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절대반지마저? 창대했던 시작에 비해 끝은 어쩔 수 없이 미미했던 <매트릭스> 삼부작을 비롯, 거대예산 시리즈의 대단원에 실망을 금치 못했던 관객들은 그러나 이번만은 안심해도 좋을 것 같다. 물론 영문학의 고전이자 판타지 소설의 가장 위대한 범례로 통하는 톨킨의 소설이라는 원작이 엄연히 도사리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식의 비교는 상당히 불공평한 것이 될 수도 있을 것. 그러나 <반지의 제왕 3: 왕의 귀환>이 칭찬 받아야 하는 이유는, (원작으로부터 온) 스토리의 매끈함이나 몇 배 웅장해진 스케일 때문이 아니라 그 신실함에 있다. 중간계의 운명을 건 전투에 빠져들 듯 동참했던 관객들의 마음이 3편을 통해 충실히 보상받는 탓이다.
어느 날 갑자기 손에 들어와 운명을 바꾸어 버린 금빛 반지. 그 낯설고 거대한 존재가 스쳐지나간 후 프로도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존재일 수 없듯, <반지...>의 열광적인 팬들에게는 영화가 바로 절대반지다. 대단원을 맞아 클라이막스로 치달은 모험에 대한 기대와 몰두해 있던 어떤 것이 사라지고 난 후 엄습하는 허탈함을 3편은 동시에 이해하고 또 어루만진다. <반지의 제왕 3: 왕의 귀환>을 좋은 완결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사우론의 군대는 인간을 절멸하기 위해 중간계 최후의 보루인 곤도르 왕국 미나스 티리스로 진격하고, 원정대는 프로도가 반지를 파괴하는 임무를 달성할 수 있도록 전투에 온 힘을 모은다. 2편에서 스스로 악의 힘에 지배당한 바 있는 로한의 왕 세오덴은 전사를 규합해 간신히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던 곤도르에 힘을 실어주고, 간달프는 마법의 지팡이 대신 검을 치켜들고 곤도르의 병력을 수습한다. 물론 절대 악의 사주를 받은 오크와 트롤, 괴수 울리폰트의 습격 앞에 인간의 힘은 미약하기만 하지만, 이들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무기가 아닌 용기와 사명감이다. 한편 반지의 유혹적 권능에 몸과 마음이 갉아먹히기 시작한 프로도는 골룸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점차 위험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두 개의 탑> 헬름협곡 전투의 20배 이상이라는 펠렌노르 평원 전투나 팬들이 가장 기대했던 장면 중 하나인 거미괴물 쉴롭의 습격 등은 예상대로라 할까, 설명하는 일이 오히려 무의미하게 느껴질 만한 장관이다. 그러나 단지 전편보다 커진 스케일만이 속편의 요건은 아닐 것. <반지의 제왕 3: 왕의 귀환>은 흔히 거대예산 시리즈 속편들이 빠지기 쉬운 이런 함정을 벗어나 원정대마냥 올곧게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 달리 말해 상기한 스펙터클들은 기술상의 탁월함만이 아니라 최후의 결전 앞에 놓인 존재의 두려움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매개라는 점에서 치하 받을 필요가 있다. 기술력과 내러티브는 끝없이 갈라진 두 갈래 길이 아니라 가장 긴밀히 닿아있어야 할 양자임을 3편은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준다.
<...왕의 귀환>이 쳐내버린 가지들도 있다. 비로소 곤도르의 왕위를 되찾는 아라곤과 아르웬의 사랑, 그리고 파라미르와 에오윈의 로맨스는 최소한의 한도 내에서만 묘사된다. 여기에 대해서는 실은 좀 다행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르웬 역의 리브 타일러의 연기는 등장인물 중 불쑥 도드라져 보일 정도로 어색한 편. 그러나 드레스를 벗어 던지고 직접 칼을 뽑아드는 에오윈(미란다 오토)의 존재감은 세오돈 왕의 장렬한 최후와 맞물려 가장 빛나는 부분 중 하나다. "왕이란 지독한 기근이 닥쳤을 때 가장 초라한 식탁에서 화려한 옷을 입고 누구보다 큰 소리로 웃어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라는 건 또다른 걸작 판타지 [나니아 연대기]의 한 구절이었지만, 아라곤과 세오돈은 위험이 닥쳤을 때 흔들림 없이 앞장서 '모두에게 등을 보여줄 수 있는' 지도자의 모습을 그려내 보인다. 이런 종류의 교훈은 아마도 인간의 가장 용감했던 시절을 그려낸 판타지 장르가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가져다줄 수 있는 값진 선물 중 하나일 것이다.
또한 무엇보다 3편 최고의 캐릭터, 혹은 배우들로는 프로도, 샘, 골룸 그리고 간달프를 꼽아야 할 것 같다. 프로도를 연기한 일라이저 우드는 이제 스스로가 중간계 전체의 운명을 연약한 팔에 짊어진 호빗이라는 점을 추호의 의심도 없이 믿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반지의 유혹에 잠식당해 잣대를 잃고(생각해 보면 프로도와 마찬가지로 골룸의 내면을 지배하는 감정도 반지에 대한 탐욕, 자기 환멸, 그리고 두려움이었다) 끔찍한 고통을 겪던 프로도의 눈동자에 다시 전투에서 살아남은 자 특유의 쓸쓸함이 깃들 때 관객의 눈시울 역시 젖어들리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골룸의 조롱을 받는 '뚱보 호빗'에서 주인을 지키는 용맹한 전사로 거듭나는 샘 와이즈 갬지는 <...왕의 귀환>의 진정한 승자. 한편 호빗들을 죽음의 위협 속으로 몰아넣은 스스로를 자책하며 칼을 뽑아드는 간달프는 3편에서 "이건 희망이 아니라 바보짓"이라며 자조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관객은 이전의 흔들림 없는 현자보다 3편의 간달프에게 더 큰 애정을 느낄 것이다.
모험의 후일담은 왜 늘 쓸쓸한가. 생사를 건 전투가 일단락 된 후 샤이어로 돌아온 호빗들을 비추는 영화의 후반부가 좀 늘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실은 적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절대반지와의 만남을 이제 명백히 과거형으로 돌려야 하는 사람들에게 후일담은 오히려 짧은 감이 있다. 공유했던 사람들의 증언 속에서만 살아 숨쉴 거대한 과거의 기억. 그 책을 도저히 덮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마련한 감독의 조금은 감상적인 이별 인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