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오랜만의 신작이라 떨릴 것 같다.
붕 뜬 기분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2012)가 벌써 7년 전이라 그동안 마케팅 방식과 과정이 많이 변했더라. 예매율 등 수치를 바로바로 보여주니 긴장되고 그렇다.
<광대들: 풍문조작단> (이하 <광대들>) 속 광대들이 조작한 풍문에 이러 저리 휘둘리는 민심을 보면서 저절로 정보의 홍수 속에 갇힌 현재가 떠올랐다.
우리가 매일 보는 뉴스가 조선 시대로 치면 사관이 기록한 역사일 수 있다. 600년 전에 있었던 일인데 현재와 별반 다를 바 없고 또 앞으로도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론이 어떤 힘에 의해 왜곡되고 편향됐는지 한 번쯤 생각해 보고자 했다.
가짜뉴스가 판치는 요즘, 특히 다뤄야 할 시의적절한 주제가 아닌가 한다. 일부러 의식하거나 부각하고자 한 건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 외면한다 해도 모를 수 없겠지만, 콕 집어 가짜뉴스를 겨냥한 것은 아니다. 역사라는 게 기록 시점과 관점에 따라 선악이 달라지는 등 시간이 지나면서 재해석되기 마련이다. 굳이 어떤 것을 특정하거나 강조하지 않아도 옛 시대를 다루다 보면 현재 우리 삶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건드린다고 생각한다.
전작이 팀플레이를 통해 서빙고의 얼음을 훔치는 과정을 다룬 팩션 사극이었다. 이번 역시 마찬가지다. 그 쾌는 무얼까.
영화를 만드는 것 자체가 여러 전문가가 모여 하나의 공동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 아닌가. 양보하고 배려하면서 다듬어가고, 멀티캐릭터에 각자의 역할을 부여하는 과정이 재미있다. 전작의 서빙고를 터는 일이나 이번 이적 현상을 만드는 거나 모두 혼자 할 수 없는 일이니 주인공이 여러 명일 수밖에 없다. 관객 입장에서도 원톱도 좋겠지만, 여럿 중 자신이 특히 좋아하는 인물이 생기고 그를 응원하는 즐거움도 크지 않을까. 또 전작이 흥행에 성공해 유사한 작품 제의가 들어오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번 <광대들>은 일단 재미있고 담고 있는 메시지가 선명해서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광대들>의 시나리오를 직접 각색했다. 작업하면서 변화된 부분과 주안점은.
세조 시대 발생한 40여 건에 달하는 이적 현상이 조작이라는 골자는 그대로 가져왔다. 다만 행위의 주체가 원래 (몰락한) 양반집 자제들이었는데 이를 광대로 바꿨다. 이적 현상을 연출해야 하는데 이에 개연성을 살리려면 당대 최고의 아티스트가 출동해야 하겠더라. 각본가, 음악가, 미술가 등등이 필요한데 이런 일을 당대에 누가 맡았는지 생각해 보니 바로 광대들이었다. 또 그들에게 소명 의식이라 표현하기엔 거창하지만, 예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불어넣고 싶었다. 그래서 메인 플롯을 광대들의 성장기로 가져 갔다. 인간답게 살고 싶던 욕심에 ‘덕호’(조진웅)를 중심으로 한 광대패가 ‘한명회’(손현주)의 미끼를 물고 처음에는 승승장구해 신분 상승과 풍족한 삶을 보장받으나 결국 자신들의 과오를 깨닫고 원점으로 되돌린다.
작업 마친 후 만족도는 어떤가.
제작사와 투자사가 믿고 지지해준 덕분에 하고 싶은 대로 실컷 할 수 있었다. 물론 예산과 시간제한, 공간 로케이션 등 과정상 어려움이 있었지만, 감독의 위치를 흔드는 이슈는 없었다. 확실히 데뷔작 할 때보다 많은 분이 내 의견에 경청했고, 마음껏 해보라며 격려해줘서 감사하다.
꽃비, 부처님 현신, 정이품송, 문수보살 등 40여 건의 이적 현상 중 몇몇이 극 중 소개된다. 선택 기준은.
일단 실록에서 하나하나 다 찾아봤었다. 중구난방이지만, 불교적 색채가 강한 것이 공통점이었다. 우선 세조 말 시기에 얼추 맞는 것을 추리고 이를 병렬적으로 나열하는 과정에서 상승해야 했다. 즉 이적의 규모가 점점 더 커져야 되는 거지. 처음엔 작게 시작해서 이후 도성 한복판으로 무대를 옮겨 꽃비가 내리는데 이를 수많은 사람이 목격하는 식이다. 영화의 대미를 장식해야 할 클라이맥스의 몽타주는 임금의 행차를 맞아 금강산의 일만이천 봉이 부처의 석상으로 차례로 화하는 거로 처음부터 정했고, 이후 나머지 이적 현상의 사이즈를 조정해 나갔다. 그리고 친근감을 더하고자 정이품송, 세조의 목숨을 구원한 고양이, 문수보살이 피부병을 낫게 해준 야사 등을 중간중간 배치했다. 사실적이고 딱딱한 역사와 소프트하고 재미있는 야사의 결합으로 전체적인 톤앤 매너를 살렸다.
