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규 기자(이하 최): <안녕, 형아>에서는 어떤 역할인가요?
최: <안녕, 형아>는 어떤 영화라고 생각하세요?
오: 뭐... 홍보 카피에는 가족영화라고 되어있는데 개인적으로 보기에는 가족영화이기도 하지만 성장 영화이기도 하더라고요. 그리고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은 박지빈 군이 연기한 장한이라는 아이의 성장하는 과정을 이렇게 before after처럼 영화를 한 시간 반 정도 보다보면 아이가 한 움큼 커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돼서 그 미덕이 제일로 큰 거 같아요.
최: 시사회 반응은 확인 하셨나요?
오: 그럼요. 무대 인사하러 다니면서 반응확인 하는데 가족하고 같이 오는 사람들이 진짜로 많더라고요. 일단 영화가 현장 예술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떤 관객이 오느냐에 따라서 또 분위기가 달라질 수 있는 데 그렇게 영화를 핑계대고 가족이 그렇게 문화생활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게 정말 좋고 그러다 보면 시너지 효과도 일어나고 서로 가족의 소중함을 느끼는 모습들 서로 손 꼭 잡고 나가는 모습들 그리고 애기 엄마 아버지들은 많이 우시더라고요.
최: 어떤 관객들은 일부러 눈물만 강조했다는 이야기도 하던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오: 그건 그런 말을 하신 분이 너무 굉장히 많이 슬프셨나 보죠. 왜냐면 제가 연출자가 아니긴 하지만 제가 본 연출적인 부분은 오히려 신파로 몰아가면 위험할 것 같으니까 너무 많이 자제한 것 아니냐는 그런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런 말을 하시는 분들은 본인 스스로가 무척 많이 슬펐나 보네요.
최: 말씀 하신 것처럼 일부 언론에서는 너무 자제를 했다는 말도 있어요.
오: 일단 창작자의 창작물의 결과물에 대해서는 ‘재미있다’ ‘재미없다’로 말할 수는 있어요. 그러나 ‘잘못 만든 거 아냐?’라는 식의 말은 결코 해서는 안 되는 거죠. 왜냐면 그 수십억의 돈을 낭비 했을 리 없고 영화는 감독 예술인데 그건 신파를 넣었건 안 넣었건 어찌 되었든 그건 감독 마음이거든요. 그리고 예술에는 정답이 없는 거기 때문에 굉장히 각자의 예술은 수용자의 것이라고 봐요. 그래서 사람들이 B급영화 진짜 저질 영화라고 했던 영화가 자기의 인생의 영화가 될 수 도 있는 거고 우리가 얘기하는 예술 영화 혹은 흔히 말하는 역대 명작이라 하는 것도 보다가 지루하다고 나가는 사람도 있는 것처럼 <안녕, 형아>도 마찬가지로 관객 스스로의 마음에서 완성 되는 거 같아요. 뭐라고 가타부타 얘기 할 수는 없죠.
최: 그렇다면 오지혜씨 인생에 영향을 준 영화가 있을까요?
오: 글쎄요. 저도 20대 청춘 때 영화 마니아라고 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 약 1200여 편의 영화를 봤나 그래요 그 정도 되면 정말 좋아하는 영화가 뭐냐고 물어보는 건 정말 잔인해요. 저에게 영화 나 연기에 대한 영향을 준 것은 부모님의 영향과 환경이라서 어떤 영화 한편이라고 고르기에는 글쎄요 그렇게 골라 본 적이 없어요.
최: 그렇다면 출연하신 작품 중에 애착이 가는 연기를 꼽는다면 어떤 것이 기억에 남으시는지?
