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꽃 기자]
오랜 시간 동안 준비한 <인랑>을 드디어 관객에 공개한다.
앞서 기자와 스태프를 대상으로 한 시사가 있었지만 실제 내 목표 대상은 지금부터 영화를 보기 시작할 관객들이다. 그들의 반응이 나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고 또 용기를 줄 수도 있다. 심판을 받는 느낌이다.
영화적 배경을 ‘통일 직전’으로 바꿨다. 독일에게 통치당하는 1960년대 일본을 배경으로 한 원작 애니메이션은 이른바 ‘전공투 세대’였던 오시이 마모루가 경험한 시대적 정서가 녹아 있다.
4.19, 5.18, 6월 항쟁… 대체할 여러 역사적 시대가 있었지만 그 시절을 배경으로 하면 ‘스팀펑크’라는 장르 특유의 영화적인 느낌이 줄어들 것 같았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통일이라는 배경을 활용하면 적당한 현실감과 혼란을 안기는 동시에 원작에 묘사된 권력 기관의 암투나 스파이전까지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통일에 반대하는 테러집단 ‘섹트’와 그를 진압하려는 국가 권력 ‘특기대’, 그리고 극도의 혼란 상황에서 인간성을 상실하게 된 집단 ‘인랑’이 복잡하게 얽힌 초반 상황을 배우 정우성의 내레이션으로 풀어냈다.
극 중 ‘장진태’역의 정우성 목소리로 프롤로그를 전하고 바로 대규모 시위 장면으로 진입해도 내가 구상한 세계관을 확장하는 데는 무리가 없을 거로 생각했다. 비슷한 장르의 할리우드 영화도 빈 사막의 공간을 훑는 식으로 핵전쟁이 이미 발발했다는 걸 보여준다. 가까운 미래에 닥칠 불안을 다루는 SF 장르는 초반부 설명을 그 이상으로 세세하게 다루지는 않아도 된다. 일종의 장르적 클리셰다.
가까운 미래를 다룬 SF물은 ‘불안’이라는 감정을 근간으로 한다. <매드 맥스>(1979~205) 시리즈나 <공각기동대>(1995) 등도 그렇다. 그 면에서 <인랑>은 현실 정치의 변화 때문에 다소 김이 샌 측면도 있다. 이미 남북 화해 분위기가 조성됐지만 영화가 묘사한 혼돈에 가까운 ‘불안’과는 거리가 있다.
시나리오를 쓸 땐 이전 정부였다.(웃음) 통일이 공상과학물에나 나올 법한 요원한 일이었다. 영화를 다 찍고 편집을 하는데 남북 두 정상이 만나서 같이 산책을 하고 손을 잡더라. 김정은은 트럼프까지 만났다. 영화보다 더 영화적인 현실이 과연 영화에 어떻게 작용할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인랑>의 시대적 배경은 서로 다른 집단에 속한 주인공의 상태를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초반 설정이기 때문에, 영화를 계속 봐 나가면 관객이 (현실과 다른 극 중 상황에) 크게 좌우되지는 않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초반 설정을 지나 영화에 빠져들면 권력 암투와 스파이전, 강화복 액션, 그리고 로맨스까지 다채로운 볼거리에 빠져들 거로 판단했다는 의미겠다.
그렇다. 이쯤에서, 먼저 <인랑>을 왜 연출하게 됐는지를 말하고 싶다.
그간 많은 장르를 연출해봤지만 SF물은 도전해보지 않았다. 리메이크할만한 작품을 찾다가 만난 게 <인랑>이다. 이미 미국에 판권이 팔린 <공각기동대>와 필적할 만한 걸작이었다. 특히 ‘인랑’들이 강화복을 입고 액션을 펼치는 장면을 영화화하면 배트맨이나 아이언맨처럼 스펙터클한 액션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에 앞서 말한 세계관을 입힌 것일 테고.
그 세계관의 주된 플롯은 ‘집단과 개인’이었다. 멜로는 서브플롯으로 생각했는데, 사람들에게는 로맨스가 도드라져 보이는 것 같다.
차근차근 이야기해보자. 주된 주제의식으로 ‘집단과 개인’을 설정한 이유가 있을 텐데.
