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나라한 성기 노출로 숱한 화제를 낳고 있는 <몽상가들>을 필름의 훼손 없이 무삭제로 만나게 됐다. 간만에 등급위원회가 살맛나는 결정을 내렸다 볼 수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즉각적으로 사고하게 된다.
“음.......얼마나 뇌쇄적이고 야할지 그리고 도발적일지 무지하게 기대되는군.”
허나, 실오라기 걸치지 않은 육체의 전시의 이면에 감독이 전해주고자 하는 강고한 메시지가 있음을 관객은 깨달아야 한다..........고 이 같은 범주에 놓인 영화들은 말한다. 그러니까 급진적인 성을 정치와 미학 등 여러 지형 안에서 다루는 당 영화의 감독인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와 같은 거장의 작품은, 보이는 것 혹은 홍보하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영화에 자리하고 있음을 평단은 독야청청, 관객은 어쩔 수 없이 투덜거리면서도 강박적으로 인지하기에 이른다. 뭐, 그 말이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지만......
그런데 이번엔 그렇지 않음이다. 베르토룰치의 <몽상가들>, 저마다의 개인차에 따라 느끼는 단상은 다르겠지만 당 영화의 가공할 만한 매혹은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싱그러우면서도 폭발할 거 같은 이자벨(에바 그린) 테오(루이스 가렐) 매튜(마이클 피트)의 육체에 오롯이 꽂혀있다. 그네들의 살결이 요동치며 스크린 밖으로 내뿜는 에너지는 노장의 작품 속에 관장돼 있는 이런저런 꺼리들을 잠재운다.
68.5월 혁명에 불을 지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설립자 앙리 랑글루아의 부당해고 사건이 일어났던 2월로 영화의 시계를 돌린 베르톨루치 감독은, 시네필 세 남녀의 아찔한 유희로 충만한 한달여의 동거생활을 통해 영화사의 숱한 고전들을 불러들이며 지독한 영화광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한때 고다르를 경외하며 마르크시스트를 자처했던 사상가답게 영화에는 68혁명에 대한 회고담 또한 나지막이 자리한다. 하지만 젊은 시절 걷잡을 수 없는 열망을 품은 채 치열하게 부딪혀야만 했던 기성세대를 거스르는 혁명을 <몽상가>는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고 배경화 시킨다.
그러니까, 영화사의 길이 남을 장면을 끊임없이 소환해내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하며, 들끓는 기운으로 가득 찼던 그 시절의 열정을 찰나 강렬하게 펼쳐 보여주기는 하지만 이는 노인네가 자신의 청춘과 지적으로 파산당한 그 시대의 세대를 돌아보는 수준이지 그 이상의 울림은 주지 않는다. 결국,
당 영화의 요체는 앞썰했듯 두 프랑스 쌍둥이 남매와 미국 청년이 서로를 탐닉하며 밤낮으로 일삼는 격렬한 몸의 향연에 있다. 그런 만큼
“그래도 이건 좀 너무 한 거 아닌가? 너무 낯설고 과도하자나...”
요런 말씀 자제해주시고, 가식과 내숭을 분연히 떨쳐 버린 채 거침없이 스크린을 도발하며 유영하는 젊은 것들의 한없이 아름다운 당찬 몸놀림의 황홀경과 그 지극한 생동감을 적극 교감하며 만끽하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