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덕화가 왔다. <묵공>과 함께. 태어날 때부터 스타였을 것 같은 확실한 존재감은 한국에서 중화권 배우들의 인기가 사그러들기 시작한 90년대 후반에도 변함없었다. 일부 언론들은 <무간도>의 흥행을 두고 ‘유덕화의 부활’이라며 떠들어댔지만 그는 언제나 스타였고, 성공한 배우였다. 홍콩반환을 앞두고 동료 배우들이 캐나다와 미국으로 서둘러 떠날 때도 유덕화는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제작자와 배우를 넘나드는 그의 적극적인 행보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아나서는 평소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자신의 것을 드러내면서 전체를 아우르는 모습이야말로 강렬한 외모와 문화적 태생에 기반한 유덕화만의 ‘특별함’이다.홍콩 느와르의 전성기를 이끈 배우이기에 유덕화의 첫인상은 너무나 생소했다. <천장지구>와 <지존무상>에서 보여준 남성다움이 강인했던 탓일까? 처음 만나는데도 개구진 농담을 하며 먼저 다가오는 모습은 영락없는 소년의 모습이었다.

그의 장난기를 가늠할 수 있는 에피소드 두 가지. 첫 번째는 2005년 12월 중국에서 공개된 <묵공> 촬영장에서 일어났다. 한중일 프로젝트로 만들어진 영화의 특성상 각 나라별 언론매체의 현장공개가 1주일 간격으로 진행되고 있었는데 흙먼지가 날리는 건조한 세트 장에서 긴 촬영을 마치고 나온 그가 피곤해 하기는 커녕 한국에서 온 취재진을 보고 웃으면서 “이렇게 많이들 오시다니. 사실은 저를 보러 오신 게 아니라 안선생님(안성기)을 보러 오신 거죠?”라며 말을 건네는 것이 아닌가. ‘아시아의 별’ 유덕화에 대한 기억은 너무 친근해서 오히려 기억에 남았다. 그리고 10개월이 지난 뒤 오픈 토크 참가자로 부산영화제에 왔을 때도, 중국에서 미리 개봉해 130억 원을 벌어들이며 흥행몰이 중인 <묵공>의 홍보 차 또다시 한국을 찾았을 때도 그의 유머는 여전했다.

두 번째는 부산에서 다음 스케줄로 장소를 이동 하는 도중에 사인을 요구한 팬에게 다가가 한술 더 떠 사진까지 찍어준 뒤 옆에서 난감해하는 보디가드의 등을 ‘탁’ 치면서 눈을 찡긋거리는 그 순간이었다. 이번 인터뷰에서도 그의 위트는 단연코 빛났다. 인터뷰 전 진행된 포토 타임 때도 일부러 호텔 관계자가 보는 앞에서 탁자에 발을 올리더니 슬쩍 눈치를 보는 시늉을 해 그들의 긴장감을 웃음으로 풀어주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유덕화의 이런 여유로움은 자신의 일에 있어서 만큼은 철저히 배제된다. <묵공>의 한국 개봉을 앞둔 심정을 묻자 “솔직히 긴장된다. 이 영화는 흔히 볼 수 있는 무협 영화와 다르다. 사람의 도리와 인문적인 철학을 담았기 때문에 차별성을 확실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 점 때문에 한국 관객 분들이 얼마나 좋아해 줄지 궁금하고.” 자신을 빛낼 영화보다 내용이 충실한 작품을 고르는 것. 유덕화의 대답은 단순히 홍콩을 대표하는 미남배우에 머무르지 않고 120편이 넘는 영화를 찍은 베테랑 배우로 거듭난 이유를 알게 해준다. 사실 카지노 무비의 원조가 된 여러 작품들과 홍콩 느와르를 대표하는 영화 속에는 항상 유덕화가 있었다. 그리고 배우와 가수를 겸하는 것이 당연한 홍콩 연예계의 중심에서 아이돌 스타의 삶에 안착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세련된 외모와 섬세한 연기력을 지닌 그가 급변하는 홍콩영화계에서 여러 장르는 넘나드는 배우로 성장한 계기는 왕기위 감독의 데뷔작이기도 한 <열혈남아>를 통해서였다. TV태생인 그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을 견뎌낸 지 6년만의 일이었다.

