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뭐 있냐?”라는 질문에 악에 바쳐 “있어!”라고 대답하는 이 남자. 진부해져만 가던 미소년 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천정명의 극중 대사다. 정말 뭔가 있어 보이는 그의 실제 성격이 <굿바이 솔로>에서의 민호처럼 다정하고 귀여울 거라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다.
그는 싫은 건 싫고, 피곤한걸 억지로 감추며 지지부진한 말을 내뱉느니, 정신이 확 들게 창문을 열어 젖히고 기분전환을 하는 타입이다. 까칠함이 그대로 묻어 나오는 행동들은 계란 반숙같이 말랑거리는 음색과 묘하게 대비됨과 동시에 ‘~~하거든요.’,’~~그래요, 저는’ 이런 식의 말투와 맞물려 상대방으로 하여금 보호본능을 일으킨다.
순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어릴 때부터 뛰고 발로 차는 운동을 좋아한 천정명의 실제 성격은 그야말로 천상 남자의 모습이다. 아스팔트 위 땀내나는 인라인 스케이트의 세계로 뛰어는 <태풍태양>의 ‘소요’역할도 점차 성장 해하는 소년들의 중심에 서 있었고, <강적>의 탈주범 ‘수현’도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온 몸으로 거부하는 남자다.
그는 자신이 배우가 될 운명이라고 생각했을까? 길거리 캐스팅 후 CF와 드라마를 거쳐 <태풍 태양>으로 청룡영화상 신인상을 받을 만큼 충무로의 기대주로 떠오른 그가 후회 없이 선택하고 기꺼이 즐기면서 찍은 <강적>은 강렬한 에너지를 내뿜는다.
시트콤 ‘똑바로 살아라’의 엉뚱한 매니저 역할부터 고등학생, 순정남, 탈주범을 거친 그의 연기 스펙트럼은 나날이 넓어지고 있는 셈이다. 이왕 나에게 주어진 운명이라면 ‘악’ 소리 날만큼 달려들 각오가 되어 있는 남자, 천정명과의 만남을 고스란히 전해본다.
예, 그런 것 같아요. 제가 상상했던 것만큼 잘 나온 것 같아서 되게 좋았어요.
가제가 <죽기를 각오하다>라고 들었는데, <강적>의 어떤 매력 때문에 영화에 출연을 결정하게 됐는지?
제목도 마음에 들고, 한번 더 센 역할도 하고 싶었었고, 디테일하고 강한 역을 하고 싶었구요, 뭐니 뭐니 해도 조민호 감독님이 마음에 들었어요.
그럼 <정글주스>도 미리 챙겨보셨겠네요.
예. 굉장히 유심히 봤죠. 감독님을 직접 만나고 나서 그 믿음이 더 굳어졌던 것 같아요.(웃음)
자신이 녹아있는 연기를 추구하신다는 말을 들었다. 극 중 수현이 천정명과 얼마나 닮았나요?
뭐, 여러 가지가 있는데… 제가 극중에 처한 상황 이라던지 조폭 생활 이라던지, 밑바닥인생을 살진 못했잖아요. 근데 수현이 가지고 있는 성향과 굉장히 비슷해요. 제 성격자체가. 사람을 대할 때나 상황에 처했을 때 성격이라던 지 그런 게 되게 비슷했어요.
같이 연기하신 박중훈씨가 정명씨 성격이 욱하다 고, 자존심이 세다고 평가했다. 사실 수현도 욱한 성격이 있으니까 그런데 본인 입에서 비슷하다고 하니까 놀랐어요.(웃음)
그런 것도 있는 것 같아요. 남자적이고, 마초적인 거. 수현이란 캐릭터가 그런 것 같아요.
탈주자임과 동시에 전직 조폭, 동시에 억울한 누명까지 쓴 인물이다. 참 복잡 미묘한 사람인데 그런 인물을 표현하기 위해 가장 신경 쓴 부분은 뭔가요?
음…일단 외모적인 것과 많이 좌우하기 때문에 많이 작품들을 봤어요. 영화나 비디오로. 감독님이 추천해 준 영화가 몇 작품 있는데 처음에 본게 <무간도>에서 양조위가 맡은 역할, 두 번째는 멕시코 영화 <아모레스 페로스>란 영화인데 그 영화 되게 괜찮거든요. 도망자 시리즈도 많이 보고, 극에 처한 상황에서 자기 누명을 벗기 위해서 도망치려는 그런류의 영화를 많이 봤어요.
모델로 데뷔하셨지만 언제부터 연기에 욕심을 내기 시작했나? 원래 연예인에 대한 흥미가 없었다고 들어서 더 궁금하다.
욕심을 냈다기 보다 운동을 좋아해서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했어요. 꼭 체육에 종사하는 사람이 돼야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죠. 체육 교사나, 교수 이런 쪽을 하고 싶었거든요. ‘일단 고등학교를 가서 목표를 체육학과를 진학을 하자’고 결심하고 체대 입시학원을 다니고 있었는데 우연찮게 길거리 캐스팅이 된 거예요.
