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꽃 기자]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 그는 전 세계 영상 콘텐츠 산업의 지형을 뒤바꿔 놓은 넷플릭스를 만났다. 창작자의 표현 방식에 아무런 제약을 가하지 않는 작업 방식이 등장한 순간 그는 기다렸다는 듯 <킹덤>을 세상에 공개했다. 일단 쓰기 시작하고, 엉망이더라도 끝을 맺고, 다시 그다음 작품을 써내라는 그의 조언은 어떻게 변화할지 모르는 앞날을 위해 작가 자신만의 자산을 쌓아 두라는 말처럼 들린다. 그러다 보면, 결국은 그 작품을 세상에 내보일 수 있다고 말이다.
지난달 말 <킹덤> 시즌1이 공개된 후 1편부터 6편까지 순식간에 시청했다는 평가가 많다. 반면 본격적인 사건이 일어날 법하니 끝나버렸다는 의견도 있는데.
아무래도 내가 <싸인> 같은 16부작 드라마의 흐름에 익숙해져 있는 것 같다. <킹덤>의 시즌1은 한국 드라마로 보면 16부 중 3부 정도 온 셈이다.
넷플릭스 콘텐츠는 편당 상영 시간이 한국 드라마보다 짧은 편이다.
우리나라 드라마 상영 시간은 7~80분에 달한다. 반면 넷플릭스는 이용자의 ‘정주행’(기자 주: 하나의 드라마를 첫 편부터 마지막 편까지 쭉 이어서 보는 것)을 고려해서 보다 짧은 분량을 선호한다. 본래는 8부작 정도를 생각했는데 변화한 제작 환경과 넷플릭스 콘텐츠라는 특성을 모두 고려해 12부로 결정했다.
<싸인> <쓰리 데이즈>(2014) <시그널> 등 수사극에서 실력을 발휘하다가 좀비물에 도전했다. 게다가 첫 사극이다. 장르물에 일가견이 있는 당신에게도 꽤 낯선 조합일 것이다.
조지 로메로 감독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이나 대니 보일 감독의 <28일 후…>(2002), 잭 스나이더 감독의 <새벽의 저주>(2004)와 에드가 라이트 감독의 <새벽의 황당한 저주>(2004)까지 죽어도 죽지 않는 존재들을 그린 작품을 워낙 좋아했다. 그러다 보니 좀비는 물론 뱀파이어도 좋아하는 편이다. 가장 힘들었던 건 첫 사극이라는 점이다.
현대극은 자료 조사를 통해 일종의 공간감이 생긴다. 실존하는 빌딩 같은 것들을 조사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사극은 그 배경이 벌판이거나 다리 위인 경우가 많다. 당대에 어울리는 특색 있는 공간을 찾고 싶어도 내가 조선인이 아닌지라…(웃음) 너무 힘들었다. 수사극에 지친 나머지 CCTV와 휴대폰이 없는 시대로 가고 싶었던 건데 막상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하려니 차를 등장시킬 수 없다는 점도 고생스럽더라. 말을 타고 가다 보면 좀비가 덮쳐버리는 순간 상황이 종결되지 않나.(웃음)
산과 들을 풍경 삼은 궁궐과 고택이 등장하는 등 한국적인 풍경이 다수 담겼다. 칼 쓴 죄수 좀비가 출연하는 등 독특한 시퀀스도 인상적이다.
한옥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그 해 여름>(2006)이라는 영화 작업 이후 한옥의 아름다운 구조와 공간을 알리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칼 쓴 좀비가 등장한 장면은 감독님의 아이디어였다. 너무 재미있지 않았나.
넷플릭스의 반응은 어땠는가. 첫 한국 오리지널 시리즈인 데다가 한국적 색채에 서양의 크리쳐 좀비를 결합했으니 그들의 기대감도 컸으리라고 본다.
