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사 영화에서 배우, 스턴트맨이 하는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된다. 애니메이터는 컴퓨터 안에 준비된 인형을 움직여 포즈를 잡고 표정을 짓는 일을 한다. 즉 컴퓨터 속 준비된 인형을 가지고 시간에 따라 그 인형을 움직이는 것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백지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다.
그 과정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
제일 처음에 스토리부서에서 글로 된 시나리오를 시각화 해 ‘스토리 릴’을 만든다. 간단한 스케치를 플래시 만화 영상처럼 만드는 거다. 수정하기도 쉽고 이렇게 만드는 게 제작비도 덜 들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는 ‘레이아웃 릴’을 만든다. 카메라 연출이라고 보면 된다. 캐릭터의 움직임 없이 캐릭터가 어떤 타이밍에, 어디에 있고, 대략적으로 어떤 행동을 하고, 이때 카메라가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를 구성하는 거다. 레이아웃 부서의 테크니컬 디렉터가 맡는다. 세 번째가 바로 애니메이터의 차례다. 같은 주인공을 많은 애니메이터들이 분할해서 캐스팅한다. 나는 7개 샷을 캐스팅 받았다. 이 과정에서 ‘샷 브리핑’을 한다. 애니메이터가 감독님과 함께 캐릭터를 어떤 식으로 연기시켜야 할지 정보를 주고받으며 의사소통한다. 때때로 캐스팅 받은 샷에서 인물들을 연기하며 즉흥적인 애드립같은 아이디어를 추가해 넣기도 한다. 완성단계보다는 디테일이 떨어지지만 아이디어는 모두 들어가는 단계다. 감독님과 상의해 잘못된 것은 수정하고 재밌는 아이디어는 발전시키기도 한다. 그 다음이 바로 완성단계다. 몇 십 명의 애니메이터와 함께 의견을 교류하며 영화를 수정한다. 이 과정이 끝나면 색깔, 조명, 머리카락의 움직임 등을 삽입해 최종본을 만든다.
본인이 직접 아이디어를 낸 부분이 있나?
가파른 낭떠러지에서 알로가 절벽에 넘어져 다리 역할을 하는 장면이 있지 않나. 스팟이 알로를 밟고 건너 나무 열매를 따는 장면. 그 장면에서 스팟이 어떤 식으로 냄새를 맡고 뒤를 도는지, 큰 동물이 어떤 식으로 떨어지고 넘어지는지를 연출했다. 또한 넘어지는 타이밍을 조절해 제시하기도 했다.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을 믿을 수 있도록 만드는 게 내 역할이다.
중요한 설정은 감독님이 스토리 단계에서 다 확정을 짓는다. 하지만 공룡을 연기시키며 그럴 듯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것은 애니메이터의 몫이다. 아무리 말이 안 되는 콘셉트라도 사람들이 믿을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캐릭터의 움직임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것이다. 나는 실제 살아있는 동물들의 영상을 보며 그들의 움직임을 캐릭터의 움직임에 적용하고자 했다. 이를테면 공룡이 밭을 가는 부분에서도 코끼리나 기린의 움직임을 보며 그들이 어떤 식으로 움직이고, 목에 힘을 줘야 정말 밭을 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을지를 연구했다.
의사였다 들었다. 그때 배운 해부학이 도움됐을 것 같다.
비록 동물 의사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해부학은 많은 도움이 됐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기본적으로 공통적인 해부학적 구조가 있다. 컴퓨터 속 인형을 만드는 사람도 사람의 몸을 바탕으로 캐릭터를 구성한다.
픽사에 입사하기 전에는 게임회사인 블리자드에서 일했다 들었다. 그렇다면 액션 연기를 하는 데 강했겠다.
액션만 강한 건 아니다(웃음). 픽사 밖에도 굉장히 잘하는 애니메이터가 많다. 블리자드에서 일한 뒤 픽사에 들어오고 나서 ‘나만의 강점으로 삼을 수 있는 게 무엇인가’를 고민했다. 그러다 이들이 겪어보지 못한 것을 접목시켜 보여줘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를테면 블리자드는 시네마틱한 영상에 역동적인 액션 연기가 많다. 때문에 실제 움직임과 비슷한 연기를 해내는 게 목적이다. 반면 픽사에서는 긴 시간 동안 상영되는 영화를 만들어야 하기에 스토리 전달을 하는 연기가 주가 된다. 실제 움직임과 비슷하면서도 스토리를 전달할 수 있는 연기를 해내고자 노력했다.
<굿 다이노>를 만들면서 가장 압박감을 느꼈을 때와 성취감을 느꼈을 때는 언제인가?
피터 손 감독님은 상당히 개방적인 분이다. 또한 애니메이터 출신이기에 애니메이터들의 입장을 잘 이해해준다. 우리를 힘들게 하지 않았다. 다만 프로젝트를 처음 시작할 때가 제일 힘들다. 이건 모든 작품을 할 때 공통적이다. 캐릭터도, 캐릭터의 움직임도 익숙하지 않기에 첫 숏을 만들 때가 제일 힘들다. 성취감은 매번 내 부분을 완성시켰을 때 일반적으로 가장 크다. 특히 이번 작품에서는 감독님이 한국말로 ‘감사합니다’라고 말해줄 때 무척 기뻤다. 아무리 피터 손 감독님이 한국말을 하신다고 해도 모든 사람들과 함께 의사소통해야 하기에 영어로만 대화해야 한다. 그런데 내 부분의 파이널 숏이 끝났을 때 감독님이 한국말로 ‘감사합니다’라고 말해주자 마치 교감하는 느낌이 들었다.
