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영화 <흥부>는 고전 ‘흥부전’을 재해석한다. 극 중 작가인 ‘흥부’(정우)가 ‘조항리’(정진영)와 ‘조혁’ (김주혁)형제를 모델로 완성한 소설이 ‘흥부전’으로 정진영이 연기한 ‘조항리’가 바로 우리가 아는 욕심 많고 못된 ‘놀부’라고 보면 된다. 정진영은 단순히 못돼먹은 평면적인 악인보다는 좀 더 입체적으로 ‘놀부’를 바꾸고 싶었다. 그래서 권력을 위해 자기 형제를 버릴 만큼 비정하고 권모술수에 능하며 타고난 천박함을 지닌 욕망 덩어리, 그렇게 자신만의 놀부, ‘조항리’를 완성했다. 최근 작은 영화에 연달아 참여한 그의 행보의 연장선인 셈이다. 어느 정도 인생의 숙제를 완수한 지금, 중견 배우의 끝자락에서 정진영은 좀 느슨해지고 자유로워지기로 했다. 극 중 인물이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 따지기보다는 스스로 설득력 있게 만들며 도전하고 싶었다. 타성에 젖어, 관성으로 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故 김주혁의 유작이다.
관객도 그렇겠지만, 촬영할 당시와는 또 다른 마음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주혁이에 대해 얘기하는 게 조심스럽다. 고인에게 누가 되지 않을지 걱정되고 한편으론 마케팅의 일환으로 보이지 않을까 우려된다. 그럼에도 그의 이야길 안 하는 것도 힘들다. 극 중 ‘조혁’(김주혁)의 입을 통해 나오는 굵직한 대사들이 영화가 담은 메시지를 그 어떤 방법보다 잘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흥부> 이전에도 그와 함께한 적이 있었는지.
<흥부>가 처음이었다. 이번엔 어떻게 하다 보니 처음 작업한 배우들이 대부분이었다.
어려운 질문일 수 있겠는데, 잠시 지켜본 ‘그’(김주혁)는 어떤 인물이던가.
음, 우리가 가지는 느낌 그대로였다. 선하고, 유하고, 연기 잘하는 배우 말이다. 사실 촬영 당시는 바빠서 이야기를 많이 못 나눴었다. 사고 나기 며칠 전 포스터 촬영 차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었다. 앞으로 좋은 친구처럼 지낼 수 있겠구나 싶었는데 사고 소식을 들으니 얼마나 황망하던지....
<흥부>의 어떤 점에 끌렸는지.
처음 시나리오 받고 출연 결정까지 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당시 다른 작품에 참여하고 있기도 했고.
고민한 이유는.
‘조항리’(정진영)를 어떤 플랜으로 연기해야 할지 고민했다. 평면적인 악역은 재미없겠더라. 우리 영화가 고전을 모티브로 하고 그 속에는 형제애를 중심으로 당시의 시대상이 녹아있다. 그래서 ‘조항리’ 캐릭터를 어떻게 살리는가가 관건이었다.(기자 주: <흥부>에서 ‘조항리’는 소설 속 ‘놀부’의 모델이 되는 인물임) 그는 고위관료로 영리하고 교묘하지만, 욕망 앞에서는 무릎 꿇는 천박함을 지닌 인물이다. 단순히 재물만 탐하는 욕심꾸러기로 표현하는 건 너무 밋밋하겠다 싶어 감독님께 캐릭터 방향에 대해 건의했더니 흔쾌히 OK 하셨다.
그렇지 않아도 ‘조항리’라는 인물의 레퍼런스를 제시? 했다고 들었다!
아, 그건.... 극 중 ‘조항리’가 용의주도하고 교활하고 천박하지 않나. 이런 인물이 누구일지 생각하다 보니 떠오른 인물이 있었다. 그래서 대본에 나 혼자 ‘조항리는 누구...’ 라고 쓰고 참고한 거다. 그들의 실제 행동과 말투를 모사한 것은 아니다! 어쨌든 상상력을 발휘하며 재미있게 촬영할 수 있었다. 책을 던진다든지, 그가 ‘발발발’ 뛰쳐나온다든지 등등 말이다. 사실 좀 더 오바하여 행동하기도 했는데 일부는 편집됐더라. (웃음)
<흥부>도 그렇지만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작품들이 요즈음 꽤 있었다.
