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꽃 기자]
당신을 인터뷰하기 위해 한 시간에 20개의 매체가 몰렸다. 소감이 어떤가.(웃음)
이런 식으로 인터뷰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정말 낯설다. 그런데 다들 노트북만 보고 정작 나는 안 보고있다.(하하하)
기자들도 낯선 상황이라.(웃음) 시간이 촉박하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 이번 영화 어떻게 평가하나.
어떻게 평가하느냐… (깊은 고민) 아, 어려운 질문이다. 또 심각해진다.(웃음)
어렵겠지만 솔직하고 편하게 대답해달라.
일단 객관적으로 보기는 어렵다. 현장 편집본을 보고 대충 어떤 작품이 되겠다 싶은 상상은 갔지만, 어쨌든 내 영화를 내가 평가하는 건 시간이 좀 지나야 가능하다.
얼만큼 지나야 할까.
요새는 한 3년 지나봐야 그 영화가 쓸만한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다. 그 정도 지나고 나서 보면 “아 이게 쓰레기구나!” 라든지 하는 판단이 가능하다.(하하하) <프리즌>도 그 정도 지난 다음에야 점수를 매겨볼 수 있을 것 같다.
좋다. <상의원>(2014)은 이제 3년이 지났다. 냉철하게 평가해달라.(웃음)
그 영화, 점수가 굉장히 짜다. 한 55점짜리 영화다. 많이 줘봐야 60점이 채 안 된다.
음. 차라리 가장 높은 점수를 준 작품을 물어보는 쪽이 낫겠다.(웃음)
내가 출연했던 작품 중에서? 그럼 <8월의 크리스마스>다. 그건 한 80점 정도 되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일 포스티노>(1994)라는 작품을 참 좋아하는데, 그 영화를 보면서 느낀 감정이 <8월의 크리스마스>를 찍을 때 표현되길 바랐다. 물론 내 평가가 별로 중요한 건 아니지만.(웃음)
내가 촬영한 영화 중에서는 거들떠도 보기 싫은 것도 있다. 평생 다시는 안 볼 것도 있다.(웃음)하지만 그런 영화를 통해서도 배운 게 있다. 점수를 매기는 것보다는 무언가를 배웠다는 사실이 훨씬 중요하다.
복귀작으로 <프리즌>을 선택한 이유는.
나현 감독과 좋은 인연이 있기에 출연을 결정했다. <상의원>을 촬영하기도 전인 2013년경에 나현 감독에게 작품을 제안받은 적이 있다. 결국 시나리오도 완성되지 못한 상태에서 1년 정도 준비만 하다가 무산됐는데, 그럼에도 굉장히 잘 헤어졌다. 서로의 상황을 충분히 배려하면서 말이다.
나현 감독은 <목포는 항구다>(2004) <우리 생에 최고의 순간>(2007) <남쪽으로 튀어>(2012) 등 주로 각본을 쓰던 분으로 안다.
그렇다. 혹시, 시나리오 작가의 설움을 아나? 대충 짐작 가지 않나?(웃음) 영화 개봉을 앞두고 관객을 찾아다니면서 무대인사를 할 때 시나리오 작가가 함께 나오는 것 본 적 있나? 없을 거다. 그런 설움과 아픔을 견디면서 10년 넘게 시나리오만 쓰다가 나와 함께 준비했던 작품이 무산되고, 이번에 드디어 데뷔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두 번째에도 다시 나에게 시나리오를 줬다는 게 참 기뻤다. 아마 따져보면, 나현 감독이 데뷔하는 데 한 4년 정도 걸렸을 거다.
나현 감독이 당신에게 강렬한 악역 ‘익호’를 제안한 이유가 무엇일까.
글쎄. 별 다른 이야기는 없더라.(웃음) 다만 ‘익호’라는 인물에 애정이 많다는 건 느꼈다. 서로 함께하던 작업이 무산되고 몇 년이 지났는데도 자신이 애정을 가진 캐릭터를 내게 권해줬으니 고마운 일이다. 물론 내입장에서는 본능적으로 만만치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째서인가.
