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살이 빠진 것 같다.
그런가. 몸무게를 안 잰지 오래돼서 잘 모르겠다. 예전에는 아침에 일어나 저울에 올라가는 거로 하루를 시작할 때가 있었는데 이젠 언제 그랬는지 가물가물하다. 또 변화가 있다면 방에 큰 거울이 없어졌다는 것. 잘 안 보게 되더라.
<생일>을 촬영하면서 몸이 좀 안 좋았다고 들었다.
많이 아프다기보다 촬영 끝내고 집에 가서 제대로 못 잤었다. 자면서 끙끙 앓기도 하는 등 몸이 좀 아팠다. 촬영 끝난 후 운동하러 갔더니 혹시 아기 낳는 신을 촬영했냐고 묻더라. 근육이 많이 틀어져 있다면서 말이다. 감정적인 신을 찍으며 몸이 반응한 탓인 것 같다.
영화 출연을 몇 차례 고사했었다고 하던데, 이유는.
<밀양>(2007)의 '신애' 이후 아이 잃은 엄마 역은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다. 이번 <생일>의 '순남'(전도연) 이전에 자녀를 잃은 엄마 역할 제의가 있었으나 안 했거든. 그래서 두 번 고사한 거다. 게다가 세월호 참사를 다룬다는 점에서 소재에 대한 부담감도 상당했다. 영화를 보면 사람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알 텐데 보기 전까지는 어떤 정치·사회적 이슈화될 수 있고, 공격당할 수 있어 우려됐었다. 솔직히 촬영 끝낸 후 제작보고회 그리고 언론 시사까지 그 자리에 서는 게 참 힘들었다. 그런데 영화를 본 기자들 역시 조심스럽고 힘들었다고 말하더라. 나만 힘든 게 아니었구나 싶은 게 한편으론 안심됐다.
여러 부담과 우려에도 불구하고 참여했다.
시나리오가 마냥 아픈 이야기만을 하는 게 아니라 슬픔을 극복하고 앞으로 나갈 힘을 준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용기 낸 거지. 사실 지금도 여전히 부담이다. 끝난 이야기가 아니고 여전히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 관련 진실 규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일부에선 벌써 피로도를 언급한다. 혹시 <생일>로 인해 오해의 골을 더 깊게 만들 거나 혹은 새로운 오해를 낳을 수 있어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어렵고 조심스럽다. 질문받는 입장이지만 한편으론 물어보고 싶었다. 어떻게 봤는지 아주 궁금하다.
조심스럽게 접근했다는 게 명확하게 드러나더라. 작업하면서 많이 울었을 것 같은데...
시나리오 읽으면서 많이 울었다. 주변에서 모니터해준 지인들도 너무 어려운 이야기인데 감당할 수 있겠냐고 울면서 말리더라. 촬영 들어가서는 '순남'의 감정보다 앞서 나가 혼자 격해지지 않으려고 많이 조심했었다.
개인적으로 본질적으로 뜨거운 소재를 차분히 잘 다스렸다고 생각한다. 초반에 절제력을 발휘해 후반부 생일파티를 향해 감정을 차곡차곡 쌓아가는데, 그 점이 좋았다.
우리 이야기 자체가 배우에게도 관객에게도 뭔가를 강요하는 작품이 아니라 담담하게 보여줄 뿐이다. 누군가는 다큐멘터리 같다고 하기도 하는데, 나 역시 필요 이상 슬픔에 빠지는 것을 경계했었다. 카메라 앞에서 순간 느끼는 감정만큼만 연기하자고 다잡았다.
안산에서 자원봉사를 했던 이종언 감독의 실제 경험이 여실히 묻어났던데.. 경험을 바탕으로 한 점에서 감독을 향한 신뢰가 컸겠더라.
작품과 감독에 대한 신뢰는 시나리오 받은 순간부터 이미 가지고 있었다. 이종언 감독은 개인적으로 잘 아는 동생이다. <밀양> (2007) 촬영 때 스크립터로 참여했었고, 당시 '언니'와 '종언아'로 부르는 사이였다. 시나리오 완성한 후 '언니와 함께하고 싶다'면서 보여주더라. 촬영장에서는 감독님으로서 존중을 보이고 싶어 꼭 '감독님'이라고 불렀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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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에서 특히 마음에 든 부분이 있다면.
