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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하면 찍으세요. 기다리면 지쳐요. <유리정원> 신수원 감독
2017년 10월 31일 화요일 | 박꽃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박꽃 기자]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최초’ 여성 감독 타이틀을 거머쥔 사람, <유리정원>의 신수원 감독이다. 2002년 데뷔해 3편의 단편, 6편의 장편 영화를 만드는 동안 칸영화제, 베를린국제영화제가 그와 그의 작품을 공식 초청했다. 일단 만들기만 하면 국내외 영화계의 주목을 받은, 손쉽게 말하면 ‘걱정 없는’ 감독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운과 기회의 가혹함은 누구에게나 공평해서, 그 역시 몇 년간 준비하던 영화 촬영이 여러 차례 무산된 좌절을 경험했다. 장편 데뷔 후에 왜 다시 단편을 찍냐는 누군가의 속 모르는 소리에 자존심 상하고, 풀리지 않는 일에 불쑥 자기 혐오마저 치밀어 오르는 순간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무엇이든 찍는 쪽이 낫다고 믿었다. 좋은 운과 적절한 기회를 기다리다가 지쳐버리는 것보다는 그게 나았다.

<유리정원>으로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에 선정되는 영예를 누렸다. 여성 감독 중에서는 역대 처음이다. 축하한다.
아무래도 영화를 알릴 기회가 되더라. 개막작이다 보니 기자회견, 인터뷰, 오픈 토크, GV까지 행사도 많았다.

영화제 후로 쭉 쉬지 못했겠다.
극장 개봉까지 연이어서 하게 됐으니 좀 그렇다.(웃음)

부산 기자회견 당시 ‘영화에 4대강 장면이 나온다’는 말로 주목받았다.
(하하하) 기사가 많이 나올 걸 미리 알고 말 한 거다. 오늘은 (영화 홍보팀에서) 정치 얘기는 하지 말라고 했다.(웃음)
곤란했나보다.(웃음) 그렇다면 영화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유리정원>은 ‘재연’(문근영)의 이야기일 줄로만 알았는데 막상 내용물을 열어보니 ‘지훈’(김태훈)의 분량도 비등하더라.
처음에는 ‘재연’을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아무래도 내가 여자이다 보니 자꾸 여자 중심의 이야기가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머릿속으로 1부는 ‘재연’ 2부는 ‘지훈’의 이야기로 나누고 결말에 이르면 완전한 판타지로 만들어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 모두 주인공이다.

관객 입장에서는 의외의 주인공 ‘지훈’에게 시선이 갈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재연’의 삶을 훔쳐보는 방식이 범죄의 경계에 걸쳐 있는 듯한 아슬아슬한 느낌이었다.
누가 그러던데? ‘한남’이라고.(하하하)

(하하하)
누군가를 훔쳐보는 건 범죄 행위다. 현실에서 그런 행동을 벌이는 남자라면 ‘한남’ 맞다. 하지만 영화 안에선 그런 걸 모두 ‘쌩까고’ 가고 싶었다.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이창>(1954)역시 누군가를 훔쳐보는 한 남자의 이야기 아닌가. 관객이 ‘지훈’의 심정에 동화되기만 한다면 그를 범죄자로 보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훈’의 심정, 그러니까 ‘재연’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을 부각하기 위해 의도한 연출 지점이 있을 것 같다.
눈치챘는지 모르겠지만 ‘지훈’이 숲에서 (다리를 저는) ‘재연’을 따라갈 때 그의 보폭에 맞춰 걷는다. 그렇기 때문에 ‘재연’ 역시 그가 따라오게 놔두는 것이다.

다리를 저는 ‘재연’의 신체적 특징 또한 영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다.
‘재연’은 아빠가 오래된 나무의 기둥을 자르는 바람에 자신에게 저주가 내려진 것이라고 말한다. 믿거나 말거나(웃음) 신화적인 은유를 끌어들이고 싶었다. 우리나라는 나무로 장승을 세우고 모시기도 하지 않나. 시나리오를 쓸 당시 장애를 갖고 있던 지인에게 안 좋은 소식이 들려왔던 것도 영향을 미쳤다. 정서적으로 (장애라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재연’의 직업은 가설과 검증을 가장 중요시하는 과학도다. 신화적인 은유와는 약간 배치되는 설정이라 더 신비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 ‘재연’의 원래 직업은 간호사였다. <마돈나>(2014)에서 간호사 역할을 이미 그렸기 때문에 과학도로 바꿨다.(웃음)

앞선 부산국제영화제 서울 기자회견 당시 전작 <마돈나>보다 <유리정원>이 관객에게 힐링이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마돈나> 는 완전한 바닥에 놓인 상태에서 지푸라기조차 잡을 수 없던 여자 ‘미나’의 이야기다. 어떤 사건 이후 사회에서 이탈하고 자존감이 바닥으로 치닫고, 어느 순간 자기 혐오까지 생긴다. ‘재연’은 그와는 좀 다르게 그리고 싶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는 의지 있는 인물이다.

