전에 단편영화 세 편을 만들기도 했는데 영화 PD를 그만두고 감독으로 데뷔할 생각을 당장 하지 못한 이유가 있었을까?
영화를 잘 만들어야 된다는 부담이 컸다. 좋은 영화가 아니면 만들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단편영화를 만들면서도 장편영화 연출은 계속 유보했다. 그런데 <찬실이는 복도 많지>가 내가 바라던 수준의 영화라서 만든 건 아니다. 영화를 할 방법이 없으니까 오히려 영화를 만들게 된 거다. 그리고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에서 살아온 인생을 깊이 반추했다. 인생을 쭉 돌아보게 됐다.

과거 시나리오를 일기 쓰듯이 썼다는 얘기를 했는데, 삶이 반영된 시나리오를 썼다는 의미일까?
아마 <산나물 처녀>라는 단편을 만들 때 했던 이야기 같은데, 시나리오를 어떻게 쓰는 건지 잘 몰라서 매일매일 시나리오 형식으로 일기를 써봤다는 의미였을 거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동안에도 나름의 기승전결이 있으니까. 그렇게 보면 하루하루가 일종의 단편영화 같다. 습작의 시간을 가진 셈이지.
돈이 필요하다는 찬실이에게 소피(윤승아)가 “내가 빌려줄까?”라고 물어볼 때 찬실이는 “일해서 벌어야 한다”라고 딱 잘라 말한다. 찬실이의 성격을 명확히 보여주는 대목인데, 감독의 성격이 어느 정도 반영된 게 아닐까 궁금했다.
어렸을 때 집이 많이 어려웠고, 일찍 독립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부모님 지원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누군가에게 기대서 돈을 버는 건 상상도 못 했다. 무조건 내가 벌어야 한다고, 경제적으로 완전히 자립해야 한다고 생각해왔는데 그만큼 인생에 찾아온 위기를 스스로 극복하고 헤쳐 나온 구력 정도는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런 생각이 영화에 투영됐을지도 모르겠다.

찬실이라는 인물을 중심에 두고 나아가는 영화인데 주변 인물도 인상적으로 느껴진다. 너무 도드라지지 않으면서도 개별적인 존재감을 자랑하는 캐릭터들이 영화를 풍성하게 만드는 인상이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사건 중심의 영화가 아니다. 처음부터 인물 중심의 영화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주연만큼 조연 캐릭터가 중요했다. 그림으로 비유하자면 세밀화보단 캐리커처에 가까운 영화인 셈이다. 인물의 내면까지 세밀하게 그려낸 건 아니지만 각각의 개성이 뚜렷해서 캐리커처처럼 성격이 도드라져 보여야 캐릭터를 보는 재미로 영화를 끌고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소피나 복실(윤여정)처럼 여성 캐릭터들이 영화의 서브플롯을 두텁게 만드는 역할로서 중요하게 다뤄진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서는 크게 세 여성 캐릭터가 등장한다. 찬실이는 위기를 극복하려고 하는 여자인데 소피는 뭔가를 계속 배우는 여자이고, 복실은 매일을 충실하게 사는 여자다. 결국 이 셋의 공통점은 열심히 산다는 것과 건강함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공통점을 가진 인물이 각기 다른 상황에 처해있는, 현실의 대비를 보여주고자 구상하게 된 관계다.

소피는 배우지만 자연인의 일상이 더 바쁜 사람처럼 보인다. 여배우라는 특정 직업의 현실을 반영한 것 같다는 인상이 느껴진다.
영화 PD로 일하면서 여배우를 가깝게 지켜볼 기회가 많았다. 배우라는 직업도 프리랜서라 일이 없을 때는 없다. 요즘은 상황이 조금 좋아진 거 같은데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대부분의 상업영화에서 주된 역할을 거의 남자 배우 몫이었다. 여배우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소피처럼 중요한 캐릭터라 알고 촬영했다가 편집하고 보니까 분량이 다 날아가버린 경우도 적지 않았고. 능력 있는 여배우들이 너무 많이 놀고 있었다. 하지만 할 일이 없다고 주저앉아있지는 않더라. 뭔가를 열심히 배우러 다닌다. 기본적으로 열심히 운동하고, 기타를 배우거나, 무용을 배우거나. 특기를 하나씩 늘려가고자 노력했다. 다음에 어떤 역할이 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에 뭐든 해낼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드는 거다. 무용이라도 하면 액션 연기를 할 때 발차기라도 잘할 수 있지 않겠나. 그리고 그렇게 해야 자신의 특기와 관련이 있는 작품이 들어오면 좋겠다는 기대라도 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너무 많은 걸 배우러 다니다 보니 정신이 없어서 자꾸 깜빡하는데 그런 상황을 캐릭터 특징으로 만들어봐도 좋을 거 같았다. 그래서 이름도 ‘근심 소’에 ‘피할 피’를 써서 소피라고 지었다. 매번 잘 까먹고 자기 고민을 깊게 하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천성이 건강해서 자기 삶에 충실한 사람이니까.

