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말금’이란 이름이 뭔가 사연 있어 보인다. (웃음) 혹시 맑음에서 따온 걸까.
맞다. 국문과 출신인데 예전에 함께 시 활동하던 친구의 닉네임이다. 본격적으로 연기를 시작하며 건강한 이름을 쓰고 싶어 양해를 구해 사용하게 됐다.
김도영 감독이 연출한 단편 <자유연기>로 독립영화계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후 장편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주연을 꿰찼다. 늦게 연기에 입문했다고 밝힌 바 있는데 그간의 시간에 대해 잠시 얘기한다면.
대학교 때 연극회에 들어가 공연하면서 내 안에 오래 맺혀 있던 것들, 그러니까 유년시절에 걸친 가슴의 멍울들이 풀리는 느낌을 받으며 평생 연기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생각뿐, 졸업 후 직장에 들어갔다. 그렇게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마음은 콩밥에 가 있었던 것 같다. 연극이나 영화 등을 많이 보러 다니는 와중에도 어딘가 비관적이고 슬펐다. 뭔가 억울한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다 다시 무대로 돌아가기로 했다.
안정된 생활을 뒤로 하고 다시 연기를 시작한다는 게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거다.
사실 직장생활하며 넉넉하지 않았기에 그리 안정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남들은 박봉이라도 10년 정도 참고 모으면 어느 정도 기반이 잡힌다고 하는데 그렇게까지 못 견디겠더라.
무대가 (당신의) 자리를 마련해 놓고 기다리는 것도 아니니 복귀 후 적응하는 데도 어려움이 따랐을 것 같다.
막상 연극을 하러 가니 대학 때 경험이 있었을 뿐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기본기가 없었다. 유머 있고 센스가 뛰어나거나 혹은 본래 태가 좋다거나 그런 장점을 타고난 사람들이 있는데 그에 비해 나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이었던 거지. 생활 속에 밴 부산 사투리도 핸디캡이었고 나이와 키 등 신체적 조건도 모두 애매했다. 쉽게 말해 무대에 서 있는 게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상태라 작은 쓰임을 받기까지 5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뒤늦게 발레도 배우는 등 몸동작을 익히고 연습하며 열심히 따라갔지만, 솔직히 힘들었고 많이 위축됐었다.
<자유연기> 속 ‘지연’(강말금)의 대사를 빌리자면, 말 그대로 ‘버티는’ 시간이었겠다.
그렇지, 방 벽에 전지를 붙여 놓고 버팀목이 될 만한 온갖 말들을 써 놨었다. 가령 체형 등에 콤플렉스가 많은 편인데 뼈의 모양은 바꿀 수 없지만, 근육의 모양은 바꿀 수 있다 등등이다. 말했듯 위축되고 굉장히 마음이 약해져 있고 열등감이 존재하던 때라 별거 아닌 작은 하대를 받아도 확대 해석하며 자신을 괴롭히곤 했다. 그런 순간 쓰인 글을 보며 위안과 용기를 많이 받았다. 또 오늘 행한 노력이 바로 현실화되지 않아 실망감을 느낄 때마다 그 글들을 보며 내 방향성이 맞다는 확신을 받곤 했다.
그렇게 버틴 시간 끝에 결국 무대에서 쓰임 되는 배우로 거듭났다. 이후 김도영 감독을 만나 일약 독립영화계의 다크호스(?)로 떠올랐다. (웃음)
연기 경력이 횟수로는 14년 차라 하지만 초기 5년은 기본기를 다지는 시간이었다. 무대에서 본격적으로 역할을 맡은 것은 35세 정도부터인데 한 2~3년 하니 지치기 시작하더라. 때마침 엄마가 편찮으시고 나 역시 체력이 예전 같지 않았다. 중년이 시작된 느낌이라고 할까. 결혼도 하지 않았고 아이도 없는데 말이지. 꼭 결혼하겠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지만 나이가 들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던 시기다. 극 중 ‘찬실’과 비슷했던 것 같다. (웃음) 이런 감정이 쓰나미처럼 밀려와 연극을 잠시 쉬고 아르바이트하면서 영화를 찍어 앞길을 도모해보고자 했다. 당시 2월부터 매달 단편을 하나씩 찍고 있었고 <자유연기>는 7월에 들어간 거였다. 영화가 호평받고 이후 ‘찬실’로 캐스팅됐지만, 그 외에도 <자유연기>는 내게 각별한 행복감을 안겨준 영화다.