스크린에 구현된 이적 현상 등을 비롯해 볼거리가 풍성하다. 음악과 미술을 비롯해 연출적으로 힘준 부분은. 자랑 좀 해달라. (웃음)
시그니처 샷은 실록을 재현한 세 개의 몽타주 장면으로 너무 희화화해 우스꽝스럽게 보이지 않는 게 목표였다. 꽃비가 내리고 부처가 현신한다는 게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될 수 있겠지만, 당시 백성들은 실제로 믿을 수도 있지 않은가. 이적 현상 자체와 이를 접한 백성들의 모습은 진지하게 그리되 웃음이 없으면 안되니 이적을 연출하는 광대의 모습에서 뽑아내려 했다. 내가 머릿속에 그린 그림을 현실화하기 위해 특별히 아트 디렉터를 캐스팅했는데 그가 무대 연출 출신이었다. 덕분에 무대 디자인에 대한 아이디어와 지식이 넘쳤다. 연기, 꽃비, 불빛 등등 아날로그적인 면에도 강해 개연성 있게 표현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사극이라 좀 더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조심스럽다는 말에 담긴 의미가 충분히 짐작된다.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영화가 마주해야 할 까다로운 허들이 아닌가 한다.
팩션 사극이나 정통사극이나 혹은 시대극이나 역사적 사실이 등장할 수밖에 없다. 팩트와 상상의 영역이 따로 있지만, 만들다 보면 그 사실을 건드리게 되고 이를 관객이 알아채고 지적한다. 이건 당연히 필요한 일이고 올바른 방향이고 영화 발전에 긍정적으로 역할 할 것은 확실하다. 다만 조금 애정 어린 시선으로 봐주셨으며 하는 바람은 있다. 극영화에는 분명히 허구의 영역이 있고, 팩트에만 집중한다면 표현이 위축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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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이 다수라 한편으론 집중력이 다소 떨어지는 인상이다.
그런가. 전작에서 주인공만 11명이라 그들의 사연과 목소리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점이 아쉬웠었다. 인물들이 기능적으로 역할하고 사라지는 게 안타까웠는데, 이번엔 반으로 그 수가 줄었으니 생기와 영혼을 좀 더 불어넣자는 목적이 있었고 나름 노력했다.
영화의 주춧돌인 광대패의 리더 ‘덕호’(조진웅), ‘한명회’(손현주), ‘세조’(박희순) 캐스팅에 대해 좀 자세히 들려 달라.
‘덕호’를 연기한 조진웅은 타고난 광대다. 춤사위 등 광대의 몸놀림을 익힐 필요가 있었는데 그는 이미 체득돼 있었다. 평소 소신 발언을 거침없이 하는 모습이 극 중 ‘덕호’와 매우 닮았다. ‘한명회’는 손현주 배우가 한 번에 OK 해 주셔서 감사했다. 선배가 의외로 사극 영화가 처음인데 예전 말에 밟힌 트라우마 때문이었다고. 다행히 이번 기회에 극복하셨다더라. (웃음) 세조는 원래 얼굴이 많이 알려지지 않는 배우로 가려고 했었다. 그런데 분량이 적어도 박희순 선배께 한번 드려 보자 했고, 흔쾌히 수락하셨다. 이후 한명회와 덕호 간에 일대일 충돌, 즉 영화의 흐름이 두 축에서 세 축으로 여러 번 각색을 거쳤다. 덕분에 당시 권력층 이야기가 한층 풍성해진 느낌이다.
베테랑과 신인 배우의 조합이 훌륭해 보인다.
그렇지, 게다가 나의 요정 고창석 선배도 함께했다. 또 라이징 스타인 김슬기와 윤박, 김민석 등 모두 능력을 십분 발휘해줬다. 특히 김민석 배우는 극 중 막내에 날쌘돌이 역할이라 촬영장 안팎에서 밝고 명랑하게 행동했다. 파쿠르 액션 미션을 최대한 직접 소화하려는 의지를 보여줬고 말이다. 또 김슬기 배우의 경우 독실한 크리스천인데 현장에서 불교적인 분장을 시켜 미안했는데 대범하게 오케이 해줘 고맙다. 윤박 배우의 경우 실제로 매우 진지하다. 감정을 누르다가 한 번에 울분을 터트리는 역할이라 처음엔 좀 어려워했었고, 촬영이 없는 날도 나와서 캐릭터를 연구하곤 했다.