소피가 한자어 이름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프랑스 이름 같지.(웃음)

찬실은 ‘빛날 찬’과 ‘열매 실’을 쓴 이름이라고 들었는데.
스물세 살에 감독을 꿈꾸기 시작했지만 결국 마흔여섯 살에 감독으로 데뷔하게 됐는데 4년 전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하면서 알게 됐다. 오랫동안 쉼 없이 영화라는 걸 열심히 해왔지만 제대로 된 결실을 보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이 내게 있었다는 걸. 그래서 스스로 결실을 맺을 수 있다는 소망이 담긴 이름을 만들고 싶었고, ‘빛나는 열매’라는 의미를 가진 찬실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그렇다면 김영(배유람)은?
젊다는 뜻의 영단어 ‘영(young)’에서 빌려왔다. 찬실은 30대를 일만 하며 보냈고, 그렇게 청춘을 지나와버렸으니 그 시절에 대한 회한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청춘에 대한 끌림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일종의 보상 심리일 수도 있고. 찬실이에게 그런 후회와 아쉬움을 보상해줄 것 같은 인물이라면 ‘영’이라는 이름을 가져도 좋을 거 같았다.
윤여정 씨가 연기한 할머니에게 ‘복실’이라는 이름이 있다는 건 영화만 봐서는 모를 일이다. 한 번도 불려지지 않으니까.
말한 대로 영화에서 불려지지 않는 이름이니 관객들은 모르는 부분이고, 사실 몰라도 상관없는 정보이긴 하지만 시나리오를 쓰는 입장에서는 인물에게 어떤 이름을 지어주고 부르는 것 자체로부터 영감을 얻게 된다. 그 이름이 내가 쓰는 이야기의 중심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길을 잡아주는 것 같다고 할까? 최소한 이 인물이 그 이름의 의미에서 벗어난 짓을 하진 않게 되더라.

복실이라는 이름에도 특별한 의미가 담겨있을까?
우리 할머니도 지난한 세월을 살아온 분이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삶의 지혜가 가득한 사람이라 느꼈다. 모든 할머니가 꼭 그런 건 아니겠지만 그래서인지 할머니라 불리는 이들을 삶의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 여기게 된다. 특히 시골 촌로에게서 그런 인상을 자주 발견하곤 하는데 인생에 찾아오는 필연적인 위기를 씩씩하게 잘 넘기며 오늘을 맞이한 할머니가 가질 수 있는 얼굴이 있다. 그렇게 앞으로 나아갈 힘만 있어도 복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걸 깨닫는 게 어쩌면 인생의 지혜일지 모르겠다. 그리고 할머니가 그걸 제일 잘 알고 있는 사람 같아서 복실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다.

유일하게 실존인물의 이름을 빌려온 장국영도 등장한다. 홍콩영화계의 한 시절을 상징하는 존재나 다름없는 이름을 가져온 계기가 궁금하다.
아까 시나리오를 쓰면서 지난 인생을 깊이 반추했다고 한 거 같은데, 영화에 애정을 품게 된 초심을 돌아보게 됐다. 생각해보니 나는 1975년생으로서 홍콩영화에 열광한 세대였더라. 당시 <천녀유혼>을 보고 장국영을 좋아하기 시작했는데 20대 이후로 영화에 대한 엄격한 기준이 생기고 감독이 되길 결심하면서 장국영은 잊고 살았다. 영화에 대한 명확한 취향이 생기고, 삶의 고민을 치열하게 던져준다고 느껴지지 않는 영화는 영화가 아니라는 편견에 빠져들면서 홍콩영화를 멀리하게 됐다. 그런데 인생을 돌아보니까 내가 좋아했던 영화라는 것의 맨 앞줄에 장국영이라는 스타가 있었던 거다. 아무 생각 없이 영화라는 것 자체를 좋아했던 시절은 홍콩영화는 좋아했던 중학교 시절이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그래서 조금 개연성이 떨어지고, 논리적이지 않아 보일지 몰라도 판타지 캐릭터를 보여주는 게 이 영화만의 재미일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장국영을 불러들이게 됐다. 지금 이 세상에 없는 스타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말이 되는 거 같기도 하고.

장국영은 필연적으로 노스탤지어의 대상일 수밖에 없는데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장국영(김영민)은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수호신 같아서 흥미로웠다.
요정이지.(웃음) 어쩌면 사실 찬실이 본인일 수도 있고. 찬실이 스스로 자문자답하는 건데 영화는 그걸 장국영이라는 인물에게 투영해서 보여주는 거라고 볼 수도 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그게 좀 더 그럴듯하다고 본다. 자기가 결국 자신의 내면을 만난다는 것이.