그때가 고등학교 2학년 때였어요. 정말 별 관심이 없었는데 그쪽에서 집요하게 전화 오고, 와달라 한 게 이렇게 된 거죠.(웃음) 그러다가 처음으로 CF를 찍고, 쭉 모델 활동을 하다가 대학교 들어가서 본격적으로 일 시작하고 그러다 연기 수업도 하게 됐어요. 일단은 뭔가에 끌렸던 거 같아요. 끌리게 되니까 욕심이 생기더라구요.
‘한번 해보자. 괜찮은 직업인 거 같고.’그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더라구요. 또 내가 영화를 좋아했었으니까. ‘나도 이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하는 호기심에 시작한 건데 이렇게 드라마도 찍고, 영화도 하고.(웃음)
사실 <강적>보기 전에 걱정을 많이 했었다. 당신은 정말 선한 송아지 눈빛을 가지고 있으니까. 오죽하면 ‘천정명’을 아우르는 공통 수식어는 거의 다 ‘소년에서 청년으로’ 뭐 이런 식이다. 눈이 너무 선해서 탈주자가 어울릴 것인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영화를 보고 나니 이해가 됐지만.
꼭 뭐가 되겠다 그런 건 아닌데 왜들 그러실까.(웃음) 웃긴 게, 그런 건 있는 것 같아요. 선입견을 가지고 보시는 분들이 있는데 저도 그런 선입견을 가지고 있긴 하거든요. ‘쟤가 그런 역할을 맡을 수 있을까?’ 하는 오해. 그건 사람마다 다 틀린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며칠 전에 되게 재미있는 일이 있었어요. 어떻게 보면 굉장히 큰일날 일이었는데. 아는 형 가게에 놀러 갔는데 거기에 세차를 하는 공간이 있거든요.
그걸 보고 있는데 뒤에서 “어이~내 차 어디 있어?”라고 물어보시는 거예요. 그래서 난 여기 손님이라고 그랬더니, 저를 유심히 보는 거예요. “어? 네가 그 애냐?”그러면서 어깨를 탁! 치시는 거예요. 이렇게 척 손을 올려놓고, 치는데 기분이 나빠서 쳐다보고 있었어요. 마침 그 형이 나와서 제 성격을 아니까 커트를 해주시더라구요. 친한 동생인데 놀러 온 거다. 그러면서. 그랬더니 “얘가 네가 말한 그 동생이구나. 잘생겼네.”그러면서 갔어요. 내가 “저 사람 누구야?”그랬더니 군산 000파 보스래요.
정말 평범하게 생겼거든요? 다부진 것도 아니고 옆집 아저씨처럼 유하게 생긴. 대부분 그런 유명 보스면 뒤에 건장한 아우들 있고 그러잖아요. 일단 저야말로 생각도 못했던 거지. 그런 분이신지. 그래서 “왜 저분은 혼자 다녀?”그랬더니 그 분은 티 나게 몰려다니시는 거 싫어하고 굉장히 검소하고 매너 있는 분이라고 하더라구요. 아무튼 사람들의 그런 선입견은 무시 못하는 거 같아요.
요즘엔 그러면 맞아요. 고등학생이라고 그런 거 없어요. 얼마나 무서운데.(웃음)
그나저나 지금하고 있는 밤톨 머리 너무 잘 어울리시는데 스트레스 많이 받으셨다고 들었어요.
관리하고 자르는 게 귀찮은 게 아니라 길러야 되니까. 드라마상에선 더 길렀었어야 했어요. 제가 감독님한테 머리를 유지를 할까요? 기르면서 할까요? 여쭤보니까 좋을 대로 해라. 그래도 이왕이면 길렀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스트레스 많이 받았죠.
기르면서 촬영하다 보니 짧은 머리가 기르면서 엉성해 지고 스타일도 안 나오고. 저는 매 작품대마다 머리스타일을 중요시 생각하거든요. 엄청 받았죠. 스트레스. (웃음)
극 중 유인영씨하고의 베드 신이 의외로 짧게 나와서 아쉬웠다. 헤어진 연인들의 절절함이 묻어나야 하는데 중간에 탁 끊긴 느낌이랄까? 보도자료에는 최소인원이 참석해서 최대한 디테일 하게 찍었다고 써있어서 더 기대했었나 보다.(웃음)
찍으면서 최선을 다해도 막상 보면 아쉬운 게 있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아, 깬다.’라고 말하는 부분은 구치소 장면이에요. 여자친구인 인영씨가 면회 와서 내가 초췌하고 안돼 보이니까 자기가 싸온 삶은 달걀을 건 면회 창문에다 대고 꾹 눌러서 주잖아요. 말할 수 있게 구멍 뚫린 부분에다가.
그 장면을’ 아, 뭐야, 먹는 것 같고 장난치는 거 아냐?’ 라는 의견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게 실제로 있었던 일이래요. 저도 너무 오버 아닌가? <너는 내 운명>따라 하는 것 같고 그랬는데 감독님이 면회하는 거 조사할 때 있었던 일이라고 하더라구요.