연기 관련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권력을 사로잡으려 권력자의 광기와 광대가 지닌 예술가로서의 광기, 두 에너지의 충돌이 중요했는데 배우들이 기대 이상으로 잘 표현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세조가 아들을 챙기는 모습이다. 희순 선배가 놀라웠던 게 자녀가 없는데도 아들 세자를 위하는 왕 세조의 부정을 너무 절절하게, 훌륭히 표현했다는 거다. 촬영하면서 소름이 돋을 정도였고, 손 선배와 박 선배 두 분이 리허설하는 것을 뒤에서 듣다가 심지어 혼자 울기조차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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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으로 웃음도 풍자도 순한 인상이다.
사실 공신들이 행한 일 중엔 정말 입에 담기도 힘든 악행이 많다. 이런 모습을 전시해 자극을 좇거나 그들에게 통쾌한 복수를 하려면 한바탕 피바람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 영화는 광대들이 주인공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복수는 기존 권력자들이 보인 것과 또 다른 모습일 거로 생각했다. 점차 후반부로 갈수록 무거워지는 이유다. 회맹 장면을 담은 클라이맥스를 좀 더 세게 가자는 의견도 있었는데 역사를 왜곡하지 않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세조와 공신들이 그토록 차지하려고 노력했던 책 ‘육신의 충’을 빼앗기는 거로 말이다.
또, <광대들> 자체가 코미디 영화가 아니다. 초중반 이적 현상을 연출하고 절대 권력자 ‘한명회’에게 나름 개기는 광대들의 모습에서 어느 정도 웃음이 생성되는데, 이 역시 웃음을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다. 다소 무겁고 어둡게 느껴질 수 있는 주제를 지닌 영화에 좀 더 편안하게 진입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소프트하게 출발한 거다. 한마디로 코어에 접근하기까지 나가떨어지지 않을 정도의 코믹함이라고 할까.
비슷한 맥락의 질문인데 두루두루 즐길 수 있는 반면, 선택과 집중이 애매한 인상도 있다. 염두에 둔 집중 공략층이 있다면.
어느 특정 층을 공략하기보다 여러 계층 다양한 연령대가 즐기는 것을 목표로 했다. 역사는 모두의 것 아닌가. 역사에 대한 지식이 얕은 어린 친구들은 어떻게 보면 판타지 같다고 느낄 수도 있고, 중년층과 노년층은 그들 나름대로 역사를 바라보는 기억과 해석이 있을 거다.
지금까지 각본(각색)과 연출을 병행했다. 각본가와 연출가, 각기 다른 매력이 있을 것 같다.
각본을 쓰는 건 연출을 하기 위해서다. 혼자 골방에 처박혀 써야 하는 아주 외롭고 고독한 작업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2012) 끝난 후 3년 정도 시나리오 작업에 몰두했는데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그런 기억이 공포로 다가온다. (웃음) 뼈를 깎아 썼는데 계속 외면 혹은 무시당하는 것 말이다. 그래서 누군가 재미있다고 말해주면, 그 말이 영화화된다는 보장도 아닌데도 단비처럼 반갑고 날아갈 것 같이 순간 기쁘다. 연출은 말했듯 모두가 모여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 그 자체로 좋다. 각 분야 전문가들이 모여 아웃풋을 내고 완성물을 도출할 때, 내가 쓴 대사를 배우의 입을 통해 확인하는 순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희열에 빠진다.
감독으로서 욕심나는 평가는 뭘까. (웃음)
지금까지 유사한 장르를 두 개 선보였다. 앞으로 전쟁 영화를 꼭 해보고 싶다. 올리버 스톤의 <플래툰>을 보고 감독의 꿈을 가지게 됐거든. 또 멜로도 공포도 하고 싶은데.. 결국 장르 불문하고 많이 만들고 싶다. 그러다 ‘어, 저런 장르도 잘하네?’ 이런 평을 듣는다면 매우 기쁘겠다.
차기작 소개를 부탁한다.
비행기 납치극인데 현재 각색 작업 중이다. 또 외국 영화 리메이크작인 판타지 멜로도 계약했다. 타임워프 소재 로맨스다.
마지막 질문! 최근 당신을 사로잡는 주제, 즉 최대 관심사는.
요즘 역사에 꽂혀 있다. 헤이그 특사로 파견됐던 이준 열사의 기록을 읽고 조사해 보니 현재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와 울림이 크더라.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지켜나가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과거 역사와 대화하다 보면 불현듯 떠오르는 것들이 있다. 그렇다 보니 동시대와 과거의 역사에 점점 관심이 커진다. <광대들> 이후 특히 더 그렇다.
2019년 8월 29일 목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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