오: 영화중에서라면 <창>을 찍었을 때 그때는 물론 그전까지는 거의 단역에 가까운 역할이긴 했지만 연극배운데 영화 가서 아르바이트로 이게 상당히 건방진 표현이지만 도와주고 알바비 받는다고 생각했는데 창을 찍으면서 나도 모르게 처음으로 크래딧을 처음부터 끝까지 조명부 막내 촬영부 막내 이름까지 다 확인 하면서 막 애정을 가졌던 기억이 나요 그렇게 현장에서 나도 모르게 영화인 우리 식구들 그런 생각을 가지면서 찍었던 것이 <창>이어서 그때가 기억이 남고 그 이후로는 사실 전 영화가 굉장히 큰 바닥인줄 알았어요. 그랬더니 한 5편정도 찍었더니 그때부터 스태프들이 돌고 돌더라고요 다 여기 식구가 저기 식구고 이제는 웬만한 현장가도 다 아는 사람들이 있고 그런 거처럼 영화도 시장이 커서 그렇지 스태프나 이런 것들은 그렇게 만지는 않구나. 이렇게 느껴지고 이제는 우리 식구처럼 느껴져요.
오: 배우는 누군가 나보고 왜 연기를 하냐고 묻는 다면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해 주기 위해서라고 건방을 떨었었는데 정말 깊은 자식이 심하게 아픈 것만큼 고통스러운 게 세상에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그런 분들의 아픔을 감히 연기한다고 생각하니깐 굉장히 부담스럽고 혹시라도 이게 제대로 전달이 안 되면 안한 것 보다 못한데 이거 어떻게 하나 그런 조심스러움이 있었죠.
오: 당연히 가슴 아프죠. 그게 연기를 할 때 내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가 닿을 수 없는 것을 하면 정말 힘들지만 아이가 아프고 아이가 잘못되고 이런 것들은 애기를 키우면서 많이 하게 되잖아요. 거기 누워있는 그 애가 우리 아이라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더 미치는 건데 그때 그 장면도 진짜 많이 자제한 거죠.
최: 배종옥씨와의 화장실 장면이 있는데요. 참 인상적이에요. 살아오시면서 그렇게 세면기에 얼굴을 묻고 울고 싶었을 때가 있었나요?
오: 아주 심하게 슬펐고 울고 싶었었던 적도 있었고 그랬지만 세면기에 담그고 울어야 눈이 안 빨개진다는 것은 저도 이번에 처음 알았어요.
최: 영화를 볼 예비 관객들에게 추천 해주실 장면 있을까요?
오: 특정한 어떤 장면을 골라서 추천을 한다는 건 어패가 있고 중점적으로 봐야할 것은 눈물 짜는 영화 이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관객들 와서 많이 울고 스트레스 풀고 가라 해서 만든 게 아니거든요 그렇다고 병원 24시의 극장판 버전도 아니고 소재를 아픈 아이들로 했을 뿐이지 비극 그러니까 전쟁 속에서도 사랑하고 임신하고 출산하고 별거 다하잖아요. 그냥 그 아픈 것도 죽음이라는 것도 인생의 한 부분이고 그걸 보면서 아이가 한 아이가 커가는 것은 우주가 도와주지 않으면 우주 전체가 도와주지 않으면 할 수 없다고 하자나요 마찬가지로 장한이라는 그 작은 아이가 성장하는데 얼마나 큰 에피소드와 사람들이 필요한지 그것을 생각하면서 보시면 더 의미 있게 보실 수 있으실 것 같아요
최: 홈피를 가끔씩 들어가 보곤 합니다. 사진들이 참 좋은데요. 아무래도 일반적인 배우 분들은 사적인 부분을 숨기고 싶어 하시던데 그렇게 모두 공개를 하시는 게 부담스럽지는 않으세요?
오: 공개적으로 관리한 적이 없거든요 저는 아직도 저를 연예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보세요. 지금 저랑 길거리에 같이 나가보세요. 아무도 저 못 알아봐요 아주 간혹 가다가 혹시 이러지 거의 못 알아보기 때문에 지금도 그런데 그 홈페이지 만든 거는 거의 머 한 4년 전 그러니까 <와이키키 브라더스> 끝나고 바로 어느 팬이라는 분이 만들어 주신 거죠 그러니 그때만 해도 정말 개인의 기록 그리고 친구 친지들 찾아와서 수다 떨고 노는 곳 극소수의 저의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아주 극소수 팬들 한 15명 정도나 될까 하는 그분들 모여서 하는 장소였기 때문에요 절대로 공적인 장소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래도 인터넷이라는 자체가 굉장히 공적인 곳이니까 그렇다고 제가 알리고 싶지 않은 사생활을 미쳤다고 거기에 내겠어요? 거기에 실린 사진은 거의 다 제 일상이니까.
