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는 기다림의 연속
이엘의 이름을 알리게 된 작품은 <황해>다. 극중 태원의 내연녀인 주영 역을 맡은 그는 몇 장면에 등장하지만, 관객의 뇌리에 남을 만한 인상을 남겨준다. 낮고 건조한 보이스 톤과 차가운 기운이 맴도는 표정,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묘한 분위기는 영화의 긴장감을 높였다. <황해>의 나홍진 감독은 관객과 평단으로부터 사랑 받은 <추격자>를 통해, 배우들 사이에서 함께 작업하고 싶은 연출자로 손꼽힌다. 하지만 남성 위주의 작품이 대부분이다 보니, 여배우로는 더욱 그의 영화에 출연하는 게 쉽지 않다. 그럼 이엘이 <황해>에 어떻게 출연했을까? “처음부터 나홍진 감독님을 만난건 아니다. 영화 관계자와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 몇 장 찍은 게 다다.” 이후 한 달이 지나도록 캐스팅 소식이 없자 그는 포기했다. 그러던 중 제작사에서 기다리던 연락이 왔고, 드디어 나홍진 감독을 만났다. “사실 감독님을 처음 본거라서 많이 긴장했고, 무조건 열심히 하겠다는 말을 한 것 밖에 생각이 안 난다.” 그렇게 이엘은 나홍진 감독이 선장인 <황해>라는 배에 승선했다.
일단 배에 타는데 성공했지만, 한없이 기뻐할 일만은 아니었다. 문제는 극중 태원과의 베드신. 시나리오를 통해 미리 알고 있었지만, 첫 촬영부터 베드신이라는 게 부담이었다. “순간 멍 해졌다. 다른 스태프들과 친해지고, 영화에 좀 적응된 후에 베드신을 찍고 싶었는데 생각할 겨를 없이 곧바로 진행됐다.” 여기에 사실감을 중시하는 나홍진 감독의 고집 때문에 장시간 베드신 촬영이 이어졌다. 상대배우인 조성하와의 교감 없이 보였던 몸짓과 표정이 감독의 마음에 안 들었던 것. 하지만 더 힘들었던 건 몸매 관리였다. “워낙 감독님이 디테일한 걸 추구하는 성향이라서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하지만 영화에 아름답게 나오고 싶은 게 여배우의 마음 아닌가. 감독님 몰래 운동하면서 자연스러운 몸매를 유지하는 게 무엇보다도 힘들었다.” 또한 주영이란 인물을 좀 더 잘 표현하기 위해 나름대로 인물 분석까지 하는 등 말 그대로 열심히 했다.
이렇게 많은 노력을 기울인 영화였지만, <황해>는 10개월간의 긴 촬영기간과 후반작업으로 인해 예정보다 두 달 늦은 12월 22일에 개봉했다. 작년 7월에 촬영을 끝낸 이엘은 개봉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크리스마스 때 개봉한다고 하기에 처음에는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기다렸는데, 막상 개봉이 다가오니까 엄마한테 성적표 보여주는 것처럼 불안했다.” 영화가 극장에 상영되자마자 후련함을 느낀 그는,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걸맞지 않은 영화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관람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꼈다.
얼굴에 이야기가 있는 배우
이엘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소녀였다. 미술을 전공한 아버지의 영향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패션쇼인 프레타포르테(고급 기성복을 선보이는 세계적인 패션쇼)에 참가하는 게, 장래희망이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던 그가 미술이 아닌 연기로 진로를 바꾼 건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때 미술을 계속했는데 한계가 왔다. 그 때 아버지와 함께 즐겨 본 영화에 호기심이 생겼고, 연기를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엘은 단순히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각종 연기학원을 다녔고, 대학도 연극영화과로 진학했다.
어느 날 그는 학교 선배 공연을 도와주던 중, 뮤지컬 <그리스>를 준비하고 있었던 이진아 감독의 눈에 띄어 뮤지컬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다른 배우들 보다 연기를 잘하지도, 노래를 잘 부르지도, 춤을 잘 추지도 못했지만, 남들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 열심히 연습했다. 그러다보니, 또 한 번의 기회가 찾아왔다. “그 당시 청소년 뮤지컬을 준비하고 있었던 이윤택 선생님이 내가 연기한 걸 보고 기회를 주셨다.” 좋은 선생님들이 준 기회를 살린 이엘은 점점 연기에 대한 재미를 느꼈고, 꾸준히 무대에 서면서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실전 연기를 몸으로 익혔다.
무대에서 경력을 쌓은 이엘은 드라마 <잘했군 잘했어>에 출연했고, 이어 차승원 주연의 <시크릿>에서 부검의 영숙 역을 맡았다. 영화에서 몇 장면 나오지는 않지만, 맹하면서도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영숙이란 인물을 잘 표현했다. “<시크릿> 때 바퀴벌레 나오는 장면을 보고 감독님이 연기 준비를 잘 해왔다고 칭찬해줬다.” 그런데 칭찬했던 연기는 연습의 과정을 통해 나온 게 아니었다. 그냥 바퀴벌레를 혐오하는 실제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 것뿐이었다. 그는 이때 자신의 모습을 연기에 담아야 좋은 연기가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제 두 편의 영화에 출연한 그는 연기에 대한 욕심이 가득하다. 하지만 아직 많이 부족하다. “필모그래피가 쌓여갈수록 연기적으로 보여줘야 하는 게 많다 보니까, 어려움이 많다.” 그래서 이엘은 영화도 많이 보고, 책도 많이 읽으면서 공부를 부단히 하는 중이다. 또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뭔가를 배우려고 한다. 얼굴에 “이야기가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처럼 앞으로 그의 연기를 기대해 본다.
2011년 2월 1일 화요일 |
글_김한규 기자(무비스트)
2011년 2월 1일 화요일 |
사진_권영탕 기자(무비스트)
장소 협찬_studio 齊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