장국영을 연기한 김영민 씨가 속옷만 입고 연기하느라 고생이 많았을 거 같다. 배우가 추위를 참지 못하고 덜덜 떠는 게 보일 정도였으니까.
너무 추웠다.(웃음) 완전히 한겨울이었으니까. 원래는 처음 등장할 때에만 속옷 차림으로 등장하면 되는데 김영민 선배가 자기는 쭉 입을 수 있다고 하더라. 그런데 내가 심장마비에 걸릴 거 같아서.(웃음) 영화를 정해진 회차 안에 마무리해야 예산도 넘치지 않게 쓸 수 있는 거라 김영민 선배가 무사히 촬영을 끝내는 것도 중요했다. 그래서 정말 상징적으로 필요한 장면이 아닌 이상에는 속옷 차림을 고집하지 않기로 했다.
정동진독립영화제에서 단편영화 <자유연기>의 주연을 맡은 강말금 씨를 처음 보고 메일로 캐스팅 제안을 했다고 들었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서 <집시의 시간>을 언급하는 신에서 강말금 씨가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장면은 <자유연기>에서 보여준 아코디언 연주를 보고 추가한 장면일 거 같은데, 강말금 씨를 캐스팅한 뒤 찬실이 캐릭터에 일부 변화가 있었을 거 같다.
원래 배우가 가진 특징을 한껏 살리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강말금 배우로 결정된 뒤 시나리오를 고친 부분이 많다. 원래 시나리오상에서 찬실이 대사는 사투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강말금 배우와 이야기해보니 부산 출신이더라. 그래서 경상도 사투리를 쓰면 인물을 보다 코믹하게 연출할 수 있을 거 같았고, 관객 입장에서는 더욱 친근하게 느껴질 거 같았다. 그리고 1992년도에 방송된 <정은임의 FM 영화음악>에서 <집시의 시간>을 언급한 부분이 녹음된 카세트테이프를 듣는 장면은 원래 시나리오에 있었지만 아코디언 연주는 <자유연기>를 보고 집어넣은 거다. 아마 대다수의 관객들은 <집시의 시간>이라는 영화를 모를 텐데 아코디언 연주를 가미하면 그런 내용을 잘 따라올 거 같았고, 아코디언이 집시 음악에 자주 쓰이는 악기라 정서적으로도 어울리고. 그래서 <집시의 시간> 주제곡을 연주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저작권 문제로 해당 곡을 쓸 수 없어서 영화와 잘 어울리는 ‘희망가’라는 곡으로 대체했다.

그 장면은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는 순간이자 이 영화가 헌사를 바치는 모든 것들이 공존하는 시간 같기도 하다. <집시의 시간>이라는 영화를 위한 시간이자 강말금이라는 배우를 위한 시간이자 장국영을 위한 시간이자 결과적으로 찬실이를 위한 시간이다.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 안에서 유일하게 서정적으로 다가오는 순간이기도 하고.
처음부터 인서트 컷이 없는 영화를 생각했고, 촬영감독과 논의 끝에 쓰지 않기로 했다. 왜냐면 <찬실이는 복도 많지>가 인물 중심 영화라 줄기가 되는 사건이 없어 보이는 영화다 보니 서정적인 인서트 컷이 의미 없이 삽입되면 영화가 늘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해서 영화의 밀도를 유지하기 위해 인서트 컷을 사용하지 않는 게 좋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영화가 어느 순간에는 잠시 쉬었다 가는 부분도 존재해야 하는데 인서트 컷이 없다 보니 그런 면이 부족하게 느껴졌다. 그걸 메울 수 있는 방법이 뭘까 고민하다 보니 ‘희망가’ 전곡을 연주해도 좋겠더라. 찬실이의 감정에 깊게 이입하면서도 관객을 한번 쉬게 만들고 싶었다. 의도대로 느껴졌는지 모르겠지만.(웃음)

에밀 쿠스트리차의 <집시의 시간>이 찬실이가 영화를 꿈꾸게 만든 작품이라고 하는데 혹시 본인에게도 이 영화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걸까?
맞다. 싱겁겠지만 내가 감독이 되길 결심하게 만든 영화가 <집시의 시간>이었다.

그렇다면 혹시 찬실이처럼 오즈 야스지로는 좋아하고, 크리스토퍼 놀란은 싫어하는 걸까?(웃음)
아, 그건 좀 다르다.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감독님 중 하나가 오즈 야스지로인 건 맞지만 크리스토퍼 놀란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웃음) 일단 찬실이가 영화밖에 모르는 사람처럼 보이길 원했기 때문에 영화 취향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흠모했던 남자를 하루아침에 싫어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데 찬실이는 김영과 불과 다섯 살 차이밖에 나지 않기 때문에 소위 말하는 작가주의 영화를 좋아한다 해도 시류상 확연히 다른 선호를 가진 시네필이라는 걸 보여줘야 했다. 그럴 때 어떤 감독이 오즈 야스지로와 그 정도 대비를 이룰 수 있을까 생각하다 보니 떠오른 감독이 크리스토퍼 놀란이었다. 그리고 외국관객은 느낄 수 없겠지만 ‘놀란’이라는 한국어 발음의 중의적 느낌도 있지 않나. 찬실이 입장에서는 김영 입에서 크리스토퍼 놀란이 나오는 게 놀라 자빠질 일인 거니까.(웃음) 그 두 의미를 섞어서 전달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이 기회를 빌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개인적으로 크리스토퍼 감독 절대 싫어하지 않는다.(웃음)

