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의 영화를 보다 보면 문득 그런 의문이 생긴다. 일부일처라는 제도적 약속을 얼마나 지키고들 사는 걸까? 홍상수의 영화 속에 나오는 남자들은 하나 같이 아내가 있고 종종 아이도 있지만 한 사람도 빠질 것 없이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물론 어른스러운 남자의 모습으로 어필하는 것은 아니고, 주위의 시선을 끊임없이 의식하며 겁내고 숨고 그러다 비겁하게 도망치듯 슬쩍 몸을 빼기도 했다가, 결국엔 다시 찾아와서 어디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을 가자는 둥, 허무맹랑한 소리를 늘어놓으며 이런 나를 어떡하면 좋을지 나도 모르겠다느니 애처럼 찌질대고 있다. 정말이지 무책임하고 갑갑하기 그지 없다. 남 일이니까 하는 짓을 보다 보면 웃기기도 하고 한편 귀엽지, 저게 내 현실이라고 생각하면 정신이 번쩍 나서 당장에 도망쳐야 하는 상황들이다.

생물학적 남성인 한 친구는 홍상수의 영화가 재미있는 점이 바로 허구적인 캐릭터 때문이라고 했다. 현실에선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들, 행여나 상상 속에서만 해보려다가도 도저히 낯부끄럽고 창피해서 할 수 없는 짓들을 태연하게 해버리는 남자들을 보며 낄낄거리는 데에 있다나. 그런데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홍상수 영화 속의 남자들, 어쩌면 특이할 거 없는 주위의 평범한 남자들인지도 모른다.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이 기존의 홍상수 영화와 다른 점이라면 현재진행형이 아닌 과거에 불륜이었다가 헤어지기로 해놓고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는 관계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물론 어떤 의미로는 진행형이기도 하다. 끝났다고 하면서도 자꾸 만나고 있으니 말이다.

성준(이선균)은 예쁘다는 한 마디의 단어로는 설명되지 않는 이상한 매력을 가진 해원(정은채)에게 온통 빠져있지만, 교수라는 사회적 지위와 가족을 버릴 생각은 결코 하지 못한다. 사직서를 내밀며 해원에게 자신의 정돈되지 않은 속내를 대놓고 칭얼댈지언정 둘의 관계를 책임질만한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결코 아니다. 반면 해원은 좀 더 주도적이다. 남들의 시선때문에 손잡고 마음 편히 거리를 걸을 수도 없는 답답함에 관계를 끝내고 싶어했고, 마음이 흔들려 다시 연락을 하기도 하지만, 중간에 다른 남자를 만났던 사실을 당당히 말할 만큼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여자다. 성준 외에 잠깐씩 등장하며 해원에게 호감을 보인 남자들에 대해서도, 자신의 그때그때 감정에 따라 호의를 받아들이기도 하고 외면하기도 한다.

하지만 해원은 그 누구보다 성준을 좋아한다. 그래서 더 답답하고, 꿈에서라도 사람들에게 털어놓고 싶어한다. 나도 딱 해원쯤 되었을 나이에 애인이 있는 남자를 좋아했던 적이 있는데, 자꾸만 그때의 내 모습이 떠올라서 틈만 나면 술을 찾는 해원의 마음이 어떤 건지 기억이 났다. 비 오는 날 우산 하나 쓰고 다정히 걷고도 싶고 친구들과 만나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소개도 하고 싶은데, 그런 일들이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사소한 것들일진 몰라도 그 사소한 것조차 할 수 없는 사이란 금방 지치기 마련이다. 관계의 인정 욕구가 절대 채워질 수 없는 사이는 조만간 끝이 나던지 지지부진하게 이어질 뿐이다.

그래서인지 해원을 보면서는 저런 시절을 한번쯤 지내고 나면 좀 더 튼튼하고 씩씩한 마음으로 주도적인 사랑을 할 수 있는 여자로 나이가 들어갈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아무 것도 포기하지 않으면서 그때그때 욕망만 챙기려는 성준같은 남자들은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찌질할 것이라는 걸 안다. 사랑한다, 너와는 뭐든지 다 하고 싶다, 낯간지러운 수사를 남발하며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다가도, 해원이 다른 남자와 잤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이성을 잃고 소리치는 성준을 보라. 애까지 있는 남자가 어떻게 저렇게 뻔뻔할 수가 있지? 남자란 동물은 다 저런 식이라니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항변해봤자 무의미한 짓이다. 최소한 자신은 아니어도, 주위에 그런 남자 한 명쯤은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내 말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남자들이 홍상수 영화를 보고 부끄러운 건, 자신이 과거에 했던 짓 또는 할 뻔한 짓을 들켜서일지도 모른다.

한 선배는 얼마 전 몇 년째 지속된 부부동반 모임에 나갔다가 충격을 받고 돌아왔는데, 당연히 부부인줄 알았던 H의 아내 c가 사실은 아내가 아니라 애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한번 떠올렸다. 불륜이 생각보다 흔한 일일지 모른다는 생각, 일부일처제라는 법이 생각보다 우스운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함께 지키자고 정해놓은 약속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사실이다. 법을 어기고 벌을 받고, 주위 사람들에게 지탄받는 일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철저히 내 마음에 기대어 생각해보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