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그리지는 않았지만 만화의 캐릭터를 만들고 스토리를 구성한 사람은 그 만화의 '작가'다. 최소한 마블코믹스에서 스탠 리(Stan Lee)는 [엑스맨], [헐크], [데어데블], [스파이더맨]의 작가였다. 영화의 제작과정과 각색과정에도 깊게 관여한 스탠 리의 모습은 그의 가면 쓴 영웅(혹은 골격과 혈색이 달라 가면 쓴 것과 다름없는) 시리즈가 영화가 될 때마다 찾아볼 수 있었다.
마치 히치콕이나 샤말란처럼 흰 수염에 검은 선글라스를 쓴 노신사 스탠 리는 자신의 가면 영웅과 함께 까메오로 필름을 활보했다. 그래서일까, 같은 마블코믹스를 원작으로 했어도 가면을 쓰지 않은 영웅은 무언가 달랐다. 풍채 좋은 할아버지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만큼 마블의 제작 입김에서 조금 멀리 달아난 가면 없는 영웅들은 음울하고 잔혹한 방법으로 필름에 찾아왔다.
공명정대란 절대 쉬운 마음가짐이 아니다. 쉽지 않으니 영웅의 조건이겠지만. 본능만이 폭주하는 정신세계에서 인성을 찾는 의지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헐크]는 영웅이 될 수 있었고, 할아버지의 죽음에서 복수가 아닌 사회에 대한 책임을 통감했기 때문에 [스파이더맨]이 영웅이 될 수 있었다. 아버지에 대한 복수에서 자유롭지 못 한 [데어데블]과 할아버지의 죽음에서 자유롭지 못 한 [스파이더맨]의 고뇌는 영웅에게 인간적인 감정이 있음을 증명하는 조건일 뿐, 영웅을 움직이는 근본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스탠 리의 세계관이 정점에 접근한 [엑스맨]에 이르면, 인간에 대한 복수심에서 분노를 키운 돌연변이는 악당이 되고 반대로 복수심을 뛰어넘어 공명정대한 인본주의에 도달하면 [엑스맨], 영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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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영웅을 창조하고 싶었던 웨슬리 스나입스의 인종적 욕심이 마블코믹스의 조연급 캐릭터를 독립시켜 구체화된 [블레이드]는 전형적인 마블 영웅이 아니었다. 흡혈귀에게 물린 산모에게서 태어나 흡혈귀와 인간이 반씩 섞인 '데이워커'는 자신의 운명과 어머니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흡혈귀를 처단한다.(어머니의 허상에 꼼짝 못하는 [블레이드] 첫 번째 편을 보면 분명하다) 블레이드의 잔혹한 칼부림은 흡혈귀의 적인 인간의 이익과 맞아 떨어져 영웅적 행위로 돌변한다. 적의 적은 내 편, 블레이드는 흡혈귀도 인간도 될 수 없지만 인간의 편이 되었다. 그리고 블레이드는 가면을 쓰고 있지 않다.
복수 : 가면 뒤의 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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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이 없다는 것은 영웅에게 초인적인 힘을 부여한 세계에 개인적인 악감정을 숨기지 않겠다는 뜻이다. 특히나 DC코믹스의 슈퍼맨 같은 이에 비해 소박하기 짝이 없는 이유로 영웅이 된 마블의 캐릭터에게 복수의 적개심은 초인적인 힘의 원천이기 쉽다. 자신에게 말을 거는 누구에게도 다정하지 않고 주위 사람을 신경 쓰지도 않는 블레이드는 태생적인 적개심으로 흡혈귀를 난도질 한다. 블레이드에게 초인적인 힘을 주는 것은 인간이 되지 못하는 태생적 한계에 대한 보복 심리다. 만인에 대해 으르렁거리고 있는 블레이드는 복수의 심리를 숨기지 않는다.
마피아에게 가족을 잃어버린 프랭크 캐슬은 만인에 대한 인간애 따위는 갖기도 버거운 운명이다. 마피아 졸개 하나를 해결하는데 온 힘을 다해야하는 그에게 다른 사람까지 신경 쓰라는 것은 사치에 가깝다. 그래서 프랭크 캐슬은 눈앞에서 가족을 잃어버린 자신의 복수에 최대한의 의미를 부여한다. 그가 행하는 복수는 앙갚음vengeance이 아니라 응징punishment이다. 그래서 프랭크 캐슬은 [퍼니셔(응징자)The Punisher]가 된다.
"앙갚음 때문이 아냐, 응징하는 거야.It's not vengeance, no. not vengeance. It's punish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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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돌프 룬드그렌 주연으로 영화화된 적이 있는 [퍼니셔The Punisher (1989)]는 오히려 타고난 초인이었다. 돌프 룬드그렌은 [록키4]시절부터 인간이라기보다는 기계에 가까운 초인이었으니까. 원작만화나 일본 캡콤에 의해 게임화된 [퍼니셔]도 영화판보다는 초인적인 근육과 초인적인 인상을 가지고 있다. 물론 [퍼니셔]에게 가장 초인적인 것은 심각한 얼굴에 걸치고 있는 해골무늬 타이즈의 초인적인 복장도착 패션센스지만.