우리 시대는 개인의 취향을 존중하고, 각자 역시 자신의 개성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SNS에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게재하며 특정 계층에 속하고 싶은 욕망을 발현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행동으로 사실은 어느 집단, 혹은 어느 범주에 들어가고 싶어 한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이 진보, 보수, 여혐, 남혐 등의 이름으로 집단화되고 ‘블록화’된다. 자유주의자는 이 시대에 가장 쓸모없는 사람처럼 돼 버린 것 같다.
극 중 ‘임중경’(강동원) 캐릭터가 당신의 문제의식을 반영한다고 보면 되는가.
‘임중경’은 결국 자신이 속한 집단 ‘인랑’에서 빠져나와 개인으로 돌아가는 인물이다. 그런 면에서 <인랑>은 친구, 여자, 스승과의 관계를 거쳐 무언가를 자각하고 변화를 일으키며 성장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인 셈이다.
그런 주요한 맥락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어째서 ‘임중경’과 ‘이윤희’(한효주)의 멜로라인에 집중할까.(웃음)
그렇지 않아도 그런 평이 많다는 걸 알고 영화를 복기해봤다. ‘한상우’(김무열)는 너무 확실한 악인이라 관객이 이 인물에 대해 크게 고민하거나 질문할 필요가 없는 것 같다. ‘장진태’(정우성)는 영화를 마무리 단계에서 어떤 결론을 도출하도록 이끄는 인물인지라, 관객이 막바지에 순식간에 그에게 몰입할 수는 있어도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그에 대한) 큰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임중경’과 ‘이윤희’는 앞선 두 사람에 비해 명확하지 않은 감정을 나눈다. 입장과 속셈이 다른 상태로 서로를 속이면서도 함께 도망 다니며 동병상련을 느낀다.
야만의 시대에도 사랑이라는 게 존재할 수 있을까? 집단의 논리에 의해 어떤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일지라도, 분명 서로에게 움트는 감정에 동요돼 혼란스러울 수 있지 않을까?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사랑을 보여주고 싶었다. 누군가는 왜 이렇게 급속도로 두 사람이 이어지느냐고 질문할 수도 있겠지만, 힌트는 이미 충분할 정도로 많이 줬다고 본다. 예컨대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서로를 마주보며 이미 마음이 흔들린다는 걸 느꼈을 것이고, ‘임중경’을 만나러 가기 전 ‘이윤희’가 묶고 있던 머리를 풀거나, 남산 전망대에 선 두 사람이 어떤 눈빛을 교환할 때…
남산 전망대 시퀀스에서 두 사람이 끌어안고 함께 추락하는 장면에서는 당신이 관객에게 분명한 신호를 줬다고 본다.
한효주에게 분명한 디렉션을 준 장면이다. ‘이윤희’는 지금 불안한 상태지만, 상대의 얼굴을 보고 믿음을 가진 뒤 뛰어내려야 한다고 말이다. 한효주는 그걸 정확하게 연기해냈다. 그 장면은 두 사람이 한 몸이 된 것이라는 이미지를 상징하는 중요한 장면이다.
배우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보면 좋을 것 같다. <밀정>(2016) 때는 공유와 엄태구를 두고 모험적인 캐스팅이라고 평가했는데, 이번에도 그렇게 정의할 만한 배우가 있는가.
정우성 빼고는 다 처음 만난 배우다. 강동원은 군대에서 막 제대할 때 단편 <더 엑스>(2013)를 함께하긴 했지만 너무 짧은 시간이라 서로를 알아갈 시간이 부족했다. 그러니 주연 배우는 물론이고 최민호, 한예리, 김무열까지 대체적으로 캐스팅 자체가 전부 모험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간 송강호와 이병헌을 번갈아 가며 작업을 해왔지 않은가.
작품에 어울리는 배우를 골라내는 기준은.
배우의 새로운 매력을 끌어내는 걸 굉장히 좋아한다. 예컨대 아주 오래전 김혜수와 어떤 작품으로 미팅을 한 적이 있다. 결론적으로 영화를 함께 하지는 않았지만, 당시만 해도 ‘건강미인’으로 불리던 그에게서, 그날따라 매우 우울하고 창백한 느낌을 받았다. 자신도 모르는 그늘이 있더라. 물론 모든 사람이 그렇겠지만 말이다. 그 뒤에 <쓰리>(2002)의 ‘메모리즈’라는 에피소드에서 자기가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정처 없이 방황하는 여자 역에 김혜수를 끌어왔다.