영화 볼 때 등장인물 중 누구의 감정을 따라가는지에 따라 느낌이 달라질 수 있다. 내 경우 시나리오 읽으면서 '정일'(설경구)의 감정을 좇아갔었다. 그의 시선과 심리를 따라 아내 '순남'(전도연)과 딸 '예솔'(김보민)을 지켜봤다. 특히 죄책감에 앞으로 나설 수 없고 뒤에서 눈물을 삼켜야 하는 아버지 '정일'의 뒷모습이 개인적으로 크게 다가오더라.
후반부 생일파티와 더불어 가장 인상에 남았던 건 아들 '수호'(윤찬영)의 침대 위에서 오열하는 '순남'의 모습이었다. 정말 절규가 스크린을 뚫고 나오는 것 같았다.
시나리오에 '아파트가 떠내려가게 운다'고 아주 정확하게 써있었다. 느끼는 것만큼만 연기하자고 했지만, 카메라가 들어오기 직전까지 무서웠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그 장면은 '순남'의 슬픔이 이웃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주기에 의미 있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세월호 유족 당사자뿐만 아니라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는 많은 이웃이 있지 않나. 이 감독이 그런 여러 모습을 담고 싶었다고 생각한다.
그 장면에서 늦은 시간인데도 옆집 '우찬 엄마'(김수진)가 와서 오열하는 '순남'을 다독이며 위로해준다. 이종언 감독의 마음이 투영된 모습이 아닌가 한다.
촬영 중이고 연기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가 와서 안아주는데 너무너무 서럽더라. 그 장면의 시작이 나였다면 마무리는 함께했다고 볼 수 있다. 중간에 여러 배우로부터 감정적인 도움을 많이 받았다.
'순남'은 아들을 잃은 슬픔에 딸 '예솔'(김보민)을 소홀히 대했다가 미안해하고, 자신의 그런 모습에 속상해하는 참 슬픈 엄마이다. 극 중 '예솔'과 비슷한 또래의 딸을 둔 거로 알고 있는데 감정 이입이 많이 됐겠더라.
그렇잖아도 <생일>을 딸과 함께 보려고 한다. <신과함께> 를 비롯해 주로 한국 영화를 같이 많이 보는 편이다. 촬영 들어가기 전에 아들 '수호'로 인해 슬펐었는데 막상 촬영하면서는 딸 '예솔'이 때문에 마음이 아팠다.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에서 미안하고 여러 가지 감정이 들더라. 개인적으로 '순남'이 영혼 없이 떠도는 유령 같은 느낌이었는데, 그녀가 순간순간 정신을 차릴 때 딸 '예솔'이가 옆에 있다고 해야 할까. 딸에게 느끼는 미안함과 아픔을 촬영하면서 지속적으로 가져갔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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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생일 파티 장면 30여 분을 롱테이크로 촬영했다고 하던데.. 그게 가능한 일인가 보다! (웃음)
지금까지 많은 촬영을 했지만, 30분 롱테이크 촬영은 처음이라 새로운 경험이었다. 카메라 3대가 돌아가며 이틀 동안 촬영했는데, 연기가 아니라 마치 실제 생일 파티에 초대돼 앉아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슬퍼하고 슬픔을 나누고 서로 다독이는 손길에 몸을 맡기고, 그곳에 앉아 있는 모든 이가 주인공이 되어 진심으로 각자가 지닌 사연을 나눴다고 생각한다. 사실 생일 파티 장면 촬영이 너무 아프고 힘들 것 같아 엄두가 안 났었다. 그런데 막상 들어가 보니 서로 휴지를 쥐여주고 다독이면서 훈훈하게 촬영할 수 있었다. 몹시 더운 날씨라 체력적으로 쉽지 않고 정말 많이 울어서 지치기도 했지만, 그 자리에 모인 배우들끼리 서로 감사하며 마무리했던 것 같다. 정말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되는구나 싶었다.
그 장면에서 '순남'이 가장 편한 모습으로 밝은 웃음을 보인다.