최: 옛날 사진이 많으시잖아요.
오: 예 머 그래도 보면 안 되는 사진은 없으니까요.
최: 연예인 집안이셨잖아요. 이번에 <혈의 누>를 통해 오현경 선생님의 모습을 뵐 수 있어 좋았습니다. 요즘 연예인들은 부모님의 명성을 활용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부모님이 연예인이라는 점이 자신의 인생에 도움이였는지 아니면 힘든 점이였는지 궁금합해요.
오: 그건 정말 조심스러운 질문이에요. 그 사람들이 정말 그런 조건들을 이용하려고 했는지 확인을 하신 게 아니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은 정말 무책임한 생각이고 질문이에요. 그 사람들한테 한번 물어보세요. 그 사람들이 그럼 조건들을 이용했는지 아니면 그런 점들이 좋은지 아마 모두들 아니라고 할 겁니다.
저도 그런 점에선 마찬가지에요 저도 데뷔하고 10년이 가깝도록 기를 쓰고 연기를 해도 항상 꼬리표가 달렸었어요. 그래서 저는 그게 정말로 큰 부담 감이였는데 일반 관객들은 이거 부모 명성을 얻어서 쉽게 배우 된 애구나 라고 다 그렇게 생각해 요 그러니까 그렇게 판단하신 거는 선입견이에요 오지혜는 그렇지 않을 거라는 선입견인데 그렇게 보면 지금 있는 2세 분들도 저랑 똑같은 고민을 할 거고 다르지 않다는 것 그리고 저도 그게 싫었듯이 지금 그분들도 부모의 명성을 이용해서 인기를 얻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데 매스컴이 그렇게 만드는 거라고 생각해요.
오: 그렇죠.
최: 20살 때 데뷔를 하신 거라고 해야 하나요? 그때 무대에 오르셨던데.
오: 아니죠. 24살이죠. 중대 연극영화과 87학번이거든요 91년에 졸업해서 그해 가을에 아니 그해 봄에 데뷔를 했으니까 91년에 데뷔를 했죠. 말씀하신 건 연극영화과라는 건 준 프로라고 할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대학 때 그때 올랐던 것을 말씀하시는 거 같아요.
오: 타고난 배우에요. 우리식구중에 세 명이 배우인데 유일하게 배우 수업을 받지 않으신 분이거든요 아버지는 극회 출신이시고 당연히 저는 더 전문적인 연극과를 졸업했지만 엄마는 무용을 하던 분이세요. 고등학교 나와서 무용만 하셨는데 그래서 발성이나 딕션 같은 것은 약하시지만 발성이나 딕션이 되는 배우가 얼마나 되겠어요. 그렇지만 무대에서 아무것도 안하고 엄청나게 큰 대극장에서 아무것도 안하고 혼자서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무대가 꽉 차는 느낌 그런 카리스마를 보이시는 분인데 그런 건 열심히 연습한다고 되는 게 아니거든요 그건 타고 나는 거죠. 그러니깐 그런 끼가 있으신 분이시죠. 참 부럽죠.
최: 어려서부터 그런 마음이 계속 있으셨던 건가요?
오: 그럼요 그래서 대학교 때는 배우가 되고자 결심하고 나서 한참동안은 그게 뭐 콤플렉스라고 해야 하나 그게 다른 동료 배우들은 요만큼만 잘해도 칭찬받는데 저는 그것보다 몇 배는 잘하고 가끔은 객관적으로 봐도 내가 조금 더 잘한 거 같은데 저는 항상 본전 이였어요. 부모님이 너무 대단하시고 유명하시니까 기를 써도 항상 누구 딸 평은 거기서 끝나더라고요 참 김빠지고 진 빠지고 정말 이 벽을 넘으려면 얼마나 큰 노력을 해야 하나 라는 것에 늪에 빠졌었던 적도 있었어요.
최: 지금의 오지혜가 있기까지 어머니의 영향이 많이 작용을 했었나요?