장국영과 <아비정전>,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이야기>, 크리스토퍼 놀란, 빔 벤더스의 <베를린 천사의 시>, 에밀 쿠스트리차의 <집시의 시간>까지, 이 모든 이름과 제목이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서 언급된다. 그런 면에서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영화를 위한 영화처럼 느껴지는데, 어쩌면 이 영화를 만들면서 본인인 가진 영화에 대한 애정을 더 크게 느끼지 않았을까 궁금하다.
맞다. 영화 좋아한다. 어렸을 때부터 힘든 시기를 겪고, 방황도 많이 했고, 하고 싶은 게 별로 없었다. 학교 다닐 때 모범생도 아니었고, 그리 열심히 살지도 않았다. 그런데 스물세 살에 영화를 하자고 마음먹은 뒤부터 열심히 살았다. 그때부터 정신 차리고, 술도 덜 먹고, 돈도 더 야무지게 열심히 벌고, 꿈이 있으니까 그렇게 되더라. 물론 그렇게 돈벌이를 하다 보니까 감독이 되고 싶다는 꿈도 많이 밀렸지만 어쨌든 영화에 대한 순정은 확실했다. 다른 건 몰라도 영화만큼은 놓치지 않고 잘 가져가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내가 뭔가 잘못 생각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잘못 생각했다는 게 무엇인가?
영화라는 것도 결국 삶의 일부 아닌가. 영화보다 더 큰 범주에 삶이 있는 거지. 그러니까 삶을 잘 살아야 사실 영화도 의미 있는 거고. 그런데 어릴 때에는 그걸 너무 몰랐다. 돈 없어서 영화 그만 둘 거라는 애들을 막 야단치고 그랬다. ‘아니, 그런 데에 왜 흔들려?’ 이러면서. 사실 그런 말 할 자격도 없었지. 그저 영화하면 됐다는 식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만 정했을 뿐 어떻게 살 것인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진짜 산다는 게 뭔지 궁금해해 본 적도 없고, 그저 꿈을 향해 내달리는 인생을 살아왔던 거다. 그런데 삶이란 게 그렇게만 사는 게 아니었던 거지. 그래서 <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만드는 과정이 무엇을 할 것인가만큼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태도도 그만큼 중요하다는 걸 절실하게 깨달았다. 그래서 이제는 행복에 다가가는 길을 조금 더 알게 됐으니까 마음먹은 대로 한번 가보자는 단계까진 다다른 거 같다.

영화감독이 된 뒤에 영화에 매몰된 과거를 알게 된 셈이라니, 아이러니하다.
그렇지. 결국 <찬실이는 복도 많지>라는 성장담을 만든 건 이 영화를 만드는 과정이 나에게도 깨닫고 성장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가 첫 장편 연출작인데, 강말금 씨도 이 영화로 첫 장편 주연을 맡았다. 그런 면에서는 감독과 주연배우가 유사한 동기부여가 되는 영화를 만난 셈인데 그런 부분에 대한 필연적인 교감이 있었을 거 같다.
의도했던 건 아니지만 만나고 보니까 처지가 비슷하더라. 찬실이도, 강말금도, 나도. 꿈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비슷한 처지의 삶을 살아온 사람이 만나게 됐다고 느꼈다. 그래서 이런 처지에 놓인 사람이 많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고, 이 영화가 만들어지면 결국 누군가에게는 의미 있는 작품이 될 거라는 희망을 느꼈다. 일반인에게 영화 PD라는 직업은 생소하겠지만 찬실이가 처한 상황은 그 누군가의 경험과 유사한 보편성으로 다가갈 수 있다는 확신이 점점 더 커졌다. 강말금이라는 사람을 만나면서.

<자유연기>에서 보고 캐스팅한 강말금 씨와 함께 영화를 만들면서 배우로서 새롭게 발견했다고 느낀 부분이 있었을까?
좋은 얼굴을 가진 배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원샷을 받을 때 기대했던 것보다 얼굴이 더 좋았다. 물론 다른 배우와 어울릴 때도 좋지만 원샷에서 훨씬 더 시너지가 나는 얼굴이더라. 사실 <자유연기>의 오디션 신에서 울 때 그 얼굴에서 느껴지는 진정성이 좋아서 캐스팅하고 싶었다. 단순히 연기를 잘한다, 못한다의 문제를 넘어 얼굴이 주는 힘이 상당했다. 찬실이는 나름대로 인생을 잘 살아왔음에도 위기를 맞이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얼굴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원샷을 받을 때 나오는 얼굴에서 다른 배우로부터 쉽게 보이지 않았던 힘이 느껴졌다. 특히 ‘우리가 믿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보고 싶은 거’라는 독백이 나오는 엔딩신에서의 얼굴은 정말 마음에 든다. 사실 인생에서 잘 이뤄지지 않는 것들이지 않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는 점에서 삶은 가치 있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런 메시지를 전달하는 얼굴 자체가 중요한 장면이었다. 그런데 강말금 배우의 얼굴이 그걸 해내고 있다고 느꼈고, 덕분에 감독으로서 더 큰 힘을 받게 된 순간이 됐다.