운명 : 가면 속의 신화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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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신화의 영웅은 가면을 쓰고 있지 않았다. 근대물 [조로]정도에 이르러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가면을 통해 영웅이 된다. 타고난 영웅이었던 길가메쉬나 헤라클레스처럼 가면을 쓴 순간, 어머니의 배에서 나온 사람은 일상에서 벗어난 초인이 된다. 가면의 신화적인 성격을 극단적으로 패러디한 [마스크]는 단순히 가면을 '쓰는' 것만으로 초인적인 인물이 된다. 심지어는 애완견까지. 여기서 가면은 초인의 신화를 순식간에 만들어 낸다. 하지만 극단적인 패러디를 배제하면 일상 생활에서 운명을 만난 영웅은 자신의 능력을 깨닫는다. 순간 영웅은 운명적으로 신화화 되어 탁월한 능력을 휘두른다.
영웅을 각성시키는 사건은 일반인에게도 커다란 충격이 될 만큼 획기적인 일이어야 한다. 신화는 쉽사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외계에서 떨어져 타고난 영웅이었던 [슈퍼맨]은 반대의 방법으로 일상인이 된다. 마스크를 쓸 필요 없이 처음부터 각성한 영웅은 안경을 마스크 대용으로 얼굴에 착용하며 일상 생활로 들어간다. 그런 사건이 아니라면 부모의 죽음이 박쥐가면의 영웅을 만들고 거미두건의 영웅을 만드는 신화가 벌어진다. 가면을 쓰지 않은 영웅이라도 가족과 어머니의 죽음이 [퍼니셔]와 [블레이드]를 만든 것은 분명하다.
악당 : 가면의 반대편
슈퍼히어로 만화광 나이트 샤말란은 영웅의 타고난 운명에 주목한다. 계기가 없었다면 그대로 잊혀졌을지도 모르는 영웅의 능력은 운명적인 사건의 충격을 통해 드러난다. 운명적인 사건은 일견 우연이지만, 실제로는 운명을 부르기 위해 예정된 또 다른 존재의 짝패 때문이다. 이렇게 영웅을 각성시킬 운명을 타고난 반대 운명의 소유자, 반영웅을 슈퍼 히어로 물은 '악당'이라고 부른다.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악당은 슈퍼 히어로 물에서 영웅을 깨워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 되기 위해 존재한다. 이야기 속에서라면 영웅과 악당은 서로 동전의 양면인 셈이다. 함께 존재할 수밖에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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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서 영웅의 능력을 각성시키는 인물은 정반대의 체질을 가지고 있던 엘리야 프라이스(사무엘 잭슨). 넘어지기만 해도 뼈가 산산 조각나는 특이한 체질의 엘리야는 자신이 존재한다면 정반대의 체질도 존재할 것이라고 추리한다. 슈퍼히어로 만화를 수집하며 존재 의미를 탐구한 엘리야는 정반대 [언브레이커블]은 영웅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그를 찾기 위해 공공 교통수단을 폭파시켜 버린다. 반대 운명을 갖는 영웅을 찾기 위해 스스로 악당이 되어버린 가면을 쓰지 않은 반영웅.
고등학생 그레첸은 새로 사귄 남자친구의 이름을 듣고는 웃는다. "꼭 슈퍼 히어로 같은 이름이네." 지구멸망의 환각에 시달리고 있는 [도니다코Donnie Darko(2001)]는 유일한 위안이 되어 준 그레첸의 말을 흘러 넘기지만, 도니의 예견대로 28일후 세상은 멸망한다. 지구는 이상이 없을지 몰라도 도니의 모든 것, 그레첸은 교통사고로 죽기 때문이다. 그레첸을 치어 죽인 자동차 운전자가 놀라서 뛰쳐나온다. 그는 28일 동안 도니의 꿈속에 나타나던 기괴한 모습의 토끼, 프랭크.
토끼를 권총으로 쏘아 죽인 도니 다코는 각성한다. 28일 전으로 시간은 되돌아간다. 슈퍼맨처럼 시간을 되돌리며 도니 다코는 정말 슈퍼히어로가 된다. 그리고 28일전 비행기 엔진이 도니의 다락방에 추락할 때 이상하게 그 자리에 없었던 도니 다코는, 당연히 자신의 침대에 있다가 죽음을 맞는다. 프랭크가 없어져 악당이 없는 바로 그 시점에. 복수와 가면이 없이 악당과의 쌍방향 운명뿐이었던 슈퍼히어로는 그렇게 존재의 종말을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