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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덤] 브루스 윌리스, ‘난닝구’ 휘날리며~
2005년 3월 25일 금요일 | 최경희 객원기자 이메일


‘브루스 윌리스’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대부분 ‘실베스타 스탤론’, ‘아놀드 슈왈츠제너거’를 끌어들여 ‘비교’ 설명한다. 이유는 브루스 윌리스가 이들과는 전혀 다른 노선에서 액션배우로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근육질의 스펙터클한 액션을 펼치던 람보, 터미네이터와는 달리 브루스 윌리스는 오기에 가득 차 “죽기 살기”로 달려드는 인상이 더 강했다. 애초부터 강했던 것이 아니라 상황이 그를 극단으로 내몰면서 인간 본성의 동물적 끈기와 잔혹함을 깨우는 꼴이다. 그래서 그의 액션은 경외와 감탄으로 점철되지 않고 “나라도 저 상황에서는 저랬을 거야”하는 타당성을 얻으면서 걱정과 놀람으로 가득 찬다.

통념을 배반한 액션스타

그래봤자 할리우드 액션영화인데 하면서 ‘브루스 윌리스’표 영화를 계보학의 연장선상에 올려놓는다면 당신은 실수하고 있는 거다. 그는 한 번도 영화 안에서 예견된 혹은, 태생적인 영웅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세상 시니컬하게 살고 싶은 한량이 어느 날, 누군가가 자신의 존재를 유일하게 증명해주던 ‘가족’을 사지로 내몰았을 때, 영웅이 아닌 ‘독종’으로 변신했을 뿐이다. 1988년 <다이하드>로 우리에게 말 그대로 혜성처럼 나타난 그에게 우리는 관대했다. 도시 하나 전체를 기어코 엉망으로 만들어 놔야지 직성이 풀리는 다른 미국식 영웅보다 꼬질꼬질한 난닝구에 맨발 차림으로 깨진 유리 조각을 밟으면서 고통을 참지 못해 일그러지는 그의 얼굴에서 평범한 소시민의 울분을 느꼈다고 하면 오바일까?

실베스타 스텔론이 베트남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아돌드 슈왈츠제너거가 LA를 파괴하던 순간에도 영화이기에 가능한 상상력이라고 여기며 즐기던 그 감정과는 달리 존 맥클레인 형사의 건물에 갇힌 액션은 안쓰러워 도와주고 싶은 심정마저 들게 했다. 고통과 눈물 그리고 인생 막장의 오기로 브루스 윌리스는 자신에게 할당 된 캐릭터를 연기해, 영웅의 이미지를 얻게 된다.

그러나 브루스 윌리스의 ‘영웅성’은 위기와 사건이 끝나면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가는 일시적인 영웅이다. 즉, 내재 된 영웅성의 발견이 아니라 여건에 따라 모습을 달리하는 보통의 우리처럼 영화 속 브루스 윌리스가 연기한 캐릭터는 세상이 그를 가만히 안두기에 분노를 폭발하는 인물이 어쩌다 사회에 이익이 되는, 그러다 장님 문고리 잡기식의 영웅이 돼버린다. 영화가 끝나도, 영화 속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타 배우들의 영웅 이미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최근에 개봉한 <호스티지>는 브루스 윌리스가 미국 액션영화 시장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연기한 캐릭터를 다 합친 듯한, 주인공 ‘제프 텔리’(브루스 윌리스)는 인질 사건이 터졌을 경우 협상을 전문으로 하는 ‘네고시에이터’다.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위험 속에 노출시키는 그의 활약상은 자발성을 띠고 있다. 초반의 드리우는 캐릭터의 성격은 익히 보아오던 보편적 영웅의 자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죽은 아이를 부여잡고 통곡하는 장면에 이르면 ‘역시나’ 그는 전혀 다른 노선에서 제프 텔리를 이해하고 접근함을 알 수 있다. 나약함과 자책감에 시달리는 그의 얼굴에서 누군가의 얼굴이 슬쩍 엿보인다. 권자의 자리에서 한 순간에 추락하는 우리들의 아버지, 브루스 윌리스는 그것을 모방한다. ‘모방’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사실 그의 연기력이 딱히 뛰어나다고는 말할 수 없는 필자의 양심 때문이다.

영화상에서 제프 텔리와 같은 상황에 처한 캐릭터는 많았다. 하지만 그들은 즉각적인 분노를 피하고 한 템포 쉬었다가 서서히 액션으로 감정을 대처한다. 브루스 윌리스에겐 그게 가능하지 않는 감정의 배반선이다. 때문에 그의 액션은 블록버스터라는 외피를 빌려 스펙터클하게 스크린 안에서 널뛰기 하지 않는다. 그의 액션은 사명감, 책임감을 원동력으로 삼지 않고 분노를 장착해 마력을 발휘한다. 극단의 상황까지 치닫게 만드는 감정의 솔직함은 영웅의 도덕성을 벗어나 있다. 자기억제의 실패, 결국 그래서 스스로 독종이 되어 ‘응징’의 총부리를 휘두르기에 그는 반-영웅도 될 수 없다. 없는 자의 ‘반란’, 그것의 다름 아니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우리와 똑같은 소시민일 그가 왜 악을 향해 17대 1식의 무모한 사투를 벌이는 건지 우린 우연처럼 겹쳐진 ‘가족’이라는 뫼비우스의 띠를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확인할 수 있다.