내 행동을 후회한 적은 없다. 오히려 너무 늦게 시작한 게 후회 되더라. 왜냐하면 인턴 시작했을 때 벌써 내 나이 만 33살이었는데 동료들은 20살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들은 대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상태였다. 더군다나 나는 너무 늦게 시작했기에 많은 부분을 따라잡아야 했던 데 반해, 이들은 어릴 때부터 애니메이션을 보며 자라왔기에 경험치가 상당한 상태였다. 또한 후회해서는 안 된다고도 생각했다. 의사 일이라는 게 환자 건강과 직결된 것이잖나. 내가 애니메이터를 하다가 힘들다고 의사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때때로 처자식이 있는 처지기에 불안하기도 했지만 그냥 계속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불안하다고 해서 하지 않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결과가 안 나오면 어떡하지 싶을 때도 그냥 계속 했다.
2000년 초반에 의사 레지던트면 상당히 안정적인 미래가 보장된 셈이었다. 그럼에도 안정적인 길을 버리고 애니메이터가 되기로 결심한 이유는 무엇인가?
현재 한국에서는 청년실업이 무척 심각하다고 들었다. 어쩌면 당시 내가 했던 고민은 배부른 고민일 수도 있다. 당시 나는 내가 좋아하고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평소 좋아하던 영화나 애니메이션, 비디오 게임의 컴퓨터 그래픽을 직접 경험해보고자 병원을 떠나 애니메이터에 도전했다. 도전을 해 보고 후회하는 게 도전해보지 않는 것보다 낫다고 본다. 시행착오가 쌓이면 나중에는 이것들이 무시 못할 경험치가 된다. 좋아하는 일을 도전해보고 그 결과를 받아들이면서 실패하더라도 계속 도전하는 용기를 갖고자 했다.
근래 들어 픽사의 애니메이션이 한국에서 크게 흥행하는 경우가 잦아지고 있다. <인사이드 아웃>도 그런데, 이후에 포상금을 받진 않았나?
한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흥행 수익으로 성공 여부를 판가름하므로 한국에서 잘 된다고 특별히 더 받는 것은 없다. 다만 모든 영화가 수익을 올리면 혜택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한국에서 영화가 잘 되면 한국인으로서 느끼는 감회는 남다르다. 내가 픽사에 처음 들어갔을 때만 해도 일본 외에는 아시아 시장의 위상이 없었다. 그런데 한국에서 픽사 영화가 잘 되기도 했고 픽사에 한국인 친구들이 많이 들어오기도 하면서 사람들이 한국에도 관심 갖게 되더라.
밖에서 볼 때와 안에서 볼 때가 다른 회사다. 겉에서 보는 것보다 픽사 내에서의 경쟁 역시 치열하고 스트레스 받는 일도 굉장히 많다. 그렇지만 좋은 점은 경쟁이 치열한 가운데 뛰어난 사람이 많기에 멘토로 삼을 수 있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내가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된다. 또한 의사소통 체계가 매우 수평적이기에 자기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돼 있다. 특히 피터 손 감독님은 개방적일 뿐만 아니라 착한 리더십을 가진 분이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을 제시해 영화를 만들도록 하는 능력을 갖고 계셨다.
최근 애니메이션을 공부하고자 미국으로 유학 가는 젊은이들이 많다.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사람으로서 이들에게 주의할 점이나 조언하고 싶은 점이 있나?
처음 미국에 갈 때 애니메이션을 공부해서 애니메이터가 되겠다고는 생각했지만 ‘픽사가 아니면 안 돼’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난 비디오게임도 좋아했고 그 쪽에서 일할 의향도 있었다. 때때로 모교에서 학생들과 만나면, 그들이 픽사만을 목표로 하다가 법적인 제약에 걸려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모습을 보곤 한다. 기회나 시간이 항상 본인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흘러가는 것은 아니다. 현실적인 것을 무시하고 무조건 픽사만을 고집하다가 다른 쪽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도 놓치고 한국으로 떠나야 하는 학생들을 볼 때면 무척 안타깝다. 공부할 때는 꿈을 크게 갖되 실제 지원을 할 때는 현실을 고려해야 한다고 본다. 작은 회사부터 시작해서 차근차근 올라오는 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외국인으로서 법적인 불이익을 당하지 않고 계속해서 일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즐거운 일은 무엇인가?
감독님과 함께 한국에 방문한 건 처음이다. 감독님, 프로듀서와 함께 일을 하고 사담을 나누기도 했지만 이렇게 오래도록 함께 시간을 보낸 적이 없다. 이 분들이 좋은 사람이란 걸 알게 됐고 그 분들도 날 알게 되어 기쁘다. 한국의 많은 분들도 우리를 환영해주시니까 그런 것들이 다 섞여서 즐거운 상황이 된 것 같다.
2016년 1월 11일 월요일 | 글_이지혜 기자 (wisdom@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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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