어느 면에서 그런가.
영화 자체의 시나리오가 참 좋았다. 김도영 감독님이 한국예술종합학교 재학 당시 워크숍 작품이라고 들었는데 동기 사이에서도 시나리오에 대해 소문이 자자했다고 들었다. ‘지연’이 오디션 마지막에 안톤 체호프의 희곡 <갈매기> 속 여주인공 ‘니나’의 독백을 자유연기한다. 연극배우라면 누구나 한 번쯤 하고 싶어 하는 배역이지만, 늦게 연기에 입문한 내겐 돌아오지 않던 역할이었다. 영화 속에서나마 니나의 대사를 할 수 있다는 게 너무 행복했다. 아르바이트할 때 손님이 별로 없으면 틈틈이 그 독백을 외우곤 했는데 너무 아름다워 지금도 읊으면 마음이 찰랑거리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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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김초희 감독의 캐스팅 제안을 받고 기분이 어땠나. 혹시 <자유연기>에서처럼 비장감 넘치는 모습으로 오디션을 본 것은 아니겠지?(웃음)
생각해보면 항상 캐스팅 제안을 받는 순간이 제일 기쁜 것 같다. 초희 감독님의 메일을 읽고 나니 이분은 누군데 이렇게 간곡한 메일을 보내셨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그 마음이 느껴졌었다. 이후 시나리오를 받아 보니 ‘찬실’이가 원톱인 거다! 믿어지지 않았지. 감독님을 만나 내가 꼭 ‘찬실’역을 안 해도 된다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술 마셨는데 다음날 보니 어느새 하는 거로 돼 있더라.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다. (웃음)
극 중 ‘찬실’이는 갑자기 일이 끊긴 PD다. 돈도 일도 집도 남친도 없지만 ‘복’있는 인물이다.
캐릭터에 공감할 부분이 많았다. 그가 처한 처지는 물론 40세 솔로의 재미있는 썸, 설렘 등 초희 감독님과 내가 그 감정을 너무 잘 알아서.. 시나리오상에는 좀 더 에너지가 넘치는 인물로 읽혔는데 어떻게 잘 표현됐나 싶다.
행동의 크기에서 오는 에너지는 아니지만 충분히 강한 기운을 지닌 인물이라 느꼈다. 찬실의 이웃 방을 근거지로 해 불쑥불쑥 등장하는 ‘장국영’(김영민)이라는 인물 설정이 흥미로웠다. 김초희 감독은 장국영 팬이었다고 밝힌 바 있는데 당신은.
살짝 시기를 비켜나지만, 나 때 역시 장국영은 인기 배우였다. 94~5학번 선배들을 따라 그가 주연한 <해피투게더>를 보면서 저렇게 생긴 사람이 있구나 하고 감탄했었다. 근데 사실 난 브래드 피트의 팬이었다.(웃음)
김초희 감독의 덕후 기질이 느껴진 게 극 중 ‘크리스토퍼 놀란’ 파인 ‘영’(배유람)과 ‘오즈 야스지로’파인 ‘찬실’의 대화였다. 찬실의 생각에 동의하나. 또 평소 좋아하는 감독과 작품이 있다면.
음, 굳이 고르라면 ‘오즈 야스지로’ 파지만, 그의 작품 중 두 편 정도 찾아본 정도다. 초희 감독님은 프랑스 유학 시절 오즈 감독을 주제로 논문을 썼을 정도로 그에게 정통한 분이다. 지금 문득 떠오르는 것은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2014)를 연출한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이다. 최근 본 영화 중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아주 좋았다. 보고 난 후 행복하게 극장 문을 박차고 나왔었다. 아름다운 영상은 물론이고 자유롭고 모순적이며(유산시키는 여인 옆에 갓난아기 등을 배치하는 등) 하고 싶은 말을 모두 구조 속에 넣은 느낌이었다. 평소 많은 요소가 존재하며 교차하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다.
