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일단 우리가 가장 궁금한 건 가공할 만한 떼돈을 들이 부은 이 영화가 과연 돈 값을 하는 거냐 일게다.
답은 이거다. 천만다행이도 <태극기 휘날리며>, 돈 엄한 데 휘날린 영화는 아니라는 사실. 할리우드 산 여느 전쟁 영화 못지않게 그 리얼한 화면의 때깔이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쌍수를 들고 박수를 쳐주고 싶을 만큼 실로 대단했다. 보는 내가 광포한 지옥도의 전장에 내쳐진 게 아닌가 싶은 극도의 불안감이 번번이 엄습했으니까....
핸드 헬드와 비스무리한 ‘이미지 쉐이크’를 이용한 심한 흔들림의 프레임 안에 담은 근거리에서 포착한 사지의 나가떨어짐, 그리고 화면을 뒤덮는 파편들과 그럴싸한 CG, 50년대를 온전하게 재현해낸 갖가지 세트와 소품들은 감탄이 절로 나오게끔 하기에 충분하다.
이처럼 전쟁 스펙터클 신이 압권이라면 이쯤에서 또 우리는 질문하게 한다. “그럼 이야기는 어때, 잘 풀어냈어?”
총 러닝 타임 145분 동안 최소 두어 번 정도는 관객들이 감동의 넘실거림에 훌쩍거리지 않을까 싶다. 신산한 삶을 가족애로 이겨나가는 진태(장동건), 진석(원빈) 형제가 6.25사변으로 인해 강제 징집되자 오로지 동생만은 생명을 부지한 채 어머니 곁으로 돌아가게 해야 한다는 광기어린 집념의 진태, 그리고 무공훈장을 타면 동생을 무사 제대시켜주겠다는 어리석은 협상에 사로잡혀 물불 안 가리고 적진을 향해 몸을 던지는 형을 보면서 괴로워하며 온 몸으로 말리며 저항하는 진석. 골육상잔의 비극이 배태한 두 형제의 가슴 저미는 갈등은 우리의 마음 안에서 공명하며 깊고 넓게 자리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영화를 보고 난 후 뭔가 허전하고 밋밋하다는 느낌이 밀려드는 이 찝집한 시츄에이션은 뭐란 말인가? 우선 당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가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여러 가지로 유사하다는 점이 원인일 수도 있다. D일보의 기자말대로 ‘원빈 일병 구하기’라는 말이 무작정 우스개 소리로 들리지 않으니까 말이다. 허나, 이것보다 더 필자의 심정을 공허하게 한 동인은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에 있다. 뭐, 대략 이런 식이다.
동생을 위해 무모하게 전투에 임하는 진태의 용감무쌍한 전투신 그리고 끝난 후
“형 왜 이래! 이러지마!”
“너만은 꼭 무사히 어머니 곁으로 돌아가야해!”
그럼에도 또 동생을 위해 무모하게 전투에 임하는 진태의 용감무쌍한 전투신 그리고 끝난 후
“형 정말 계속 이럴래! 이러지마!”
“너만은 어떻겠어든 어머니 곁으로 가야한다니까!”
또한 감독은 전쟁의 참상을 알리고 싶었다지만 왠지 유보된 느낌이다. 켄 로치 감독의 <랜드 앤 프리덤>처럼 카메라가 종군 기자의 눈과 동일한 선상에서 피사체들을 바라보는 다큐적인 연출 작법까지는 아니더라도 피난민을 향한 사실적인 카메라의 시선이 좀더 필요했다. CG를 이용해 거대하게 부풀린 피난 행렬과 증기 기관차에 몸을 맡긴 그네들을 보자면 스펙터클한 화면엔 일조할지언정 보는 이의 심장에 전쟁의 재앙을 전해주지는 못한다. 고로, 두 형제에게만 너무나도 많은 것을 짊어지게 하기엔 장면 장면이 씨줄날줄처럼 치밀하게 짜임새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적잖이 아쉬움을 토로했지만, <태극기 휘날리며>가 한국영화의 기술은 물론이고 소재 등 다양한 부분에 걸쳐 진일보 시켰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특히나, 모르면서 속고 알면서도 속은 종래의 국산 블록버스터라 명명된 영화와 비교하자면 더더욱 강제규 감독의 무모한 야심찬 도전은 우위를 점하며 성공을 거둘 확률이 높다.
*한가지 덧붙여
<태극기 휘날리며>가 6.25전쟁을 소재로 다루었기에 우리 만이 해낼 수 있는 참신한 한국 영화라고 하는 혹자도 있었다만, 영화의 골격은 할리우드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쉬리>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때문에 ‘한국’전쟁보다는 한국‘전쟁’을 소재로 ‘가공’의 두 인물의 비극을 테마로 삼은 영화라 보는 것이 옳다. 그렇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전쟁의 참혹함보다는 형제의 가슴 절절한 줄거리만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