1, 2, 3부 시나리오를 완성할 때마다 화상 회의를 통해 내용을 공유했다. 넷플릭스는 주로 좀비의 특성이나 생사초의 역할에 대해서 궁금해했다. 앞으로 역병은 어떻게 변화하고 세자는 어떤 인물로 진화하는지 같은 미래의 상황도 알고 싶어 했다. 다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Wow’ 같은…(웃음) 할리우드식 액션은 없었다. 무언가를 바꿨으면 좋겠다는 의견 역시 전혀 없었고 심지어 재미가 있다, 없다 정도의 말도 없어서 내가 먼저 물어봤을 정도다.
넷플릭스는 창작자의 자유를 최대한 존중한다고 들었다.
넷플릭스 스탭들이 한국말을 못 해서 이렇게 간섭을 안 하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문화권이 다른 여러 나라 이용자가 <킹덤>을 보게 되는 만큼 고민스러운 지점이 여럿 있었는데 그런 건 전혀 신경 쓰지 말고 집필하라더라. 소원을 성취했다.(웃음)
<창궐>이 기획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사람은 결국 비슷비슷한 생각을 한다는 걸 느꼈다. 다만 그 작품은 액션 위주라고 본다. <킹덤>은 인물의 감정에 집중하려고 했다. 극 중 역병은 지배계층의 탐욕과 민초의 배고픔이 만나 시작된다. 그 근원을 보여주려고 했다. 동시에 늘 배고픈 내 이웃이 역병에 걸렸을 때 느껴질 법한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다.
민중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 지배계층의 이야기가 담겼다는 의미겠다.
역사라는 게 왜 이렇게도 변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지… 임진왜란 때는 왕이 양반과 함께 피난을 가버렸고, 6.25 때는 이승만 대통령이 다리를 끊고 도망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리를 지킨 사람도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극 중에서 세자 ‘이창’(주지훈)이 그런 인물이다. 살아남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해야 할 만큼 나약한 인물이었지만 일련의 사건을 거쳐 결국 정치는 무엇이고 백성은 어떤 존재인지 알아 나간다.
사회 구조를 드러내고 메시지를 던지는 건 당신 작품의 특징이기도 하다.
본능적으로 이야기가 그렇게 써진다. 언젠가 그런 말을 들었다. 나이 40이 넘으면 더는 세상이 왜 이러느냐고 남들에게 불만을 토로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이미 내가 그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내 나이가 50을 바라보는 이 시점에는 약간의 죄책감을 느낀다. 그래서 글에 사회적 메시지를 담는 편이다. 물론 그런 메시지가 없다고 해서 결코 나쁜 글은 아니지만 말이다.
주지훈, 배두나, 류승룡 등 주연 배우만큼 ‘영신’역을 맡은 김성규의 활약이 도드라진다. 조총을 능숙하게 다루는 강인한 민초다. 이 인물을 창조한 이유도 당신의 그런 생각과 맞닿아 있을 듯싶다.
부조리를 일삼는 기득권에 맞설 힘 있는 민초가 한 명쯤은 있었으면 했다. ‘영신’은 글을 쓰면서 제일 멋있는 역할이라고 생각했던 인물이다. 김성규 배우가 그 역할을 너무 잘 연기해줘서 뿌듯하다.
이야기 설정에 관한 몇 가지 궁금증이 있다. ‘이창’은 한양에서 지금의 경상도인 동래로 향한다. 지역적 배경을 설정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주인공 ‘이창’이 땅끝에서 다시 한양으로 올라가야만 하는 힘든 여정을 거리감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북쪽 땅은 내가 잘 몰라서 쓸 수가 없었고, 제주는 바다를 건너간다는 설정이라 불가능했다. 그렇게 이야기의 시작점이 경상 땅이 됐다.
정작 배우들이 경상도 사투리는 쓰지 않는다.