문근영을 캐스팅한 건 꽤 좋은 선택이었다고 본다. 겉으로는 강해 보이지 않지만 내면에 단단한 무언가를 감추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첫 만남부터 자연스러운 차림새로 나타났다. 티셔츠에 청바지, 노메이크업으로 캡모자를 쓰고 왔다. 평소에 그렇게 다닌다고 하더라. <유리정원>으로 기존의 이미지를 확 바꾸고 싶어한다는 걸 느꼈다. 노메이크업으로 촬영하자고 미리 말했는데 흔쾌히 동의하더라. 도시 촬영 땐 깔끔하게 머리를 자르고 연기했지만 숲에서는 산발 머리로 촬영했다. 본인이 먼저 ‘이런 머리 어떠냐’며 사진을 가져왔는데 분장 실장과 미리 준비한 스타일과 거의 비슷했다. 촬영 내내 이견이 거의 없었다.

‘재연’은 장애를 가진 전문직 여성이고, 외적 아름다움보다는 자기 신념을 지키는 데 훨씬 집중한다. 대중영화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여성 캐릭터는 아니다.
시나리오에 맞게 인물의 리얼리티를 살리고 싶었다. 집에서 자고 있는 사람이 화장하고 있으면 어색한 것처럼, 연구실에서 잠자고 생활할 만큼 연구에 빠진 과학도가 외모를 크게 의식한다면 어색하지 않겠나. 게다가 ‘재연’은 장애가 있기 때문에 입을 수 있는 옷도 한정돼 있다. 어떤 영화에서는 여성 배우가 캐릭터에 어울리지 않게 예쁘게만 나와서 몰입이 잘 안 되는 경우도 있다. 얼굴이 구분 안 될 때도 있고.(웃음) 나는 되도록이면 캐릭터가 진짜 살아있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도록 만들고 싶다.

그간 <순환선>(2012)과 장편 <마돈나>로 칸영화제, <명왕성>(2012)으로 베를린국제영화제에 공식 초청을 받았다. 당신의 영화를 호평하는 사람들은 어떤 지점에 매료됐을까.
아마 그런 분들은 ‘재연’처럼 마음이 허하고 외로운 사람들 아닐까 싶다.(웃음)
누구에게나 있는 마음 아닌가.(웃음) 그런 반면 당신 영화에서 유머를 찾아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즐거움과 웃음을 주는 작품에 대한 갈증은 없나.
<유리정원>이 즐거움을 주는 영화 아닌가?(하하하) 주변에서 코미디 작품을 만들어보자고 하는데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다. 보는 건 좋아한다. 언젠간 하겠지?

코미디 외에도 다양한 영화를 즐겨 보는 편인지.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가면 거의 보지 않는다. 하지만 한가할 땐 극장에서 재미있는 영화를 찾아본다. 최근에는 <덩케르크>를 봤다. 압도적이더라. 샘낼 수 없는 상대인데 샘이 났다.(웃음)

크리스토퍼 놀란을 시샘했군.(웃음)
당연하다. <덩케르크>에 엄청난 돈이 들어갔을 것 아닌가. 그게 제일 부럽다.

넉넉한 예산을 쓰면서 편안하게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인가.(웃음)
누구에게나 그런 마음은 있으리라고 본다. 시나리오를 쓸 때는 내 안의 무언가를 발산하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풀리지만 그걸 들고 투자사에 찾아갈 땐 스트레스다.(웃음)

제작비로 따져보면 <마돈나>를 비롯한 여러 전작보다는 <유리정원>이 훨씬 높았을 것이다.
판타지 장면을 표현하기 위해 CG와 미술이 동원돼야 했다. <마돈나> 제작비 수준으로는 절대 못 찍었을 것이다. 다행히도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예술영화 제작지원금을 받았다. 그때가 첫 회 지원이라 금액이 꽤 컸다. 나머지는 배급을 맡아준 리틀빅픽쳐스에서 투자해줬다.