오: 뭐 아버지랑 어머니 반반인데 두 분이 상당히 극과 극이셨어요. 아버지는 상당히 유교적이시고 아 거기 <혈의 누>에 나오시는 김치성 대감하고 똑같아요. 그래서 우리 식구들이 그거 캐릭터 분석할 필요도 없네. 본인 그대로 하면 되네. 라고 했었어요. 아버지는 그런 분이셨고 엄마는 인생을 아님 말고 이걸로 살아오신 엄청 자유스러운 분이셨고 그러니깐 제가 반반씩 닮았다고 볼 수 있겠죠 그리고 엄마가 항상 물 흐르는 데로 살아라. 자연스럽게 뭐든지 자연스럽게 억지로 하지 말고 연애도 그랬어요. 한번은 20살 때 누구한테 막 차일 것 같았어요 그래서 와서 징징 거리면서 우니까 엄마가 뭐라고 하셨냐 하면 차일 때 까지 기다려라 절대 먼저 차지마라 그게 항상 인생을 더 풍요롭게 사는 길이다. 그랬고 누구랑 지방 공연가고 촬영가서 룸메이트가 만약 있다면 무조건 양보해라 뭐든지 그게 항상 인생을 편하게 사는 거라고
연기도 혼자 막 튀려고 하지 말고 상대를 더 돋보이게 해라 그게 나중에 작품이 더 사는 거고 제 연기가 더 오래 남는 거라고 항상 그런 이야기를 해 주셨어요.
최: 배우로 처음 데뷔하게 되신 것은 언제죠?
오: 91년에 연극 <따라지의 향연>이라는 작품으로 데뷔했고 그해 가을부터 매스컴에 알려지기 시작했죠. 왜냐하면 대 박정자 선생님과 <엄마는 50에 바다를 발견했다>라는 히트한 작품에 제가 편승을 해서 알려지게 되었죠. 영화는 년도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태백산맥>이였어요.
최: 제가 기억하기로는 <태백산맥>이 첫 영화로 기억하는데 처음 영화에 출연하게 된 계기는요?
오: 그때 <태백산맥>에 있던 스태프인 선배가 지금 <혈의 누>의 감독인 김대승 감독이에요 제가 20살 때 그 선배는 21살 87, 86학번으로 친한 학교 선배 오빠였기 때문에 조감독이나 감독님께 제의를 한 거죠 후배 중에 이런 배우가 있는데 이런 역할의 이미지와 잘 맞는다 말하자면 김대승 감독님이 제 머리를 얹어주신 거죠. 영화판에 머리를 얹어주신 거죠.
최: 아직까지 친하게 지내시죠?
오: 그럼요 제가 한겨레에 쓰는 ‘오지혜 만난 딴따라’ 이번 주에 김대승 감독이에요 다음 주에 나오니까 사보세요.
최: 홈페이지에 연기를 가르치는 게 좋다고 하셨잖아요. 예전에 아버님께서 거의 무상으로 연기 지도를 하는 공간을 마련하셨다고 알고 있는데 함께 하셨나요?
오: 아니요 아버지와는 제가 한 건 전혀 달라요 제가 가르친 것은 완전히 신인들 정말 배우가 되고 싶어 근데 어떻게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하는 친구들을 한 거고 아버지는 이미 배우를 10년 이상하신 분들의 재교육 을 하셨죠. 그리고 아버지는 연기 학원을 하신 게 아니라 그냥 개인 사무실에 삼삼오오 이렇게 모여서 집중적으로 우리말 제대로 하는 것에 대해 사실 우리말을 제대로 하는 배우들이 정말 좀 심각한 현상인데 거의 없어요.
그건 좀 정말 심각해요. 손현주 선배님이 이런 말씀도 하셨었어요. 아버지가 암으로 치료를 하실 때 저러다가 덜컥 돌아가시기라도 하면은 우리나라에서 우리말에 대한 딕션을 제대로 가르치실 분이 누가 남겠는가. 네가 딸로서 책임감 같은걸 느껴야한다. 녹음이라도 해 놔라 기록하고 채록해 놔라 그래서 제가 그랬죠. 제가 어려서부터 듣던 게 바로 그 강의다. 내가 있다 걱정마라 내가 나가서 어디서라도 하겠다. 그랬는데 그게 방법은 똑같이 가르칠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이렇게 새파랗게 젊은 여자가 하는 것 보다 아버지가 하시는 게 흔히 말하는 말빨이 먹히기 때문에 또 다행인 것이 아버지가 너무나 건강하게 잘 활동하고 계시니까. 더 계속 후진 양성을 해 주셔야죠.