<킹덤>은 전란 때문에 떠도는 민초가 워낙 많은 시절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지율헌 의녀 ‘서비’(배두나)는 애초에 동래 출신도 아니다. 등장인물이 사투리를 쓰게 하려면 각자의 출신 지역 특성을 반영한 자세한 표현을 구사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표준어로 통일하는 게 가장 깔끔할 것 같았다.
조선 시대가 배경이지만 시점을 특정하지는 않았는데.
특정 연대를 말하면 개연성이 떨어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조선은 조선왕조실록이 존재할 정도로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시대다. 차라리 시대 미상이 더 흥미로울 것 같았다.
시즌2에 대한 기대감도 큰 상황이다. 이야기의 진척은 물론이고 감독이 바뀐다는 점도 새롭다.
시즌1 촬영이 지난해 5월쯤 끝났고 올해 1월 25일 공개됐다. 시즌2 대본은 이미 다 썼으니 2월 초쯤 촬영을 시작해 6월쯤 끝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때는 ‘영신’의 정체가 드러날 것이다. 앞서 뿌린 떡밥을 차곡차곡 회수할 예정이다. 다만 넷플릭스가 자체 기술팀을 따로 두고 있을 정도로 후반 작업에 공을 많이 들이는 편이라 정확한 공개 시점은 아직 모르겠다.
시즌3, 시즌4에 대한 계획도 있는지.
돈만 주신다면...(웃음) 그때는 이야기들이 좀 더 뻗어 나갈 것이다. 동남아시아까지 공간을 확장한다면 더 재미있을 것이다.
지금껏 작가로서 큰 성과를 내왔다. 같은 길을 걷는 후배 세대에게 힘이 될만한 이야기를 해준다면.
음… 엉망이더라도 일단 이야기의 끝을 내야 한다. 하나를 다 썼으면 다시 그다음 걸 써야 한다. 스스로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하는 친구들이 있는데 정작 단막극 하나도 끝까지 쓰지 못하기도 한다. 뭔가를 써내서 어떤 영상물의 청사진을 제시하고자 하는 열정만 있다면, 그리고 거기에 어느 정도의 인성만 뒷받침된다면 결국에는 성공할 수 있다고 본다.
앞으로의 작품 활동 계획은.
일단 <시그널 2>를 쓰기 시작했다. 물론 내가 쓴다고 해서 연출자와 배우가 합류해준다는 보장은 없는지라, 말 꺼내기가 조심스럽다. 아마 내가 잘 써낸다면 그들에게 보여줄 수는 있을 것이다. 이외에도 SF와 호러 장르에 관심이 있다. 로코 빼고는 다 해보고 싶다.
로맨틱 코미디는 왜 빼는지.(웃음)
사랑을 믿지 않으니까. 사랑이 있나요?(하하하) 농담 반이다. 로코 분야에는 이미 김은숙 같은 거성이 존재하지 않나. 나는 내가 더 잘할 수 있고 재미있어하는 걸 하고 싶다.
배우자인 장항준 감독에 관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는데…(웃음) 작가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조력을 잘해준다고 들었다.
장항준은 정작 <킹덤> 대본은 한 번도 안 봤다. 그냥 계속 술만 사줬다.(웃음) 아무래도 사수와 부사수 관계로 시작된 사이다 보니 일과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이다. 회의 때 이러이러한 점 때문에 답답했다고 하면, 그러라고 네가 그 돈을 받는 것 아니냐고 말해준다. 대본 쓰기 힘들다고 하면, 그래도 열심히 써야 한다고 답한다.(웃음) 여러모로 심리적인 안정에 도움이 되는 편이다. 장항준이 아니었으면 내가 과연 작가가 됐을까 싶은 생각도 한다.
마지막 질문이다. 최근 소소하게 행복한 일이 있다면.
2011년부터 꿈꿨던, 절대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던 좀비 사극을 현실화했다는 사실.(웃음)
사진 제공_넷플릭스
2019년 2월 8일 금요일 | 글_박꽃 기자(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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