난, <흥부>가 정치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고전 ‘흥부전’에서 모티브를 얻은 또 다른 흥부전인데 그게 묘미다. 힘없는 백성이 권력자에 맞서는 이야기는 인류가 몇천 년 전부터 계속해 온 보편적 이야기요 희망이 아닐까. 다만, 요즘 사회 분위기가 변하다 보니 더 크게 다가가는 듯하다. 극 중 백성들이 모이는 ‘광화문 현판 장면’도 촛불 집회를 묘사한 것 아니냐는 의견이 있는데 그건 아니다. 당시 도성 앞이 광화문인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아무래도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후반부 연희 장면일 것이다. 초반의 해학적인 면이 다소 사라지고 분위기가 무거워진다.
시나리오상보다 좀 더 묵직해졌다. 아마 주혁이가 떠나면서 톤을 가볍게 가기 힘들어진 이유일 거다. 그래서 약간 톤의 변화가 있었다. 사실 영화는 촬영 당시보다 편집에서 완성되는 면이 있다.
‘조항리’의 권력을 탐하는 발악에 가까운 모습을 보면서, <왕의 남자>(2005)에서 광기에 찼던 ‘연산’(정진영)이 저절로 떠오르더라.
어, 그런 말을 많이 하시는데...‘연산’이 내면에 깊은 상처를 지닌 한편으론 연민이 느껴지는 인물이라면 이번 ‘놀부’, 그러니까 ‘조항리’는 동정의 여지조차 없는 그냥 나쁜 놈일 뿐이다.
‘조항리’가 욕심이 아무리 많다 하나 그래도 형제인데, 동생 ‘조혁’(김주혁)에 대한 형제애를 발휘하지 않을까 했는데.... 또, 놀부다운 행동에 치중하다 보니 그의 심리 묘사는 다소 약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연기하면서 아쉬운 점은 없었는지.
걔(조항리)는 그냥 미워 보여야 하는 인물이다. 영화를 잘 보면 아마 ‘조혁’에게 얘기할 때 상황에 따라 말투가 조금씩 다를 거다. 그런 식으로 디테일하게 변화를 주려 했다. 그리고 형제 이야기가 자세하지 않아도 모티브인 ‘흥부전’이 있기에 충분히 설명됐다고 본다. 훗, ‘조항리’의 성격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을 이야기해줄까?
어떤 장면인가.
극 중 동생(조혁)에게 엽전을 던져 주는 장면이 있다. 엽전 두 뭉치 중 하나만 던지는 게 ‘조항리’다. 처음에는 두 뭉치 모두 주려고 가져왔지만, 순간 아깝다는 생각이 들고 머리를 굴려 한 뭉치만 주는 거지. 그런 인물이다.
좀 전에 처음 작업한 배우들이 많았다고 했는데 현장 분위기가 서먹? 했었을 거 같기도 하다.
오, 그렇지 않다. 편안하고 재미있었다. 필요한 경우엔 내가 농담이라도 던져 분위기를 풀어주기도 했다. 이제 내가 그럴 나이다.(웃음) 극 중 ‘조항리’가 종종종, 발발발 버선발로 뛰어나가는 장면 등등의 우스운 장면이 많아서 함께 빵 터지곤 했다. 기본적으로 경쾌한 톤을 지녔는데, 아까 잠깐 말했듯 주혁의 죽음과 맞물리다 보니 톤이 묵직해진 거지.
<평양성>(2010) 이후 본격적인 사극은 오랜만이다. 사극과 현대극의 차이점이 있다면.
배경이 달라지는 거지 장르가 구분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 <흥부>의 경우 현대말도 많이 사용하고 정통 사극은 아니기에 현대극과 크게 다른 건 없었다. 극 중 ‘조항리’도 상대에 따라 말투가 달라진다. 왕과 대비에겐 연극적인 톤으로 정말 충신인 척 정중하고 보통 때는 아주 경박하게 말이다. 그런 면에서 <평양성>도 마찬가지지만 <흥부>도 정통 사극은 아닌 거지. 어떤 톤으로 갈지는 작품마다 다르고 사극이라고 다 같지는 않다.
평소 작품에 참여할 때 중시하는 부분은.