오: 다 편하다고 하면 너무 잘난 체 하는 것 같은데 다 재미있고 뭐 박리다매라고 뭐 생활비를 충당해야하기 위해서 이것저것 다 해야 되고 그래도 뭐 일단은 라디오가 재미있고 저는 타고난 천재적인 연기자라기보다는 그냥 문화 지식인으로서의 책임감 같은 게 있어요. 그래서 글 쓰는 일도 라디오에서 떠드는 일도 그냥 제 할 일 중에 하나인거 같아요. 가수 김창완씨도 별거 다하시잖아요. 요즘은 특정한 가수 배우 이런 것을 구별 안하니까요.
최: 라디오를 진행 하시면서 여러분들을 만나시잖아요. 그중에 가장 좋으셨던 분? 아니 가장 존경스런 분은 누구신가요?
오: 그 입장이 오히려 더 편해요 왜냐하면 인터뷰는 하고나면 이렇게 떠들고 나면 참 공허해요 내 영혼을 깎아 먹은 거 같고 쓸데없이 너무 말만 앞섰던 거 같고 내 마음 한구석을 본의 아니게 이렇게 보여준 거 같아서 좀 이렇게 허텃해요. 그래서 이런 말을 홈피에 남겼더니 아는 후배가 이런 말을 해주더라고요. ‘인타(他)뷰 그만하시고 인어뷰(in a viwe) 하시죠.’라고 해서 무릎을 쳤던 기억이 있는데요. 만약 내가 나를 인터뷰 한다면 인타뷰 좀 그만하고 집에서 혼자 인어뷰 좀 해라라고 말하고 싶어요.
최: 자신에게 있어 영화 아니 연기란 어떤 의미이신가요?
연기? 그냥 소통하는 하나의 방법인거 같아요. 글 쓰는 사람은 글로 동시대인과 소통하는 것이고 배우들은 연기로 어...내가 지금 이런 역할을 하면서 이런 고민을 해봤는데 너도 이런 고민하지 라고 해서 이 공동체 사회를 살아가면서 같은 고민꺼리를 보여주는 거 너도 이 고민? 나도 이 고민 이런 것을 방법이 수단이 연기일 뿐이지 모든 사람은 어쨌든 방송 쟁이든 글쟁이든 연극쟁이든 소통하려고 영화하는 사람들도 소통하기 위해서 그 모든 행위를 하는 것이라고 봐요 저는 연기로 학고 있어요.
최: 그나저나 이번에 축하를 드려야 할 일이 있더라고요. 남편이신 이영은 감독님이 입봉을 하셨잖아요. 기분이 어떠셨어요?
오: 입봉 하는 것 자체로 축하받기에는 아직 빠른 것 같은데 영화가 잘돼야 하니까요. 8월에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
최: 보니 이범수씨가 주연인데 감독님 선배인거 같더라고요?
오: 네 중대 연극 영화과 선후배 사이고 저희 신랑이 제 학교 3년 후배에요 그래서 이범수씨가 저한테는 후배고 신랑한테는 선배죠.
최: 다들 무척 친하신 거 같아요.
오: 네. 무척 친해요 저도 신랑 영화에 애정 출연을 잠깐 했는데요. 그 영화에 저희 엄마 아버지 저까지 다 특별 출연을 하는데 홍보팀이 특별 출연에 넣어드릴까요? 우정 출연에 넣어 드릴까요? 그래서 제가 애정 출연으로 해달라고 했더니 정말 그렇게 올라간대요. 애정 출연으로 크래딧에 올라간대요.
최: 따님도 출연을 하면 좋았을 텐데요.
오: 아쉽게도 역할이 없었어요.
최: 감독님이 입봉을 하게 되었을 때 기분은 어떠셨나요?
