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 박은영 기자]
<사랑 따윈 필요 없어>(2008) 이후 오랜만에 단독 주연으로 문근영이 돌아왔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인 <유리정원>에서 결핍과 욕망, 용서와 광기 등 다층적 모습을 지닌 과학도 ‘재연’으로 말이다. 문근영은 극 중 ‘재연’에게 안식의 장소인 ‘유리정원’이 자신에게는 바로 신수원 감독이라고 말한다. 나무가 햇빛을 받고 무럭무럭 자라듯 감독님의 믿음 아래, ‘재연’의 상처와 아픔에 고민하고 공감하며 마침내 치유에 이르기까지, 마음껏 연기를 펼쳐서 너무 즐거웠다고 미소 짓는다.
기분이 좋아 보인다.
그런가, 날씨가 좋아서.
<사랑 따윈 필요 없어> (2008) 이후, 오랜만에 주연으로 관객을 찾는다. 걱정 반 기대 반이겠다.
딱 지금 마음이 그렇다.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행히 좋게 얘기해주셔서 좀 안심이 된다.
우문을 하자면 작품에 대한 평가와 흥행 성적, 어떤 것을 우선시 하는지.
작품에 대한 평가도 중요하고 상업 영화이기에 당연히 흥행을 무시할 수 없다. 그렇지만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음....내 연기에 대한 평가다.
극 중에서 다리를 저는 역할인데, 고생스럽진 않았나.
뭘, 눈이 안 보이는 역도 했는데!(<사랑 따윈 필요 없어>) 특별히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배우라면 당연한 거 아닌가.
<유리정원>을 보면서 한강 작가의 소설 ‘채식주의자’가 문뜩 떠오르더라. <유리정원>의 어떤 면에 끌렸나.
책을 사다만 놓고 아직 읽지 못했는데 이번 기회에 꼭 읽어 봐야겠다. 신수원 감독님과 함께 작업하고 싶었고, 딱 어떤 면이라고 설명하긴 힘들지만, 작품도 당연히 마음에 들었다. 영화가 공개되고, 많은 분이 여러 지점에 다양한 의미를 두고 얘기하고 질문하시더라.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을 새롭게 알게 됐다.
극 중 ‘재연’(문근영 분)을 소개한다면.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결핍이 많은, 결핍을 안고 사는 사람이다. 스스로가 상처받을 걸 알면서도 마음을 주고, 상처를 받고 아파하지만 결국 다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사람.
결핍이라, 스스로 생각하는 결핍이 있다면.
연기를 항상 잘하고 싶은 거? 잘해야 하고 잘 하려고 노력하는 거. 고민을 많이 했고 많은 시도를 해봤다.
시도에 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한다면.
그게 내가 어떤 캐릭터를 선택했다는 의미도 있지만 나만의 시도라고 할까. 그러니까 표는 안 나더라도 나 혼자 대사 톤을 바꿔보고 감정 표현을 이것저것 해 보는 편이다. 결핍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노력하는 만큼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런 경우 처음에는 좀 억울? 하기도 한데 이내 ‘아직은 내가 부족하구나, 좀 더 노력해야지’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와중에는 내 노력과는 별개인 부분도 분명히 있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아직 그런 면에서 자유롭지 못한 거 같다.
노력하는 만큼 돌아오지 않는다는 건 관객 혹은 시청자들의 반응을 의미하는 건가.
나는 최선을 다했으니 인정해주겠지 생각했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내 생각만큼 공감을 못 받는 경우가 있다. 연기에 있어서도 최소 욕은 먹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칭찬을 받는 것도 아닌 애매한 상황이라 할까. 그럴 때 섭섭한 감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거 같다.
노력과 별개인 부분도 있다고 했다. 혹시 아역 출신에 동안 이미지가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는지.
딱 그 부분이다. 일부러 어려 보이려 하는 것도 아니고, 한편으론 성숙해 보이려 노력한다. 그런데 그렇게 안 보고 혹은 보고 싶지 않아서 현재의 내 모습에 어색해하고 이질감을 느끼시는 거 같다.
<사도>(2015)에서 혜경궁 홍씨로 늙은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는데! (웃음)
그러게. (웃음) 나중에 완성된 작품을 보니 외할머니 모습이 보여 한편으론 반갑더라. 내가 늙으면 우리 할머니 같겠구나 싶어 개인적으론 좋았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아무리 봐도 어색한데 주변에선 괜찮다고 하셔서....문근영을 모르는 사람을 대상으로 모니터닝했더니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고 하면서 말이다.