사실 악역은 이 작품, 저 작품에서 몇 번 했었다. 그런데도 ‘익호’는 좀 자신이 없었다. 자신이 없었다는 건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의미가 아니라, 나에게 꼭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보일 수 있을지 걱정된다는 의미다. 예를 들면, 마치 내가 사투리 연기를 해야 하는 상황처럼 불편한 느낌이었다. 물론 사투리도 제대로 배우고 익히면 어느 정도 억양을 흉내 낼 수는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내가 원체 서울 토박이다 보니 그 말투를 자연스럽게 소화해 내기에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공포감이 있는 편이다. 그래서 실제로도 사투리 연기를 해본 적이 없다. ‘익호’가 내게 준 느낌이 그런 공포감과 비슷하다.
그럼에도 선택한 이유는.
에라 모르겠다 한 거지 뭐.(웃음) 안주하면 안 되니까. 늘 도전하는 게 내 일이니까. 그래서 해 본 거다.
대사라는 게, 중요한 듯하지만 반대로 하나도 중요하지 않을 때도 있다. 혹시 당신은 어떤 영화를 보고 기억에 남은 대사가 있나?
음. 있다.
물론 있지, 그런데 많지는 않지. 내 경우에는 그렇게 좋아하는 영화 <일 포스티노>도 막상 대사 하나가 생각이 안 난다. 특히 영화 대사는 드라마에 비하면 외울 분량조차 되지 않을 만큼 적은 편이다. 어떨 때는 리허설을 하면서 대사가 그냥 외워지는 경우도 있다. 가끔 연기자들끼리 모이였을 때,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대사라는 게 뭘까? 말은 왜 하는 걸까? 동물 울음소리나 사람이 떠드는 말이나 사실은 별반 다를 게 없는 것 아닌가? 결국은 뭔가를 잘 표현하기 위해 입을 움직이고 혀를 굴려서 소리를 내는 것 아닐까? 결국 대사의 양보다 그 대사를 왜 떠드는지가 중요한 거다. 적당한 대답이 됐는지 모르겠다. (웃음)
악역의 존재감을 효과적으로 부각할 수 있는 표현법을 고민했을 텐데.
인물을 표현하는 방법은 너무나 여러 가지다. (강렬한 분위기를 표현하기 위해서) 소리를 크게 질러보기도 했는데, 그러는 순간 바로 ‘아, 이건 아니네’ 싶더라. 요즘엔 그런 감이 좀 생겼다. 내가 한 연기지만 참 병신같다는 게 느껴질 때가 있다.(하하하) 다행히 연기자는 또 시도하고 또 시도해볼 수가 있다. 그래서 연극이 어려운 거다. 그건 라이브니까.(웃음)
소리는 지르지 않지만 ‘익호’에게는 분명 비범한 아우라가 느껴진다.(웃음)
어떤 인물의 인상은 3초 안에 결정된다고 본다. ‘저 사람은 저런 사람이구나…’ 라고 생각하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탁, 인식되는 이미지가 있다. ‘익호’를 표현할 때도 그 점을 생각했다. 관객이 그를 봤을 때, 어떻게 하면 어떤 생각이나 판단을 하기 전에 그저 악인이라는 이미지를 받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
어떤 방법을 찾아냈나.
다른 연기자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 경우에는 어떤 인물을 구현할 때 도움을 받는 여러 수단이 있다. 동물 다큐멘터리가 그중 하나다. 때마침 수컷 하이에나의 세계를 그린 다큐멘터리가 떠올랐다. 모계 사회를 유지하는 하이에나 세계에서 수컷은 아주 천덕꾸러기다. 여왕 하이에나는 자기 무리 속에 있는 수컷과는 짝짓기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컷 하이에나는 다른 무리를 기웃대게 되는데, 그쪽에서도 쫓겨나듯이 공격당한다. 그 모습이 내게 너무나 큰 충격으로 남아있다. 코는 다 찢기고, 눈알은 빠져서 덜렁덜렁하고, 입은 뜯겨져 나갔다. 그런데도 또 살아서 다른 무리를 찾아가더라. ‘익호’를 봤을 때 그 수컷 하이에나가 떠올랐다. 그에게 그런 이미지를 입혀보겠다고 발버둥친 것 같다.