그녀가 줄곧 생일 모임을 거부한 건 아들을 떠나보내기 싫은 엄마의 마음이었을 거다. 아들이 없는 생일을 지낸다는 건 공식적으로 그의 죽음을 확인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계속 거부했지만, 결국 모임에 나가서 같은 처지인 유가족에게 힘과 위로를 받았을 거다.
'순남'은 슬픔 등 감정을 표출하기보다 안으로 침잠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실제 당신은 어떤 편인가.
음, 나는 표출하는 성향이다. 물론 일부 삭히는 것도 있지만, 위로받고 싶을 땐 적극적으로 요청하는 편이다. '나 이렇게 슬프니 같이 나눠줘' 이렇게 말이다. 세상이 끝날 것만 같고 이 세상에 나 혼자만 있는 것 같다고 느꼈을 때, 주변에 도움과 위로를 요청한 후 받아 힘든 시간을 넘겼던 경험이 꽤 있다. 지나고 보니 그렇게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일은 아니었더라. (웃음)
설경구 배우와 오랜만에 부부로 호흡을 맞췄다.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2000) 이후 18년 만이더라. 18년이라는 게 정말 긴 세월인데 너무 아무렇지도 않아서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어릴 때부터 봐서 그런지 마치 친정 오빠 같은 느낌? 그런 편안함이 있다. 가뜩이나 감정적으로 힘든 영화인데 의지가 되는 상대와 함께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오빠는 나이가 들면서 남성다운 섹시함을 갖추고 더 멋있어지는 것 같다. 물론 내가 이런 얘길 한다면 완전히 쑥스러워하면서 아마 날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할 거다. (웃음)
<생일>은 당신에게 어떤 작품으로 남을 것 같은가.
지금까지 했던 영화와 다르게 아직 진행 중인 이야기이고 외면하고 싶은 것을 용기 내 맞선 결과물이다. 슬프고 아프고 상처받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위로받고 하루하루 감사함을 느낀다. 사는 힘을 준 작품이다.
여담인데, 자연스러운 연기를 위해 시술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클로즈업되는 일이 많은 여배우로서 쉽지 않은 결정이다.
화면을 통하면 주름이나 잡티 등이 실제보다 도드라지는데 신경이 안 쓰인다면 거짓말일 거다. 당연히 어떻게 비칠지 신경이 많이 쓰인다. 보완을 위해 시술이나 성형 등을 할 것인지 그냥 갈 것인지는 선택의 문제인 것 같다. 시술할 경우 다른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생긴다. 지금으로선 자연스러운 변화를 잘 받아들이고 싶다고 생각한다.
또 여담인데..(웃음) 배우를 안 했으면 어떤 일을 했을 것 같나.
어릴때는 아이를 좋아해서 아이 낳고 현모양처 되는 게 꿈이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뭘 해도 잘했을 것 같다! (웃음) 성격이 대충 넘어가는 게 없고 집요할 정도로 파고들거든. 결혼 초기에 남편이 머리를 자르고 왔는데 스타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거다. 그래서 내가 다듬어 줬는데 이후 남편이 가위 등 헤어 손질 도구를 사주며 당신은 정말 뭘 해도 성공했을 거라고 하더라. 요즘 아이가 크면서 엄마로서 부족함이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 내 성질을 못 이겨서 화냈다가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딸 아이가 엄마는 왜 밤마다 미안하다고 말하냐고 물은 적도 있다. 엄마로서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하지만 그게 아이가 바라는 모습이 아닐 수도 있으니 반성하곤 한다. 아이가 성장하듯 나 역시 엄마로서 성장하려고 노력 중이다.
차기작 소개를 부탁한다. 또 앞으로 하고 싶은 장르가 있다면.
김용훈 감독의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촬영을 끝냈고, 개봉을 앞두고 있다. 드라마든 영화든 다작은 아니더라도 좋은 작품이 있으면 얼마든지 하고 싶다. 지금 내가 좀 애매한 포지션이 아닌가 한다. 감정적으로 힘든 것 말고 코미디, 특히 블랙 코미디를 하고 싶다.
요즘 행복한 일이 있다면.
딱히 아무 일도 없는 게 소소한 행복이다. 나이가 드니 '너무 행복해'라는 이런 감정보다 별일 없이 건강하게 잘 지내면 행복한 것 같다. 그냥 오늘만 같기를 바란다.
2019년 4월 15일 월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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