김도영 감독의 <자유연기>에 출연한 강말금 씨를 캐스팅해서 처음으로 장편영화를 연출을 했는데 흥미롭게도 김도영 감독에게도 <산나물 처녀>의 정유미 씨를 캐스팅한 <82년생 김지영>이 장편영화 연출 데뷔작이었다. 흥미로운 우연이지만 두 감독이 서로 각자의 단편영화 주연배우를 맞트레이드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을까?
여담인데, 강말금 씨를 처음 만나고 온 날 밤에 정유미 씨랑 잠깐 통화를 했다. 당시 유미 씨는 <자유연기>를 보지 못한 상태였는데 그날 <자유연기>를 연출한 감독님이 자기한테 시나리오를 줬고, 한번 만나볼까 한다고 하더라. 그래서 <자유연기> 정말 좋은 작품이라 추천했는데 정유미 씨가 <자유연기>를 본 뒤 너무 마음에 들었나 보더라. 그래서 나한테 강말금 씨를 꼭 잡으라고 했는데 이미 같이 하기로 했던 상황이라 잡고 말고 할 것도 없었지.(웃음) 아무튼 그런 배우를 찾아서 <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찍게 됐다는 사실을 너무 기뻐해 줬다. 동시에 정유미 씨도 <자유연기>를 보고 김도영 감독을 만나고 싶다고 생각한 거니까, 결국 다 <자유연기> 덕분인 거 같다.

복실 할머니가 찬실이에게 받침이 모두 틀린 문장으로 적은 시구 ‘사라도 꼬처럼 다시 도라오며능 어마나 조케씁미까’를 보여주는 장면은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서 가장 울림이 큰 장면일 것이다. 복실이 할머니가 찬실이만큼 중요한 서브플롯 캐릭터라는 것이 와 닿는 순간이기도 한데 감독 역시 그 인물에게 깊은 애정을 품고 있다는 것이 확연히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어릴 때부터 할머니 손에서 자랐는데 할머니가 실제로 한글을 모르셨다. 그리고 전쟁도 많이 겪으셨고. 일본에 거주하면서 일찍이 전쟁을 겪은 세대였고, 한국에서도 6.25 전쟁을 겪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여자 혼자 자식을 키워야 했는데 그 이후에도 집안 형편이 나아지질 않아서 손주 손녀까지 맡아서 키웠다. 그만큼 고단한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잘 사시다가 돌아가셨다. 늘 환하게 웃고, 얼굴 표정이 좋았다. 글을 몰랐지만 몸으로 체화한 삶의 지혜가 있는 사람이었다.

복실에게 그런 할머니가 반영된 걸까?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시나리오를 쓰면서 이 영화가 완성될 때 즈음에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없겠구나 생각한 적이 있었다. 실제로 작년 12월 26일에 95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는데 시나리오를 쓸 때 인생 자체를 돌아보면서 죽음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했다. 누구나 죽는다는 걸 알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죽음을 떠올리진 않는다.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기도 하고. 하지만 우리 모두 죽는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그리고 죽는다는 사실을 안다는 건 인생이 유한하다는 걸 계속 인식하며 살아간다는 의미일 텐데 삶이 유한하다는 걸 계속 인식하면서 살아간다는 건 대체 어떤 의미일까 생각하게 됐다. 그런 과정에서 할머니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인식하는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이 무한하다면 살아가는 시간이 귀하지 않을 거다. 그런데 유한하기 때문에 모든 시간이 귀하고, 내게도 할머니와의 추억이 아름답게 남아있는 거지. 그리고 영화는 하나의 기록을 물질화시킨 매체이기도 하다. 비록 영화로 만들어질지도 모를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음에도 할머니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을 새기듯 물질로 만들어 두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러면 이 영화가 망한다 해도 내게는 최소한 그 정도 의미가 남을 테니까.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복실 할머니가 쓴 시구가 떠오르더라. 사람은 죽으면 다시 꽃처럼 못 돌아오니까. 아이러니하지만 처연해서 더 아름다운 거다. 그런 마음을 새겨 두고 싶어서 그 장면을 찍었고, 그렇게 만든 영화를 꽁꽁 싸매서 부산국제영화제에 내려가 처음 공개했다. 그리고 그때까진 할머니가 살아 계셨는데 작년 말에 결국 돌아가셨지.