말을 나누다 보니 감독님 이야기가 유독 많이 나오는 것 같다. 현장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나누며 찍었나? 무엇보다 맞는 사람이랑 작업한다는 게 즐거웠어요. 형님은 워낙 운동 좋아하시고 여가 생활을 즐기시는 분이라 나이차이는 났지만, 세대는 맞았던 거 같아요. <강적>은 정말 즐기면서 일한 것 같아요.
서울시에서 이례적으로 잠수교를 개방했다고 들었어요. 그야말로 엄청난 지지를 받으며 촬영했는데, 그 당시 현장은 어땠나? 영화에서도 엄청 긴박감 넘치게 나오던데.
되게 재미있었어요. 거기서 막 드러눕기도 해보고 역주 행 해보기도 하고.(웃음) 그런 거 해보고 싶었거든요. 그 곳 촬영 분이 이홍표 무술감독님이 저를 쫓아 오는 장면인데 <강적>의 무술감독님께서 직접 출연하셨거든요? 심재원 무술감독님은 ‘김중만’이란 역을 직접 맡아 오토바이 타고 우우웅~타고 쫓아오는 씬 이거든요. 쉬는 시간에 그 오토바이 빌려가지고 역주 행 막 하고 그랬어요.
체육학과 출신이라 액션은 무리 없었겠다.
예, 그냥 재미있었어요. 영화 들어가기 전에 한달 반 정도 액션 스쿨 들어가고.
액션 스쿨 들어가면 기본적으로 살 엄청 빠진다던데….
빠지긴 빠져요. 체계적으로 운동을 가르쳐 주기도 하지만, 운동을 안 한 사람들은 더 빠지겠죠. 저는 꾸준히 해왔던 거라 그렇게 많이 빠지진 않았어요. 일단 시작하기 전에 운동장을 세 바퀴 다섯 바퀴 도는데 그것만도 힘들어요.
사실 리마 증후군(인질범들이 인질들에게 정신적으로 동화되어 자신을 인질과 동일시함으로써 공격적인 태도가 완화되는 현상.)을 직접적으로 다루긴 했지만 수술하자마자 돈 구하러 돌아다니고, 싸움하고 그런 장면은 좀 난감했었다. 되려 스톡홀름 증후군(인질이 인질범들에게 동화되어 그들에게 동조하는 비이성적 현상을 가리키는 범죄심리학 용어.)인 하성우(박중훈)는 형사의 감을 우선시 하는 것 같아서 동화되기가 힘들었고.
그런 부분도 있긴 한데, 한 집단에 계속 있다 보면 그 사람을 믿게 되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미술고등학교를 다닌 친구가 해준 얘기인데 한 반이 50명이라면 두 명 빼고 다 여자래요. 걔네 들은 남자들이 두 명이니깐 어떡해서든 쟁탈하려고 난리가 난대요. 그런데 옆 반은 반대로 그 둘을 여자처럼 대한다는 거예요. 체육시간에 남자들 있는데도 막 옷 갈아입고. 그것처럼 동화되는 거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비유가 맞으려나 모르겠네.(웃음)
<강적>을 통해서 관객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고 싶나요?
꼭 평가를 받고 싶진 않아요. 왜냐하면 열심히 했으니까 좋게 봐주셨으면 좋겠고, 제가 한만큼 연기에 대해서만 보셨으면 좋겠어요. 오로지 다른 거에 신경 안 쓰고. 할리우드 배우들 보면 어떤 일을 하던 간에 신경 안 쓰잖아요. 예를 들어 브리트니 스피어스면 노래를 좋아해야지, 애를 낳고 이혼이 어떻고 그런 얘기들까지 하잖아요. 전 그런 거 신경 안 쓰거든요. 그 사람의 연기나 노래를 보면 봤지 사생활은 관심 없어요. 정말. 우리나라는 그런 면에 있어서 좀 민감한 거 같아요. 진정한 팬이면 겉모습이 아닌 속을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선입견을 버리고.
음. 그런걸 바라면 우리나라에서 연예인 하기를 포기해야 할 것 같다.(웃음) 전문 파파라치만 없을 뿐이지, 온 국민이 다 폰카나 디카를 찍어대니까. 그렇다면 개인 청정명의 인생 최대 ‘강적’은 누구라고 생각하나?
아버지라고 생각해요. 아버지께서 되게 철저하신 분이시거든요. 일에 있어서도. 아버지를 많이 본받으려고 해요. 항상 아침 6시에 일어나시고, 철두철미하게 일하시고. 그런 점을 본받고 싶어요.
여유 있게 차기 작을 고르신다고 했으니, 배우 천정명의 최종 목표를 대답해주시는 걸로 인터뷰를 마칠게요.
일단 계획은 작품을 조금 쉬면서 신중하게 고르고 싶어요.. 다른 작품의 캐릭터를 맡기 위해선 준비 없이 일하면 티가 나잖아요. 어느 정도 여유가 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굿바이 솔로>가 좀 아쉬웠거든요. 요번엔 좀 쉬면서 차후 계획을 천천히 정하는 게 목표입니다.(웃음)
2006년 6월 20일 화요일 | 글_ 이희승 기자
2006년 6월 20일 화요일 | 사진_ 권영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