1987년 작인 이 영화는 유덕화에게 홍콩 금장상 남우주연상과 대만 금룡상 남우주연상을 동시에 안기며 배우로서의 위치를 확고하게 만든다. 조직의 중간 보스로 분해 의리를 지켜야 하는 의무감과 사랑하는 여인을 향한 마음 사이에서 고민하는 불안한 눈빛 연기는 그 당시 홍콩의 불안한 미래와 본토인 중국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빗대었다는 찬사와 함께 유덕화 본인이 더 깨고 싶었던 ‘잘생긴 반항아’에서 한 단계 발전한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에서의 인기는 바로 그 매력을 고스란히 담은 <천장지구>를 계기로 시작된다. 거친 삶을 살지만 결국 사랑을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극중 ‘아화’는 유덕화가 연기한 다양한 인물 중에서 절대로 죽지 않는 불사조처럼 관객들의 기억에 영원히 남았다. 어쩌면 그가 여태껏 미혼인 이유도 사랑이란 감정이 영원불멸로 이어지지 않고 죽음과 배신으로 갈라지는 캐릭터를 유독 많이 해왔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겸애와 지략을 다룬 <묵공>에서 그가 맡은 ‘혁리’ 또한 양성의 기병대를 통솔하는 기병 책임자 '일열'(판빙빙)의 마음을 알면서도 거부하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 사사로운 감정을 허락하지 않는 인물이다. “개인적으로 그녀가 사랑한 대상이 ‘혁리’가 아니었으면 그 사랑이 훨씬 더 빨리 이뤄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웃음) 그는 묵가의 사상에 빠진 그 시대 엘리트이자 박애주의자이기 때문에 남녀간의 사랑에 빠질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일관된 행동을 보여준다. 그녀가 ‘혁리’를 끝까지 지지함으로써 죽음을 맞이하는데도 그가 변하는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오히려 성안의 사람들을 자신의 원래 목표대로 구했고, 나중에 아이들을 데리고 떠나는 게 나온다. 동일한 의식과 행동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일열’에 대한 감정에 대해 변화했다는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극중 로맨스에 대한 개인적 견해를 밝혔다. 중국 최고의 미녀라 불리는 판빙빙하고의 작업 또한 쉽지 않았다. 유독 수중 장면이 많았던 그녀와의 작업은 추운 날씨와 물의 심한 오염으로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많았다고 한다. 가장 힘들고 재미있는 장면으로는 물 감옥에 빠진 그녀를 구출 하는 장면을 꼽았는데 산소마스크를 쓰고 잠수부의 보호 아래 대기중인 판빙빙을 끌어 올리는 간단한 신인데도 물이 너무 더러워 아무것도 안 보이는 바람에 일단 잡힌 사람을 건지고 보니, 그녀가 아닌 잠수부여서 다들 황당해했다는 일화를 들려주었다.
사실 약자의 편에 서서 성을 지키는 극중 혁리의 모습은 현실의 유덕화와 상당히 비슷하다. 홍콩 영화계가 사양세로 접어든 지금 독립 예술영화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그가 차린 ‘포커스 필름스’는 젊은 감독들을 지원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나가고 있다. 자신이 제작자와 배우를 겸해 봤기 때문에 <묵공>의 감독이자 친구인 장지량의 고뇌를 한층 더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유덕화는 그의 연출에 대해 “예술적인 면을 살리는 데는 최고의 역량을 보이지만 상업적인 면을 많이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은 감독으로서 깊게 생각해 봐야 한다.”는 쓴 소리도 잊지 않았다. 유년시절의 기억을 공유한 사이지만 영화적 동반자로서 헤쳐나가야 할 일들이 앞으로 많이 생길거란 걸 말해주고 싶은 듯했다. 160억 원의 제작비가 들어간 <묵공>은 범 아시아 프로젝트로 제작되어 제작비 대부분을 회수 했지만 한국에서도 흥행으로 이어질지는 마흔 여섯 살의 노련한 배우인 유덕화조차 신중해 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 영화가 그간 여러 차례 만들어진 다국적 프로젝트 중 가장 성공적인 케이스라는 점과 “내가 이 영화를 하지 않고 다른 배우가 이 역할을 맡았다면 어떻게 연기했을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말로 <묵공>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사실 최근 붐처럼 일고 있는 아시아영화 네트워크를 적극 활용한 다국적 프로젝트는 모두 거대한 예산을 들여 제작했음에도 각 나라의 장점만 무리하게 담아 결국 무국적 영화로 전락하는 아픔을 겪어왔다. 유덕화 역시 그 전의 작업들이 캐릭터 본연의 모습보다 배우의 국적이 먼저 보일 수 밖에 없었던 사실을 쿨하게 인정하면서 “<묵공>을 기준으로 배우들의 국적을 구분 짓는 일은 확실히 사라질거라고 본다. 그만큼 배우들이 캐릭터를 살리는 연기를 한 것도 이유지만 그 상황에 몰입할 수 있는 여건이 잘 조성됐다. 앞으로 만들어질 합작 영화들이 이 영화의 성격과 개성을 많이 배웠으면 하는 바램이다. 내가 만약 이런 프로젝트를 진행 한다면 고전물 보다는 현대물을 만들 테지만.(웃음)” 200억 원의 예산을 투입해 한중 합작 영화로 제작되는 <삼국지: 용의 부활>의 주인공을 맡아 배우라는 익숙한 자리로 돌아 온걸 보면 제작자로서의 욕심은 일단 접은 듯 보였지만 나름의 계획은 탄탄해 보인다. 글로벌 프로젝트의 제작자로서 같이 연기하고픈 한국 배우가 있는지를 묻는 질문에는 확고한 대답이 돌아왔다. 각본이 우선이기 때문에 캐릭터에 따라 배우는 달라진다고. 하지만 굳이 장르를 구분해 배우들을 기용한다면 젊은 청춘 물 혹은 액션 코미디에는 권상우, 예술성과 카리스마가 결합된 영화라면 <올드 보이>의 최민식을 캐스팅 할 것 같다며 웃어 보였다. 특히, 내면의 따듯한 정서를 표출하는 영화에는 반드시 안성기 선생님을 모실 거라고 말하면서 “중국에서 촬영 당시 굉장한 노력과 열의를 보여줘 현장 스텝들이 그 모습에 감동해 저절로 존경하게 만드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특히 ‘나는 외국 사람이야’ 이런걸 강조하기 보다는 그쪽에 더 융합되고 어울리려는 모습을 보여줘 큰 감명을 받았다”고 밝혀 <묵공>의 작업이 아시아 영화시장을 하나로 묶어 주는 의미 있는 작업이었음을 거듭 강조했다.