이번 ‘찬실’ 캐릭터가 40대, 싱글 등 현실적인 입장과 유사하다면 <자유 연기>에서는 젖먹이의 육아에 지친 엄마를 연기한다. 극 중 직업이 배우라는 접점이 있긴 하나 육아의 고단함은 생소한 감정이었을 것 같다.
<자유연기>는 도영 감독님의 자전적인 이야기라고 들었다. 오디션 때 정말 엉엉 울은 경험이 있다고 하더라. 도영 감독님이 모델인 역을 장본인 앞에서 연기한다는 게 처음엔 위축됐었다. 그런데 감독님께서 지금의 톤이 좋다고 별다른 디렉션 없이 내가 연기하도록 놔두셨다. 극 중 지영이 경험하는 ‘육아’의 어려움은 잘 모르지만, 그녀가 지쳤다는 것이 충분히 느껴졌다. 나 역시 배우로서 역할을 따기 위해 고생한 적이 있어 더 이입한 것인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지쳤다는 감정에 크게 공감했다는 것이다.
오롯이 혼자 극을 이끌었던 <자유연기>와 달리 이번엔 윤여정 선생님을 비롯 윤승아, 배유람, 김영민 등 여러 배우들과 함께했다. 많은 경험을 한 현장이었을 것 같다.
지금까지 혼자 돌파하며 살다 보니 내가 상대에게 좋은 배우인지 의심을 가진 편이다. 앞으로 개선하려 생각하고 변하고 있는 면인데, 이번 현장을 겪으며 액션과 리액션을 주고받는 배우가 돼 상대의 연기를 받아주는 넓은 그릇을 가지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또 윤여정 선생님께서 분명 내게 아쉬운 부분이 있을 텐데 한마디도 안 하시는 것을 보고 감탄했다. 사석에서는 대선배님이지만, 촬영장에서는 집주인 할머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정말 딱 그 입장에서 나를 대하셨다. 정말 초고수시다. 난 어느 정도 무대 경험이 쌓였을 때 후배에게 조언하곤 했거든. 좋은 마음에서 한 것이지만, 당시는 서로의 연기에 대해 언급하게 되면 상대를 배역으로만 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몰랐다. 또 말하고 싶은 유혹을 참기 힘들기도 했었고,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다. (웃음)
김도영 감독의 <82년생 김지영>을 비롯해 작년은 <벌새>, <메기> 등 여성 감독의 활약이 어느 때 보다 두드러진 한 해였다. 이번 <찬실이는 복도 많지> 역시 여성 감독이 쓴 여성 서사의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일전에 기자간담회에서도 이런 시류의 수혜자 중 한 명이라고 밝힌 바 있다. 변화의 흐름을 체감하나.
물론이다. 여성끼리 남성끼리 이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마음을 열고 이야기를 받아들일 분위기가 조성되고 점차 문화로 자리 잡아 간다는 게 핵심이다. 여자 주인공은 예쁘고 젊어야 하는, 어느 정도 대상화된 시대인 과거였다면, 크게 예쁘지도 않고 나이 든 배우인 내가 이렇게 주인공을 할 수 없었을 거다. 얼마 전 대학로에서 30대인 다섯 여성과 한 남성이 나오는 연극을 봤다. 그중 레즈비언 커플이 로맨스 감성을 전달하는 데서도 변화를 실감했다. 과거였다면 로맨스의 주인공은 날씬하고 예쁜 여배우였을 텐데 지금은 정형화된 미인은 아닐지라도 개성 있는 외모의 배우가 그 역을 한다는 게 기분 좋았다. 앞으로 재능 있는 여성 감독들이 더욱더 그 역량을 펼쳐 나갔으면 한다.
다음에는 어떤 작품으로 만날 수 있나.
ATO가 제작한 <애비규환>은 촬영을 끝냈고 후반 작업 중이다. 지금은 박동훈 감독님의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촬영 중이다.
마지막 질문! 소소한 행복거리가 있다면.
일단 버스나 지하철 등을 전혀 안 타는 날이 좋다. 집에서 어슬렁거리며 보내다 잠시 동네 뒷산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에 빵 하나 사서 집에서 커피 내려 같이 먹는 순간! 지는 해를 바라보는 그 시간이 참 좋다.
2020년 3월 4일 수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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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박광희 실장(Ultra Stud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