김영과 찬실이가 자신의 할머니를 언급하는 장면도 그런 마음이 반영된 결과였을 거 같다.
김영이 말하는 할머니나 찬실이가 말하는 할머니 그리고 복실이 할머니까지, 다 우리 할머니를 나눈 거다. 시나리오를 쓸 당시에는 김영의 할머니처럼 우리 할머니가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이기도 했고.
파리에서 6년간 영화 공부를 하고 돌아왔다고 들었는데 그런 경험은 파리에서 영화 유학을 했다는 김영에게 투영된 것 같기도 하다. 혹시 ‘감독들은 요즘 뭐하냐고 물어보면 다들 영화 만든다는 얘기는 하지 않고 시나리오 쓴다고 하잖아요’라는 찬실이의 대사처럼 그런 대답을 해야 했던 시절이 있었을까?
없었다. 그런 면에서는 운이 좋았던 거 같은데 <산나물 처녀> 이전에 만든 단편 <우리 순이>나 <겨울의 피아니스트>는 제작비가 거의 들지 않는 영화였다. 아마 5만 원도 들이지 않았을 걸. 좋은 배우들이 그냥 나와 하루 동안 재미있게 시간을 보낸다는 생각으로 작업에 참여해준 단편이었으니까. <산나물 처녀>는 제작 지원을 신청했고, 통과해서 제작비를 받을 수 있게 된 덕분에 찍을 수 있었고, <찬실이는 복도 많지>도 시나리오를 쓰고 제작 지원을 신청했는데 지원금을 받을 수 있게 돼서 역시 촬영할 수 있었고. 그러니까 나에게는 ‘지구는 돈다’고 하는 시간은 없었던 거다.(웃음) 이렇게 말하니까 잘난 척하는 건가 싶기도 한데, 그저 운이 좋았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 이전에 단편영화 연출도 했지만 개봉을 목표로 한 장편영화 연출은 처음이었다. 장편영화 연출을 마치고 나서 감독이라는 직업에 대한 관점이 변한 바는 없었을까?
영화감독이 되지 않는 이상 다들 쉽게 하는 말이 있다. 감독은 너무 이기적이라고, 자기밖에 모른다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기본적으로 감독의 말을 따라야 영화라는 게 완성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니까 감독에 대한 존경심도 있었고. 그런데 막상 감독이 되고 나서 알았다. 감독은 무언가를 결정해야 되는 사람이더라. 그리고 결정해야 하는 것의 가짓수가 실로 어마어마하다. 더 큰 상업영화 신으로 가면 얼마나 많은 걸 결정해야 할지 그려지기도 하고. 한 회차를 촬영하는 데에도 결정해야 할 게 수백 가지나 된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결정을 잘해야 된다. 그래야 좋은 영화가 나오니까. 어떨 때에는 스태프 말에 귀를 기울여야 되고, 어떨 때에는 스태프를 설득해야 하고, 어떨 때에는 싸워야 한다. 생각하는 바가 확실하면 흔들리지 않도록 관철시켜야 한다. 이런 조율 자체가 굉장히 힘들다는 걸 알게 됐고, 감독으로서 나름의 고충이 있다는 걸 느꼈다. 가끔씩은 ‘이런 것까지 감독에게 물어보는 거야? 알아서 해줘야 하는 거 아냐?’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실질적으로 그들이 결정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안다. 그런데 알면서도 환장하겠다 싶을 때가 있는 거고.(웃음)