유덕화가 이번 작업을 통해 묵가의 사상에 매료됐다는 점은 이미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기본 사상에는 동의하지만 실생활에서 사람들이 그것을 얼마만큼이나 실천할는지는 따로 생각해 봐야 할 문제라는 말로써 고단한 현실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영화보다는 관객들이 보고 나서 자신의 방향을 새롭게 정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개인적 포부를 펼쳐 보였다. <무간도>시리즈를 좋아해 제작자로서 다른 버전으로의 작품을 구상 중이고, 무릇 영화란 사람을 즐겁게 해줘야 한다는 그에게 ‘가수로서의 활동과 한국 관객이 자신을 어떻게 기억했으면 좋겠는지’를 마지막 질문으로 던져보았다. “내년에는 순회 콘서트를 계획하고 있는데 한국에서도 그런 콘서트를 열수 있는 제작자가 나타나길 빈다.(웃음) 나는 홍콩사람이지만 중국사람들을 우리의 친구, 친척 이라고 여기는 것처럼 한국 관객들도 나를 그런 감정으로 대해주길 바란다.” 유덕화는 그렇게 유머를 잃지 않고 자신의 길을 단호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영원히 늙지 않은 배우의 모습으로.

2007년 1월 7일 일요일 | 글_이희승 기자
사진제공_영화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