아우라를 입히는 데는 성공했지만, ‘익호’가 왜 그 정도의 악인이 되었는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렇게 한 게 잘한 거라고 본다. ‘익호’의 과거를 다 담아내면 러닝타임이 너무 길어져 버린다. 게다가 보나 마나 잔인하고 폭력적인 장면이 포함될 텐데 그럴 바에는 차라리 아무것도 안 보여주는 쪽이 관객의 상상력을 끌어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익호’라는 인물은 도대체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기에 지금의 모습이 됐을까? 하고 말이다.
사랑이야말로 우리들의 영원한 주제 아니겠나.(웃음) 각자가 하는 사랑의 모양이 다 다르기 때문에 사랑 이야기는 아마 끝도 없이 나올 거다. 누군가는 사랑하기 때문에 기쁘고 설레지만, 누구는 눈물 흘리고 증오 하고 경멸도 하게 된다. 그런데 요즘 멜로물이 많이 줄어들었다. 그러면서 여성 배우가 설 무대도 좀 좁아진 것 같다. 흥행을 비롯해서 한 작품이 기획되고, 완성될 때까지 너무 많은 요인이 작용하기 때문인 것 같다. 내가 원한다고 무대가 마련되지는 않지만, 어쨌든 사랑 이야기보다 중요한 건 그 어떤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아휴, 근데 나 지금 뭘 이렇게까지 많이 떠드냐.(웃음)
당신이 어떤 시도를 할지 대중은 여전히 궁금해하는 듯하다.
꼭 해보고 싶은 게 하나 있다. 60분짜리 중편 시나리오 하나를 두고, 두 팀이 각자 영화를 만드는 거다. 연출자, 배우, 스탭도 다르고 서로 어떻게 작업하는지도 모른다. 오직 내용만 같다. 그렇게 완성된 60분짜리 영화의 A 버전과 B 버전을 함께 상영해보고 싶다. 같은 시나리오를 두고도 연출자, 배우, 스탭이 바뀌면 이렇게 다르게 해석된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있다. 그걸 보는 사람은 아마 ‘연기에는 답이 없구나’라는 걸 알 수 있지 않을까.
당신과 같은 역할을 맡을 배우가 있을까. 연기 대결을 펼쳐야 하는 데 부담스러울 것 같다.(웃음)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동료가 분명 있을 거다. 그리고 이건 대결이 아니다. 고흐가 더 잘 그려? 고갱이 더 잘 그려? 라고 질문할 수는 없지 않겠나.(웃음) 전에는 그런 질문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적도 있는데, 이제는 아니다. 연기는 누가누가 더 잘하는지를 따지는 게 아니다. 그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어떤 것을 보여주는 일이다. 종암동에서 태어나고 자란 서울 토박이 한석규가 그 인물에 접근하는 방법, 혹은 울릉도에서 유년기와 청년기를 다 보낸 배우가 그 인물에 접근하는 것은 다를 수밖에 없다. 배우는 각자 자기만의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다.
‘서울 토박이’라는 정체성을 상당히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그 점이 배우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쳐왔다고 보는지.
물론이다. 나는 서울 종암동, 그중에서도 우리 집, 그 중에서도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때가 1964년이다. 7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런 모든 배경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 놓았다고 생각한다. 이전에는 내 한계를 깨보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내 배경을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곤 했는데,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는 것 같다. 내가 타고난 것들을 더 완성하면 된다.