넌 영웅! 난 독종?....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이렇게도 많았나? 그의 이력서에는 예술영화와 천박한 싸구려 액션영화까지 다양하게 포진되어 있다. 오호~ 거기다 새끈한 고품격 에로영화도 있다. 지난날을 더듬어 추억해 보니 그에게 필자는 성적 매력을 느껴본 적이 별로 없다. 아마 대부분의 여성들이 필자와 마찬가지 일거다. 아마도 이런 연유로 <컬러 오브 나이트>가 실패했을 거다. 그를 비하하려는 말이 아니라, 위기로부터 익명의 대중을 구출해주는 영화 속 영웅에게 우린 은근히 성적인 호기심을, 보통은 가졌기 때문이다. 하물며, 어떠한 경우에도 결코 찢어지지 않는 헐크의 고탄력 바지마저 우리의 음흉한 환상을 자극하지 않았냐 말이다.

그러나 그의 이름을 우리에게 알린 <다이하드>에서 그는 시종일관 더러븐~ 난닝구 차림으로 악당에게 억류되어 있는 자기 마누라 구한다고 길길이 날뛰었다. 그 인상이 강해서 일까? 아니면 출세작에서부터 유부남 캐릭터를 연기해 암묵적 열외의 대상이 되어서 그런지 모를 일이지만 ‘숀 코네리’같은 할아버지에게도 우린 섹시함을 감지하는데 이 사내에게 불타는 성적 욕망을 느끼기란 참으로 버겁다.

<마지막 보이스카웃>, <아마겟돈>에서 브루스 윌리스는 ‘절박한’ 액션을 선보이는데, 무능한 남편이자 아버지라는 멍에를 벗어 던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족에게 무언가를 해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기 때문이다. 이 절박함이 그를 죽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무작정 위험 속에 뛰어들게 만들어 무모한 독종으로 탈바꿈시킨다. 죽기로 결심한자, 무서울 것이 뭐 있겠는가. 그래서 결국 해피엔딩을 꿈꾸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 안에서 드물게도 그는 죽기까지 했다. (액션영화는 아니지만 <식스센스>는 그래서 그의 영화중에서 독보적인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다)

보통의 액션스타에게 발견하는 육체적 매력을 브루스 윌리스에게 찾지 못하는 이유는 그의 액션은 육체에서 나오지 않아서다. 가족을 지켜야 하는 무능한 가장에 삶의 찌듦과 피곤함이 그의 비웃는 형상의 입 꼬리를 실쭉거리게 만들어서다.

우린 그래서 그의 수난사가 해피하게 끝날 줄 알면서도 질리지 않고 용기충천이 아닌, 오기충천의 브루스 윌리스의 유아독존식의 액션에 열광한다. 때 돈 벌 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수많은 작품을 찍어댄 ‘브루스 윌리스’표 영화는 언제나 거기서 거기더라도 실베스타 스텔론의 액션영화는 안 궁금해도 그의 영화는 땡긴다. 전쟁영웅, 희대의 킬러, 지적인 정신과 의사로 그가 종횡무진 변신하더라도 그에게 남은 건 ‘울분’을 담고 있는 ‘몸뚱이’임을 잘 알고 있다.

TV시리즈 <블루문 특급>(1985년 작)에서 괄괄한 여자 매디(시빌 셰퍼드)를 상대로 입씨름이나 해대는 브루스 윌리스(데이빗 역)를 보고 그가 20년 가까이 할리우드 액션스타로 건재할거라,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의외성의 매력이라 치부해도 기이한 현상이라 할만하다. 가장 잘 어울리는 옷차림이 난닝구인 대머리 아저씨에게서 이 시대 ‘독종’의 화려한 성공을 보았기에 미제 표의 거북함이 아닌 현실적인 영웅의 그림자를 우린 즐긴다.

추억의 영웅 코난과 람보가 기억 저 편으로 날아가는 동안 그는 여전히 냉철한 이성을 뒤로하고 피 끊는 억울함을 풀기 위해, 오십이 넘은 육신을 총구 앞에 당당히 내던진다.

11 )
dlcoqkf
위 필자가 이 리플들을 본다면 필자에게 한마디 해주고 싶다.
단지 영화일 뿐이다. 비관적인 시점보다 낙관점시점에 대해서도 몇마디 써놓았 다면 정말 멋진글이 돼었쓸것이다.
  
2005-03-27 12:32
jillzzang
oshzero님 말의 동의!   
2005-03-27 10:49
oshzero
브루스가 아놀드나 실버스탈 보다 뛰어난점은 가장 인간적이기때문이다   
2005-03-27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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