장기하와 얼굴들 베이시스트 출신 뮤지션인 정중엽 씨가 <찬실이는 복도 많지>로 처음 음악감독을 맡았다.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던 걸까?
전혀 모르는 사이였다. 영화음악만큼은 나와 잘 맞는 사람과 신경 써서 작업하고 싶어서 열심히 찾았다. 처음 해보는 사람과 작업하고 싶었거든. 왜냐면 내가 원하는 류의 음악이 있었기 때문에 내 의견에 충분히 공감하고 의견을 나누면서 그 결과를 잘 구현해줄 사람이 필요한데 베테랑 음악감독에게 그런 요구를 하는 건 조금 실례가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작업 기간을 넉넉하게 잡고 많은 대화를 나누며 작업하고 싶었는데 신인이어야 그럴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다 지인의 추천으로 정중엽 씨를 만났을 때가 아마 장기하와 얼굴들로 10년간 활동하고 해체했을 즈음이었을 거다. 그게 제일 마음에 들었다. 어떤 면에서는 찬실이의 입장과 비슷하지 않나.(웃음) 오랫동안 밴드를 하다가 새로운 장으로 발을 딛는 거니까 그만큼 간절함도 있고, 그만큼 열심히 작업에 임해줄 거 같고. 그래서 만났는데 정말 나이스 한 사람이었다. 동시에 영화를 굉장히 좋아하더라. 음악을 잘하는 뮤지션이라 해도 영화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질 수 있지 않나. 그런데 정중엽 씨는 영화인만큼이나 영화를 이해하고 영화도 많이 보는 영화광이더라. 그만큼 감독으로서 많은 걸 제시해볼 수 있을 거 같고. 결과적으로 소통이 정말 잘되는 사람이었다.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사설방아타령’을 편곡 개사한 ‘찬실이는 복도 많지’라는 곡이 나오는데 그 곡의 아이디어는 누구로부터 출발한 것인지 궁금하다.
모든 건 우연이 필연으로 이어지는 과정이었는데 원래 생각했던 엔딩곡은 장국영이 등장하는 극장 신에서 나오는 음악이었다.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그 곡이 이어지면서 끝나는 거였지. 그런데 무용가 안은미 선생님 공연의 뒤풀이에 갔다가 우연히 이희문이라는 소리꾼을 알게 됐고, 친구가 됐다. 그러다가 영화 제목이 <찬실이는 복도 많지>로 정해지는 순간 그 이름에 민요가 어울릴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친분이 두터워진 이희문 씨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래서 정중엽 음악감독에게 순박한 제목에 어울리는 민요를 가져와서 엔딩곡을 만들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는데 재미있을 거 같다고 하더라. 다만 기존에 설정한 엔딩곡에서 새롭게 구상한 민요 바탕의 엔딩곡으로 연결될 때 느낌이 튈 수 있으니 이걸 부드럽게 편곡해야 한다는 의견을 들었고, 그 과정에서 이희문 씨가 ‘사설방아타령’을 추천해줘서 내가 개사를 하고, 정중엽 음악감독이 편곡을 했다. 들어보면 알겠지만 원곡은 ‘찬실이는 복도 많지’보다 훨씬 센 타령인데 편곡을 정말 잘했다. 친구 하나 믿고 화끈하게 노래해준 이희문 덕이기도 했고. 내가 돈복은 없어도 인복은 정말 타고났다.(웃음)

갑자기 감독이 죽는 비극이 펼쳐지는 오프닝 시퀀스에서는 쇼팽의 장중한 소나타 ‘장송행진곡’이 울려 퍼진다. 덕분에 그 상황이 좀 코믹하게 느껴지는데 감독의 죽음이라는 설정이 지나치게 극단적인 건 아닌지 고민하진 않았나?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찬실이가 영화 PD로서 실직한 이후에 겪게 되는 위기와 극복 그리고 성장을 그린 영화다. 그렇다면 실직 과정 자체가 찬실이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가를 우선 보여줘야 하는데 그 과정을 길게 보여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찬실이가 능력이 부족하거나 힘들어서 일을 그만두게 된다면 관객 입장에서는 이후 서사의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느낄 거 같아서 보다 강렬한 상실감이 필요했다. 개인적으로 가까운 사람을 잃는 것만큼 강렬한 상실감은 없다고 생각해서 비록 기괴하게 느껴진다 해도 임팩트 있는 시작이 될 거라 생각하니 괜찮아 보였다. 죽음 자체를 윤리적으로 폄하하는 설정이기보단 찬실이가 끌고 나갈 서사에 가장 어울리는 톤이라고 판단했다. 강렬하지만 무겁지 않은, 그리고 역설적인 오프닝 시퀀스가 자리하는 것이 이 영화에 어울리는 균형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찬실이가 오랫동안 열심히 자기 삶을 살았던 사람임을 함축적으로 드러내야 하는 신이었는데, 그런 면은 확실히 보여줄 수 있는 장면이었던 거 같고.

타이틀 크레딧이 교차 편집되는 방식이나 특유의 클로즈업 샷에서 홍상수 감독의 기시감이 상당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오프닝 시퀀스에서만 그런 특징이 명확하게 느껴지고 그 이후에는 완전히 다른 영화가 된다는 점에서 이는 무의식으로 반영된 영향력의 결과이기보단 의도적으로 끌어온 인용의 결과처럼 보인다. 오프닝 시퀀스와 그 이후의 영화가 분리된 시간처럼 보이기도 하고.
사실상 그 서사는 과거의 나 자신과 결별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구성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지 감독이라는 캐릭터를 특정 인물을 상정해 만든 건 아니다. 그러려고 했다면 해당 인물과 비슷한 외모의 배우를 썼을 텐데 오히려 그런 가능성을 의식했기 때문에 전혀 다른 얼굴의 배우를 쓰고자 했다. 그리고 홍상수 감독님의 PD였다는 이력이 나 자신에게도 의미가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런 경력을 연상시키는 분위기를 풍긴다 해도 상관없겠다고 생각한 바는 분명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찬실이의 실직 과정을 그린 전사가 어떻게 보이는 것이 관객 입장에서 보편적으로 납득이 될까 고민했을 때 그런 식의 오프닝이 어울린다고 생각했다는 거다.
오프닝 시퀀스 이후로 찬실이가 이사를 가는 신이 이어지는데 찬실이가 머물게 된 동네가 서울처럼 보이지 않아서 촬영장소가 궁금해졌다. 게다가 찬실이가 묵게 되는 하숙집의 방도 영화 속 대사처럼 반지하도 아니고, 사각형도 아닌 방인데 삶의 규격을 찾지 못한 찬실이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 같고. 홍제동 개미마을에서 촬영한 것으로 아는데 그 공간을 찾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하다.
일단 제작비 때문에 무조건 서울에서 촬영해야 했는데 기본 설정은 산동네였다. 그리고 그 산동네가 굉장히 이질적인 공간이길 바랬다. 왜냐면 찬실이는 다른 사람과는 전혀 다른 페이스로 살고 있으니까, 자기한테 깊숙이 빠져서 자기 문제를 해결해가는 상황에 있으니까 공간 자체도 굉장히 낯설게 느껴지는 곳이길 바랬다. 그렇게 다시 세상에 나왔다가 집으로 돌아가면 자신만의 공간으로 들어가게 되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곳은 복실 할머니와 장국영이 사는 곳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찬실이의 내면이라 봐도 좋을 거다. 복실 할머니가 실제로 사는 집이긴 하지만 할머니가 이웃을 만나는 경우도 없고, 오로지 찬실이만 만나고 있지 않나. 그런 식으로 찬실이에게 더 집중하게끔 만들기 위해선 있을 법하면서도 낯선 공간에 찬실이를 머물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만든 말이지만, 일종의 생활밀착형 판타지랄까.(웃음)