그간 영화진흥위원회 공모에 지원해도 선정에 배제된다는 여러 감독의 증언이 있었다. 혹시 당신도 그런 경험이 있었나.
만약 블랙리스트에 내 이름이 올라있었다면 <유리정원>도 영화진흥위원회의 지원을 못 받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좀 이상한 건, 나 역시 세월호 관련 서명을 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블랙리스트에 명단에는 오르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1차 서명과 2차 서명이 있었는데 칸영화제에 참석하느라 그중 하나에 참여하지 못해서 그런 거였다. 정말 어이 없는 상황이었다.(웃음)

많은 영화인이 ‘만들려면 똑바로 만들던가’ 식의 우스갯소리를 한 이유 아니겠는가.(웃음) 다음 작품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 예정인가.
<유리정원>은 내게 모험 같은 작품이었다. 장르가 확고한 편도 아니고 엔딩은 완전한 판타지다. 너무 해보고 싶어서 하긴 했지만 다음번에는 어렵게 느껴지지 않는 잔잔한 드라마를 하고 싶다.

후배 영화감독, 특히 여성 영화감독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음… 무엇이든 찍어라.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 찍어라. 여성 감독뿐만 아니라 신인 감독에게도 그 말을 하고 싶다.
더 나은 기회를 기다리는 것보다 일단 찍어라?
기다리는 것도 물론 중요하다. 그런데 그러다가 지칠 수도 있다. 나 역시 장편 <레인보우>(2009)를 찍고 다시 단편을 찍었다. 왜 장편 데뷔를 해놓고 다시 단편을 찍냐는 말도 들었다. 하지만 그땐 상관없었다. 큰 작품을 하려면 정말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할 수도 있었다.

일단 작품을 내놓으면 필연적으로 평단과 관객의 피드백을 받게 된다.
내가 차린 밥상에서 이 반찬은 맛있고 저 반찬은 맛이 없다는 평가를 듣는 거다. 비판에 상처받더라도 감독은 그런 과정을 거쳐 성장한다.

당신에게도 큰 도움이 됐던 피드백이 있었을 텐데.
상업영화는 한 편을 준비하는 데 몇 년이 걸린다. 그렇게 준비한 영화가 계속 엎어질 때가 있었다. 허망하고 힘이 빠졌다. 자괴감이 너무 컸다. 그때 내 선생님이신 송길한 선생님(기자 주: 임권택 감독 <우상의 눈물>(1981) <불의 딸>(1983) 등 다수의 시나리오를 썼다)이 그러셨다. “넌 독한 년이야. 힘내라” 위안이 됐다. 그리고 <레인보우> 시사회장에 찾아와 주셨다.

오.
영화가 다 끝났는데 “신수원 장하다!” 하고 소리를 지르시더라. 얼마나 창피했는지…(웃음) 그런데 그게 울컥하더라.

말만 들어도 멋있는 스승님이다.
정말 멋있으시다. 건강하셨으면 좋겠다.
영화감독으로 사는 인생, 어떤가.
영화감독은 영화 완성부터 개봉까지 너무 많은 짐을 짊어져야 하는 압박감 큰 직업이다. 어떨 땐 떠나고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언젠가 영화를 찍고 싶은데도 못 찍게 되는 순간이 오면 어떻게 하나 싶은 생각도 든다. 힘들지만 좋다. 좋아하기 때문에 더이상 영화를 못 찍게 되는 순간이 올까 두렵다.

어떤 점이 그렇게 좋은지.
학교 다닐 때 16mm 필름 카메라로 10분짜리 코미디 영화를 찍었다. 제대로 못 만들어 창피했지만 아무튼 학교 극장에서 그 작품을 틀었다. 어두운 극장의 텅 빈 스크린에서 5, 4, 3, 2, 1 하고 영화가 시작할 때 그 설레는 마음.(웃음) 영화를 만드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싶었다. 어릴 때 화가가 되고 싶었는데 그 영향이 이어져 영화감독이 된 게 아닌가 생각한다.

요즘 가장 행복한 순간은.
집에 누워서 아무 생각 없이 창밖 예쁜 가을 하늘을 바라볼 때. 하늘 보려고 일찍 일어난 적도 있다.(웃음)


2017년 10월 31일 화요일 | 글_박꽃 기자(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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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박광희 실장(Ultra 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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