보통은 캐릭터가 가장 중요하고 이후 전반적인 시나리오의 완성도를 보는 것 같다. 사실 그때그때 다르다. 어떤 때는 친분이 중요하게 작용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작품 안에서 나의 명확한 롤이 없다면 아무리 친분이 깊어도 하지 않는다. 그 경우에는 명확히 입장을 밝히고 양해를 구하는 편이다. 단, 특별 출연의 경우를 제외하고 말이다.
개봉을 앞둔 작품이 많은 거로 알고 있다. 소개한다면.
홍상수 감독, 장률 감독과 작은 영화를 몇 편 했고 아마 올해 개봉할 거 같다. 홍상수 감독과는 <풀잎들>, <클레어의 카메라> 두 편을 연달아서 했다. 사실 홍 감독의 영화는 촬영 기간이 짧기 때문에 시간만 맞으면 할 수 있다. 몇 번 안 찍는다. (웃음) 장률 감독과 함께 한 <거위를 노래하다>(가제)는 준비 기간이 꽤 길었다.
부쩍 규모가 작은 작품을 많이 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음, 예전에 연극할 때, 이후 영화 쪽으로 옮겨와 한 작품도 그다지 대중적인 작품이 아니었다. 영화 <약속>(1998)에 참여하면서 대중적 작업을 하게 됐고 그 안에서 20년을 살아왔다. 지금 작은 영화를 한다는 게 다시 내가 원래 하고 싶은 것으로 돌아가는 것 혹은 내 취향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한다.
떠나온 예전 무대에 대한 그리움일까?(웃음)
그렇진 않다! 그렇게 표현하면 ‘지금 애인’이 싫어한다! (기자 주: ‘지금 애인’이란 상업 영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오해하지 마시길) 굳이 표현하자면 이제는 아이들도 장성했고 어느 정도 책임을 다했다고 할까. 중년 배우의 끝자락에서 초심으로 돌아보고 싶은 거지. 쉰 살이 넘으면 하고 싶은 일을 해보고 싶었다.
가장으로서의 의무에서 일부 벗어났다고 봐도 되겠다.
그렇지. 이제 내 빈 부분을 채워야 하는데 타성에 젖어 연기하고 싶진 않았다. 나 스스로 동력을 얻기 위해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싶었던 거다. 연기 톤을 포함해서 변화를 느끼고 싶었고 그러면서 좀 더 편해졌다. 작은 영화나 자본이 많이 투입된 상업 영화나 노력과 시간을 들이는 건 마찬가지라 규모가 작다고 더 쉬운 건 절대 아니다. 다만, 예전에는 스스로 꽉 조여 매고 있었다면 이제는 좀 느슨함도 느끼고 싶달까. 이번 ‘조항리’역할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예전 같으면 이 인물이 말이 되는지, 설득력 있는지를 따졌겠지만, 이제는 아, 그러면 내가 말이 되게 해볼까 이렇게 바뀐 거다. <대장 김창수>도 같은 마음으로 함께 했었다. 관성으로 살고 싶지 않다.
평소 영감 혹은 자극을 어디에서 얻는지 궁금하다.
여러 가지가 있다. 자극은 누가 주는 게 아니라 내가 받는 것 아닌가. 그렇기에 내가 외부를 향해 안테나를 열어 놓으면 된다. 그렇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영화나 연극, 그림을 봐도 예술적으로 자극을 받을지언정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세상 돌아가는 거 자체가 자극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항상 마음을 열어 놓으려고 한다.
개인적으로 <흥부>가 한바탕 흥겨운 마당놀이 같다고 느꼈다. 작품의 매력을 꼽는다면.
감독님한테 영화가 에너지 덩어리면 좋겠다고 얘기했었다. 논리에 따라 움직이기보다는 인물들의 힘끼리 부딪치면서 끌고 가는 영화 말이다. 연희 장면이 곳곳에 있기에 마당극 같이 느끼는 게 맞다. 그렇게 신명 나는 게 원래 의도였다. 예전 설 명절에 마당놀이 공연했듯이 설을 겨냥해서 제작과 개봉을 맞춘 거다. 어르신들과 어린아이들이 다 같이 손잡고 볼 수 있는 가족 영화가 됐으면 싶었다. 다만, 아까 얘기했듯 여건상 분위기가 다운됐을 뿐이다.
설 명절을 겨냥한 경쟁작들도 만만치 않다. 흥행에 대해 기대는.