영화상에서 찬실이의 숨통을 열어주고, 삶을 돌아보도록 영감을 주는 복실 할머니를 연기한 윤여정 씨가 현실에서도 영화 현장에 돌아오게 만들어준 장본인이었다. 게다가 시나리오를 보지 않고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출연을 수락했다고 하던데, 심지어 노 개런티로 출연한 것이라 들었다.
살다 보면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그럴 때 생각지도 못한 이의 도움을 받게 되는 일도 생긴다. 그것도 내 운이자 복이지 않을까 싶은데, 사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다시 일어서기 위해선 자신의 의지도 중요하겠지만 많은 사람의 도움도 필요하다. 나도 여러 번 어려움에 처했지만 그때마다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서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윤여정 선생님은 실직했을 당시 나에게 가장 큰 도움을 주신 고마운 분이셨다. 배우가 노 개런티로 영화에 출연한다는 건 보통 감독의 연출력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에나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그냥 김초희라는 사람 하나 보고 출연을 결정했다는 건 내가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으니 그저 선배로서 도와주겠다는 마음만으로 결정한 것일 텐데 그만큼 큰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신인감독이 얼마나 만족스러운 영화를 만들 수 있겠냐마는 적어도 폐를 끼쳐선 안된다는 생각으로 더 열심히 잘 만들고자 노력했다. 그런데 부산영화제에서 처음 영화를 보시고는 적어도 부끄럽지는 않다고 하셔서 마음을 놓았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지.

<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연출하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 원하는 대로 영화감독이 됐다. 혹시 차기작에 대한 계획이 있을까?
일단 써 놓은 시나리오가 하나 있긴 하다. 일종의 시대극이자 학원물인데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하던 1992년에 부산 엠마누엘 고등학교라는 후기고등학교를 배경으로 둔 영화다. 엠마누엘 고등학교는 전국 유일의 인문계 후기고등학교인데 후기고등학교가 뭐냐면 인문계에 떨어진 애들이 가는 고등학교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꼴통들이 모인 학교인 거지. 이런 배경에서 한 여고생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코미디 영화인데 이걸 상업영화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 그리고 또 하나 구상 중인 시나리오도 있는데 <찬실이는 복도 많지> 개봉이 마무리되면 그 작업을 빨리 마무리하고 싶다.

원하는 대로 영화감독이라는 꿈을 이뤘다. 이제 영화감독으로서 살아갈 수 있을 거란 용기 정도는 갖게 되지 않았을까?
뭐, 이다음에 내가 어떻게 살게 될지는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 같다. 사실 기회가 주어진다면 계속 감독으로 영화를 만들고 싶은데 인생이란 게 계획대로 되는 건 아니니까. 그래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길이 생기지 않을까 싶으니 거기 맞춰서 한번 가보려 한다. 조급하게 군다고 될 일도 아니고, 너무 편하게 살자고 될 일도 아니니까. 그저 오늘 주어진 하루를 잘 살아보는 게 내 계획이다. 살아보니까 마음이 날씨랑 비슷하더라. 어떤 날은 흐리고, 어떤 날은 맑고, 어떤 날은 태풍이 불고, 그렇게 똑같은 날은 하나도 없더라. 그런 걸 느끼면서 중심을 잡고 살고 싶지만 이리저리 흔들리는 게 인생인 거지.

사진_장성용(studio beewave / studio greenbee)
장소 제공_어반스페이스오디세이(@uso_seoul)


2020년 4월 6일 월요일 | 글_민용준 영화저널리스트(mingun@nate.com 무비스트)
무비스트 페이스북 (www.facebook.com/imov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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