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오후 화장을 했다.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오는 손거울을 쥐고 이리저리 얼굴의 모양을 정돈해 간다. 벽에 걸려있는 시계의 초침소리가 심장박동수와 속도를 같이 할 때, 문을 나선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애인을 만나러 가는 기분이 이럴까? 일상에 찌들어 잊었던 소녀 같은 설렘이 간만에 드러낸 5월의 청명한 하늘 빛 아래 하얗게 부서진다.
자그마한 뒤뜰이 있고 아담한 엔틱 가구가 있어야 할 자리에 꼭 있는 강남의 한 카페에 도착했다. 서둘러 그 안으로 발을 들여 놓자, 늦장을 부리고 있는 오후의 햇살들이 쫑알쫑알 입씨름을 하며 엄태웅 주위에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엄태웅은 툭하면 약속시간에 늦는 애인을 기다리는 게 일상이 돼버린 남자마냥 손에 들린 카메라를 장난스레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엮어가고 있었다. 아마도 오늘 엄태웅은 카메라에 자신을 스쳐지나간 이들의 흔적을 새겨 놓았나 보다. 빙그레 미소를 머금은 채 도통 고개 들 생각을 안 한다.
<가족의 탄생>에서 엄태웅은 고두심과 몇 십 년 나이차를 극복하고 결혼한,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어딘가에는 꼭 있을 법한 인물, 형철로 분했다. 쉽사리 공감가지 않는 인물을 연기했기에 그의 연기가 푸석푸석 해 보이지 않을까 영화를 보기 전부터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그는 그 비현실을 스크린 속에서 현실로 바꿔 놓으면 엄태웅의 존재감을 한지에 먹물이 스미듯 새겨 놓았다.
“형철이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선 쫓겨나지만 영화가 만약 그대로 계속 된다면 아마 형철이는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 시시덕거리며 누나(문소리), 무신(고두심)씨 하고 같이 놀고 있을 것 같아요”
영화는 그렇게 그 안에서 계속되고 있었다. 우리의 삶이 오늘도 내일도, 끝도 없이 이어지듯 말이다. 엄태웅은 주위의 작은 소음에도 묻힐 만큼 조용한 음색으로 천천히 또박또박 말을 이어간다. 고두심과 실제 나이차가 23살이 되는 엄태웅은 얼굴에 홍조를 띄우며 ‘무신’이란 이름을 불러본다.
“민망했어요. 숙소에 들어가 침대에 엎드린 채 고두심 선생님과 신음연기를 했어요. 서로 부끄러워서 그 순간 얼굴도 못 봤어요.”
실제 베드씬을 한 것도 아닌데 엄태웅은 상대의 눈을 피하면서 그때의 일을 떠올린다. 남들이 들으면 재미난 에피소드 정도일 뿐인데 그에겐 배우로서의 통과의례처럼 작은 떨림을 동반하는 일이었나 보다. 대배우와 호흡을 맞춘다는 건 연기경험이 풍부한 베테랑에게도 그리 녹록치 않은 작업일 게다. 엄태웅은 거기다 하나를 더 보태야만 했다. 모두 다 알다시피 고두심은 엄태웅의 상대역이자 연인인 무신역으로 등장한다. 남들이 봐도 둘이 연인사이로 느껴져야 <가족의 탄생>은 설득력을 얻게 된다. 엄태웅은 영화 안에서 형철이 돼, 무신에게 팔베개를 해준 채 느긋한 낮잠 속으로 빠져들 줄 아는 배우로 거듭난다.
“보시는 분들에 따라 각자 공감하는 부분이 다를 거여요. 눈물이 찡한 부분마저 도요. 자신과 비슷한 곳을 관객들이 찾아가는 재미도 이 영화에는 있어요”
엄태웅은 그제야 달콤한 낮잠을 자고 일어난 아이마냥 눈을 부비며 주변을 둘러본다. 아직 저녁의 푸르름에 적응 못한 그의 눈빛은 오후를 닮아 있었다. 10년 세월을 훌쩍 뛰어넘으며 햇빛을 등진 채 누나와 무신씨를 만나러 온 현철처럼 그 작은 카페 안에서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는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가족을 만든 현철처럼 엄태웅은 낯선 공간에 있는 모든 것들에게 하나하나 의미를 매긴 다음 시간의 고리를 잇대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간다.
엄태웅은 그가 만들어 낸 형철이 그의 일부분이긴 하지만 실제의 자신과는 다름을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상대에게 불쑥 확인시키듯 말한다. 굳이 그렇게 말 안 해도, 현철과 엄태웅은 닮지 않았음을 누구나 아는 데도 말이다. 김태용 감독은 드라마 <쾌걸 춘향> 방영 당시, 엄태웅에게 다른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사람들이 드라마 속 그에게 빠져 있을 때 김태용감독은 철없고 무책임한 형철을 어디서 찾아냈을까?
“저도 몰라요. 그래도 나중에 생각하니깐 정말 재미있는 캐스팅이 된 것만은 확실해요”
자신도 명확하지 않은 일에 대해 억지로 말을 꾸미지 않는 그의 태도에는 느긋함이 스며있다. 배우로서의 꿈을 키운 10대 후반부터 20대 전부를 기다림으로 보내야만 했던 엄태웅에게 지금의 오후는 처음부터 지루함이 아닌 기다림이었다. 상대에게 현재의 자신을 설득시키지 않는 모습에서, 여느 또래배우에게서는 느낄 수 없었던 한가로움이 묻어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거다.
“가족들이 저를 내버려뒀어요. 기다려줬던 것 같아요. 그래도 속으로는 걱정들 하셨겠죠.”
대기만성 배우라고 자신을 부르는 세간의 평에도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한다. 20대의 욕심을 쉽사리 성급함으로 맞바꾸지 않은 30대의 엄태웅에게 지금의 인기와 배우로서의 위치는 긴 기다림의 여정일 뿐이다. 오후의 카페에서 차 한 잔을 마시는 지금의 여유조차 오래도록 배우로서 살고 싶은 그만의 시간 세공법이다. 자신에게 꼭 맞는 그 때를 기다리며 섬세하게 오후를 보내는 엄태웅에게 그제야 늦은 저녁 빛이 드리운다.
글: 최경희 기자
사진: 김종갑 (코어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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