오: 말로 형용할 수가 없었어요. 평생을 비우 딸로 배우로 그리고 전에 남자 친구들도 다 배우였는데 난생 처음으로 스태프하고 결혼해서 사니까 우리 배우들은 이차 생산을 하는 사람들이잖아요 근데 스태프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잖아요. 그게 사람 잡는 일이더구먼요. 아주 그냥 복창 터져 죽는 줄 알았고 시나리오 하나 쓰는데 2년이 걸리니까 제가 그랬어요. 이건 직업이 아니다 이건 정말 도 닦는 일이라고 했었어요.
첫날 첫 촬영에 제 분량이라서 현장에 나갔는데 다들 쑥스럽게 감독 사모님처럼 대접을 해서 제가 절대 그렇게 표현하고 그렇게 부르지 마라 나는 그냥 당신들의 선배면 선배지 이거 영 어색하다고 했고 그러나 내 마음 속으로는 너무나 감독 부인으로서의 마음이 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권위적인 그런 거 말고 왜 그런 거 있잖아요. 하나하나가 너무 고맙고 모든 파트의 막내 까지도 우리와 인연을 매져 준 모든 게 너무 고맙고 연기를 위해 애써주는 배우들도 너무 고맙고 아주 막 고마운 것뿐이더라고요.
그리고 지금부터 저는 피가 마르고 있어요. 이제 다 끝나가거든요 촬영이 이게 보통일이 아니구나. 그래서 <안녕, 형아>개봉할 때 제작사의 대표인 심보경씨가 입술이 터지셨더라고요 그리고 한 3일 밤은 샌 모양으로 오셔서 제가 아니 이미 끝났는데 그리고 영화 혼자 찍으셨냐고 그렇게 농담을 했지만 이제는 그 심정을 알겠더라고요
오: 그래서 제가 ‘이거 누구야’라고 신랑에게 말을 했더니 신랑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라고 우기더라고요 근데 제가 보기에는 영락없이 조는 거였거든요 그것도 첫날 이였거든요. 누군지 밝혀내야 돼...농담이에요.
최: 따님이 무척 예쁘잖아요.
오: 따님이 있으시니 아시겠지만 딸들은 다 예뻐요
최: 물론 그건 인정 합니다만 따님인 수린이가 할아버지 할머니가 유명한 연기자이시고 엄마도 그렇고 아빠도 감독님이신데 당연히 연기에 관심이 많을 것 같거든요 아이가 원한다면 연기를 가르칠 생각이 있으신가요?
오: 뭘 시켜요. 자기가 하고 싶으면 하는 거죠. 그런 전근대적인 발언이 어디 있어요. 시키는 게 세상에 어디 있어요. 세상은 다 하고 싶은 거 하는 거죠. 절대로 안 된다는 소리를 안 키로 한 것이 저희 부부의 교육 철학이에요. 신랑은 벌써 그런 얘기를 해요 아직 꼬마지만 세월은 금방 가잖아요. 신창원 같은 전 국민이 모두 실어하는 남자를 결혼한다고 데리고 와도 무조건 OK 내일 바로 죽게 되는 죽어가는 병자를 데리고 와도 무조건 ok 딸이 결정한 것은 무조건 그걸로 ok 왜냐하면 딸이 그만큼 고민하고 걱정 했을 거 아니냐. 그럼 됐다는 거죠. 그만큼 자식을 믿지 못하는 부모만큼 우스운 거 없다고 무조건 믿어주는 그런 부모가 되자고 신랑이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알았다고 했죠.
최: 전근대적 발언이라고 하셨지만 아직까지 대부분의 부모님들이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잖아요.
오: 모르겠어요. 제가 무슨 딴따라들만 만나서 그런지 제 주위에는 문화 예술인 딴따라들만 있어서 그런지 저처럼 생각하는 사람들 꽤 많이 봤어요.
최: 마지막으로 무비스트 회원분들에게 인사말 좀 부탁드립니다.
오: 무비스트 회원분들이라면 영화를 사랑하는 분들이겠죠. 한국영화 많이 사랑해 주시고요 특히 <안녕, 형아>많이 봐주시고 8월에 개봉하는 <이대로, 죽을 순 없다>도 많이 봐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취재: 최동규 기자
촬영: 권영탕
사진: 이한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