지금까지 결핍에 관해 이야기했는데, 배우로서의 욕심 혹은 목표는.
연기를 잘 하고 싶고, 연기 잘하는 배우라는 호칭을 듣고 싶다.
어떤 캐릭터로 호평받던 배우가 다른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소위 ‘발연기’ 라고 악평을 받기도 한다. 연기를 ‘잘 하는 것’에 대해 집착은 아닐까.
일부 인정한다. 전에는 배우라면 모든 역을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이를 먹으면서 ‘나’라는 인간이 점점 완성돼 가는데, 내가 모든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모든 역을 잘 하려 한다는 건 욕심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내가 잘 할 수 있는 역 혹은 나만 잘 할 수 있는 걸 찾아야겠다로 생각이 변하는 중이다
그래서 당신이 찾은 역할은 무엇인가
진행형이다. 뭔가 나만의 것을 찾고 있는데 아직 자신 있게 나만의 것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게 없다. 내가 보는 나와 남이 보는 나가 다를 수 있기에 쉽지 않은 일이다.
극 중 ‘재연’은 자신의 연구와 떠난 사랑에 대해 집착을 보인다. 광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유사한 집착의 경험이 있는지.
감정적 집착은 아닌데 있긴 하다. 예를 들면 먼지에 그렇다. 평소 그다지 깨끗한 편도 아닌데 먼지가 보이면 빨리 없애려 한다. 눈으로 보고 있기 힘들다.
일적인 면에서는 어떤가.
내가 못 하는 부분에 집착하는 거 같다. 내가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점인데, 주변인들이 말하길 내가 특히 못하는 점, 아쉬운 점,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을 찾으려 노력? 한다고 하더라. 가령, 촬영하고 모니터링할 때 다른 사람은 보통 ‘괜찮네’ 이렇게 지나가는 것도, 난 ‘이상한데’ 이렇게 바라본다고 할까.
그렇다면 항상 긴장하고 예민한 상태가 지속될 거 같은데.
그럴 거 같은데 항상 그렇진 않다. 준비하는 과정에서 신경을 많이 쓰긴 하지만 막상 촬영 들어가면 마음을 내려놓고 몰두하는 편이다. ‘지금 모든 준비가 완벽하게 다 됐어, 이게 최선이야’ 이렇게 스스로 암시하곤 한다. 그렇기에 더욱 준비를 철저하게 하려는 거 같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재연’은 고독력, 즉 고독을 견뎌내는 힘이 있는 단단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아주 정적인 인물이다. 실제 성격은 어떤가.
고독력이라, 그런 면에서 본다면 나와 어느 정도는 비슷하다. 혼자 있는 걸 즐기고 정적인 점이 말이다. 물론 ‘재연’과 이유는 다르지만 힘든 일이 있으면 혼자서 추스르고 가라앉히고 치유하는 편이다.
작품을 하지 않을 때는 어떻게 지내나.
작품이 끝난 직후는 혼자서 작품에 관해 되짚으며 시간을 보내는 거 같다. 그 후에는 그동안 못 만났던 친구나 지인들 만나고, 또 뭘 배우기도 한다. 특별한 건 없다.
뭘 배우는지 궁금하다.(웃음)
그때그때 다르다. 몸을 쓰는 걸 좋아해서 운동을 배우기도 하고, 또, 연기 수업 같은 것도 듣는다. 혼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완전히 객관적일 수 없으니까 함께 고민해주는 사람이 있는 게 도움이 된다.
작품 결정 시 기준이 있다면.
그 역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당연히 고려하지만, 그보다는 스스로 즐길 수 있을까가 중요하다. 또, 내가 아직 잘 하는 게 뭔지 모르기에 새로운 역할이나 캐릭터를 접할 때 ‘잘 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기대하고 도전하는 편이다.
지금까지 가장 ‘도전적’인 캐릭터를 꼽는다면.
하고 싶고 재미있을 거 같아 선택했기에 항상 모든 작품이 모험이라고 생각한다.(웃음) 지나고 보니 나는 모험을 참 좋아하는 사람인 거 같다. 딱 하나를 꼽기 어렵다.
워낙 일찍 연기를 시작했기에 연기 경력이 거의 20년 가까이다. 그동안 배우로서의 목표 혹은 지향점에 변화가 있을 듯도 한데.