7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1974년도에 내가 초등학생이었다. 3학년 때까지는 남녀합반이었고, 4학년부터는 남녀를 갈라놓았다. 또 상당히 폭력적인 남자 선생님을 만났다. 어린이에게 그 정도 폭력을 행사하는 게 가능한 일인가? 싶을 정도로 상상할 수 없는 폭력을 휘두른 선생님이다. 이외에도 내가 체험한 당시의 현실이 있다. 지금 들으면 의아해하거나 웃고 넘기겠지만 당시에는 ‘남자다움’이라는 걸 강조하는 어떤 분위기가 있었다. 그런 시대를 살아오면서 누적된 나만의 경험과 가치관이 있을 것이다.
경험과 시간이 쌓일수록 연기에 담아낼 수 있는 것들도 많아질 것 같다.
그렇다. 한데 한동안은 내 연기가 꼴 보기 싫었던 적이 있다. 눈을 보고 있으면 좀 ‘멍 때리고’ 있다고 해야 하나? 아, 그때를 생각하니 한숨이 나네.(웃음)
20대, 30대 때는 추상적인 가치를 좇으며 연기를 했다. ‘새로운 한국영화’를 만들어보겠다는 식이었다. 그런데 2002년 초반쯤 몸을 크게 다치면서 슬럼프가 왔다. 몸 상태가 안 좋으니까 마음 상태도 따라서 안 좋아지더라. 내가 하는 연기가 다 가짜구나 싶었다.
가짜?
연기라는 것 자체가, 허무맹랑한 얘기를 마치 진짜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려고 발버둥 치는 일 같더라. 참 구차하게 느껴졌다. 나 스스로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믿음이 없으니 상대방의 액션을 받아치는 리액션은 더 안 되더라. 그쪽은 더 가짜같이 보이는데? 미치고 팔짝 뛰는 거지.(웃음)
괴로운 생각이다. 어떻게 극복했나.
내가 하고있는 가짜 놀음이 꽤 괜찮은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부터다.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 상황, 사건을 이야기하려 할 때 꼭 진짜(팩트)만 가지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그렇게 하면 이야기 자체가 너무나 복잡하고 어려워져서 관객이 쉽게 알아듣지 못할 때도 있다. 가짜를 통해서 진짜 존재하는 이야기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전하고, 그러면서도 메시지를 정확하게 전달하면 되는 거다. 문화예술이 그런 것 아닌가. 한마디로, 가짜로 진짜의 정곡을 찌를 수 있는 거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진다.
요즘은 내 연기가 좀 봐줄 만하다.(하하하) 마흔 살이 넘은 뒤로는 아무런 대사를 하지 않아도 눈에 사연이 담긴 듯한 느낌이 드는 것 같다. 그렇다고 완성됐다는 의미는 아니다.
완성은 아니다?
그렇다. 완성은 없을뿐더러, 완성할 필요도 없다. 과거에 무언가를 성취하고, 완성하는 것에 집착했다면 어느 순간부터는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구나 싶다. 중요한 건 꾸준히 하는 것이다.
언제부터, 어떤 이유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걸까.
아무래도 나이를 먹어가기 때문이겠지. 자식도 낳고, 주변의 죽음을 보기도 하면서 세월이 흘러가고 있으니 시선이 집중되는 방향도 달라진다. 결론이 어떻든 그건 상관없다. 못 하게 될 때까지, 안 하고 싶을 때까지 계속 하는 게 중요하다. 언제까지나 플레이어로 남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난 참 복이 많은 놈이다. 무대가 계속 주어진다. 한국영화에서 아직 못다 한 게 많다. 계속 연기를 하고 싶다.
마지막 질문. 한석규에게 배우란, 그리고 연기란.
사람들은 다른 사람 이야기를 엿듣고, 훔쳐보는 걸 좋아한다. 극장도 컴컴한 데 들어가서 남의 이야기를 훔쳐보는 듯한 느낌이 들지 않나.(웃음) 아마 그러고 싶은 게 사람의 본능인 것 같다. 배우는 연기로 그 본능을 채워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 역시 그 역할을 해내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이 있다.
2017년 3월 24일 금요일 | 글_박꽃 기자(pgot@movist.com 무비스트)
무비스트 페이스북(www.facebook.com/imovist)
사진 제공_영화사 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