그 외에도…
<장화, 홍련>(2003)의 계모 역할을 연기한 염정아도 그렇다. 그 작품 전에는 염정아가 그토록 표독스럽고, 기괴한 느낌을 보여준 적이 없다. 사석에서도 워낙 밝고 소탈한 편이니까. 그런데 함께 만나서 대화를 나누던 중 깔깔대고 웃던 그가 돌연 “잠깐, 무슨 소리 안 들려요?” 라는데, 요즘 말로 하면 정말 ‘갑분싸’였다.(웃음) 순간적으로 지독하게 예민한 듯한 느낌을 보여주더라. 자기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은 색깔을 계모 캐릭터에 입히면 독특한 느낌이 나오겠다 싶었다.
한효주는 대체로 멜로, 로맨스물에 출연해 안정감 있는 연기를 해왔다. 저런 배우에게 어두운 역할을 주고 연기를 ‘재미있게’ 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싶었다. 또, 김무열은 상당히 남자다운 면모가 있는 한편 비릿하고 비열한 이미지가 있는 배우다. 아주 이상한 섹시함, 그 점이 신선하게 다가올 것이다. 최민호는 연기를 잘한다기보다는 ‘열심히’ 한다는 느낌을 받은 배우인데, 그건 굉장히 중요한 덕목이라고 본다. 아이돌이라는 특수한 환경 때문에 관객이 품은 선입견이 있는데 그 난관을 열심히 돌파해 나가려는 게 참 기특하더라. 현장에서도 ‘저를 흔들어서라도 뭐가 좀 나오게 해주세요’ 하는 자세였기 때문에 내 에너지를 전달하는 게 편했다.
연출 방식의 변화 면에서는 어떤가. 원하는 신이 나올 때까지 밀어붙이던 과거와 달리 할리우드에서의 경험 이후, 특히 <밀정>부터는 비효율적인 연출 방식을 버리고 필요한 장면이 나오면 선뜻 오케이 사인을 낸다고 했다. <인랑>을 거쳐 이 방식에 온전히 적응했는가.(웃음)
촬영 환경이 바뀌지 않았는가. 과거 한국 영화판에는 뭔가를 만들어보겠다는 광기에 가까운 투지와 에너지가 있었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만들 때만 해도 그 작품에 참여한 모든 배우와 스태프가 그야말로 미쳐 있었다. 한국에서 서부극이라는 걸 만들어보겠다는 로망이 가득했다. 그런데 지금은 누구에게도 그런 종류의 에너지를 요구할 수 없다. 하려고 들지도 않을 거다. 그게 올바르지 않은 작업 방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아무튼 ‘놈놈놈’같은 영화는 다시는 만들 수 없을 거다. 그 작품에 참여한 사람들끼리, 혹은 감독들끼리 그렇게 말하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한 세대’와 계속해서 작업을 해야 한다.(웃음)
계속해서 신세대 스태프를 만나고 있다. 그래서 점점 더 일하는 게 어렵게 느껴지는 측면도 있지만, 변화에 맞춰야 한다. 내가 경험해온 관행대로 “나 땐 이랬어”라고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데뷔 (<조용한 가족, 1998) 이후 10년 만에 ‘놈놈놈’을 만들었고, 다시 10년만에 <인랑>을 만들었다. 우연이긴 하지만 10년 주기로 엄청나게 에너지를 소비하는 작품을 만난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부터 10년 뒤엔 무엇을 하고 있을까 기대가 된다. 혹시 영화를 찍다가 죽는 건 아닐까.(웃음)
노동 시간을 엄수하는 쪽으로 촬영 현장이 변화하고 있는 건 바람직한 일이지만, 촬영장의 ‘분위기’ 면에서는 아쉬움도 있을 것 같다.
촬영 현장에서 과거만큼 (끈끈한) 관계가 형성되지는 않는다. 요즘은 무엇이든 표준 계약서에 쓴 대로 하자고 하니까.(웃음) 물론 그것이 결코 틀렸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과거와 다른 방식을 준수하면서도 어떻게 (과거만큼 투지 넘치는)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새로운 패러다임을 생각할 때인 것 같다.
마지막 질문이다. 요즘 소소하게 행복한 순간이 있다면.
과거에는 혈기가 넘쳤고, 나를 입증할 수 있는 성취 덕분에 행복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보다 아침에 커피를 내리는 시간이 더 중요하고 소중하다.(웃음)
2018년 7월 27일 금요일 | 글_박꽃 기자(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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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_워너브러더스 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