항상 배우이고 싶다. 그건 어릴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힘들 적도 있었고, 연기를 그만두고 싶던 적도 있다. 그럴 때면 자문하곤 한다. ‘왜 힘든데?’ 라고 물으면 ‘연기를 재미있게 하고 싶고 정말 잘 하고 싶어!’ 이렇게 대답하는 내가 있다. 그럼 난, 또 묻는다. ‘정말 최선을 다한 거 맞아?’라고. 이렇듯 물음에 물음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정도 결론에 이른다. 지금은 잘 하고 싶다기 보다는 즐겁게 하고 싶다 쪽으로 마음이 더 기운다.
이번 <유리정원> 은 충분히 즐겼나.(웃음) 어두운 캐릭터라 감정적으로 힘들었을 거 같은데.
아주 즐거웠다. 어떤 캐릭터라도 내가 아닌 타인을 연기하는 거라서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때문에 밝은 캐릭터든 어두운 캐릭터든 비슷한 고민이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 친구 때문에 고민하고, 그녀의 아픔을 공유하는 거 자체가 즐거움이다. 캐릭터를 고민하고 같이 아파하고 풀어내는 과정에서 ‘나’라는 사람, ‘나’라는 배우에 집중하게 된다. 그렇기에 진심으로 재미있고 좋은 시간이었다.
신수원 감독과 많은 얘길 나누었다고.
감독님께서 나를 엄청 믿어주셨다. 그게 정말 큰 힘이 됐던 게 맹목적인 믿음이 아닌 의미 있는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재연’에게 유리정원이 그녀를 안전하게 보호해주고 안락하게 쉴 수 있는 장소인 것처럼, 나는 신수원 감독님이라는 유리정원 안에서 마음껏 연기를 펼친 거 같다.
특별히 마음에 드는 장면은.
엔딩 바로 직전에 ‘재연’이 숲으로 가는 장면이다. 극 중에서 아주 중요한 장면이라 나를 비롯한 스태프들이 모두 긴장했었는데 생각보다 촬영은 힘들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래도 감정 소모가 많은 장면이라 그런지 촬영 후 계속 먹먹하더라. 내가 캐릭터와 동화됐기에, 사실 그런 기회가 많지 않은데, 그 친구 때문에 실제 마음이 아프더라.
“당신 손은 따뜻하네요.”라는 ‘재연’의 대사가 인상적이었다. 중간중간 이질감이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 한마디로 슬프고 아름다운 영화로 마무리되더라. ‘재연’은 나무와 참 많이 닮았다고 생각됐다.
아, 그 대사를 기억하다니! 나도 진심으로 공감한다.(웃음)
극 중 ‘재연’은 연구 성과를 동료에게 빼앗긴다. 배우들의 세계 역시 치열하지 않나.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이 있다면.
할머니와 엄마가 어릴 때부터 해주신 말씀과 정서적 가르침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거 같다. 사소하게 하나하나 짚을 수는 없지만, 지금 생각나는 건 ‘니덕 내탓’ 혹은 ‘빈손으로 태어났으니 너무 욕심내지 말고 하는 만큼만 가져라’ 등이다. 또, ‘억울하다면 네가 노력해서 증명하라’ 도 있다. 그런 가르침이 자라면서 내 식대로 해석하고 체화된 듯하다. 솔직히 남을 미워하고 질투하는 게 싫다. 그러다 보니 비겁한지도 모르겠지만 경쟁하는 게 싫고 오히려 지는 게 마음 편하기도 하다. 하지만 나 스스로에게는 부끄럽지 말자고 다짐하고 욕심내기도 한다. 요즘에는 ‘문근영’의 삶을 다양하게 채우려 한다. 내가 다양하게 생각하고 오감으로 느껴야 좋은 연기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하기 때문이다.
최근 행복했던 일이 있다면.
얼마 전에 엄마와 동생 그리고 강아지까지 함께 펜션에 놀러 갔었다. 애견 동반이 가능한 펜션이라 그런지 아주 숲 속 깊숙이 있는 데다 마침 손님이 우리밖에 없어 수영장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었다. 밤에 수영장에서 엄마와 동생이랑 별을 보면서 맥주 한 캔 하는데 내가 좋아하는 게 한자리에 모여 있다는 사실에 너무 행복해서 갑자기 눈물이 나는 거다! 덩달아 엄마와 동생도 눈물 찔끔했다.
2017년 10월 29일 일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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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_올 댓 시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