명절 시즌이 워낙 큰 시장이니 여러 영화가 붙을 수밖에 없다. 각각의 영화가 나름대로 지지받지 않을까 한다. 흥행 여부는 그 누구도 모른다. 그리고 흥행을 기대하고 일하면 안 되는 게, 우리가 흔히 배신당한다고 말하는데, 배우로서 흥행을 기대하면 배신당하더라.(웃음) 중요한 건 내가 현장에서 즐겁게 연기했냐는 거다. 동료들과 스탭들과 함께 했던 시간 자체가 소중해야 한다. 흥행만 바라보고 작업했는데 흥행이 안 되면 어쩔 건데? 내 인생인 걸, 내가 다스려야지!
<흥부> 엔딩에서 후속편을 강하게 예고하고 있다.
<흥부>의 각본을 쓴 백미경 작가가 지금 쓰고 있는 거로 알고 있다. 일단 나는 안 나오니....(웃음). 백미경 작가(드라마 <품위있는 그녀>, <힘쎈 여자 도봉순> 등 집필)가 드라마에서 명성이 자자한데 정말 흥미롭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 같더라. 그녀도 이번 작업이 너무 재미있었고, 특히 협업에 만족했다고 전해 들었다.
개인적으로 당신은 맡은 역할에 참 잘 녹아드는 배우라고 생각한다. 연기 노하우가 있다면.
아이고, 그렇게 봐주셔서 감사하다. 그런데 특별한 비결은 없다. 연기는 늘 어렵고 앞으로도 쉬어질 리 없을 것 같다. 만약 쉬어진다면 그만둬야 하지 않을까. 내가 일부러 겸양을 떠는 게 아니라 스스로 뛰어난 배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다만 열심히 하는 건 맞다. 나이 들면서 분량이 적어지는 건 너무나 당연하고 계속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이 고맙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젊은 시절 못 했었는데 이제 나이 먹었기에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으니 그 또한 감사한 일이다. 주름살이 늘어날 때 맡을 수 있는 역도 늘어난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연기한 캐릭터 중 특별히 애착 가는 역할을 꼽는다면.
뭐하나 더 사랑스럽고 덜 사랑스럽진 않다. 그 역할을 연기하는 순간 열심히 하고 집중하는 거지. 단지 열심히 했음에도 잘 안 알려진 작품들은 안쓰러움이 든다.
앞으로 도전하고 싶은 캐릭터가 있다면.
글쎄, 배우라는 게 내가 역할을 정하고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캐스팅이 들어오면 그때 고민하고 결정하는 거라서. 음, 아무래도 나이를 먹으면서 깊은 역을 하고 싶긴 하다.
중년의 쓸쓸한 로맨스 어떤가?
오, 그건 기자님이 제작하는 거로! 요즘 너무 선호하지 않는 장르라, 하하하(웃음)
요즘 제작되는 영화가 너무 일정 장르에 편향돼있긴 하다. (웃음)
영화라는 게 제작비가 원체 많이 들지 않나. 투자자나 제작자 입장에서는 큰돈이 들어가는 비즈니스인데 관객 선호도를 반영한 결과라고 본다. 그건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다만 큰 영화를 중심으로 영화 시장이 돌아가는 건 그다지 건강하지 않은 것이고 문화 생태계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닐까. ‘영비법’(영화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이 개정되면 좀 보완되지 않을까 기대 중이다. 물론 제도가 개정된다고 모든 게 해결되지 않겠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시스템 개선은 중요하니 말이다. 난 좀 낙관적인 게 그때그때 굴곡이 있을지언정 장기적으로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믿는 편이다.
최근 인상적이거나 행복했던 일이 있다면.
밝힐 순 없지만 꿈이 있다. 그게 날 기쁘고 생동감 있게 만든다. ‘꿈’이라는 게 부귀영화나 명예, 성공 이런 것만이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데 오늘 할 일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 꿈이라고 생각한다. 내 오늘의 리스트를 작성할 수 있는 거 말이다. 그런 꿈을 모두가 가졌으면 좋겠다. <흥부>가 좋았던 게 시대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꿈을 꾸는 사람들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극 중 ‘조항리’가 얼마나 나쁜 사람인가! “꿈을 꾸는 것 자체가 죄”라고 했으니....
2018년 2월 25일 일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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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이종훈 실장(Ultra Stud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