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멜리에]를 보러 가는 길, 예기치 못했던 한 줄금 빗줄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미처 우산을 준비 못한 이들은 바쁜 걸음을 종종거리거나 비를 피해 처마 밑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무료하고 나른하기만 한 도심의 오후에 급작스런 비는 잔잔한 호수가에 조약돌 하나를 던져진 것마냥 작은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런 어수선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시작된 영화 [아멜리에]는 한 바탕 소나기 같은 방식으로 정신 없이 몰아친다. 생각할 틈조차 주지 않은 채 인물 소개가 이어지더니, 급기야 주인공 ‘아멜리에’의 유일한 친구, 금붕어가 자살을 시도한다.
이 정신없는 오프닝은 이 영화의 감독이 장 피에르 주네인 걸 감안한다면 그닥 놀랄 일만도 아니다. 이미 인육을 먹는, ‘엽기적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동화적 상상력으로 보여 줌으로써 전혀 잔혹하지 않은 색다른 느낌의 영화 [델리카트슨]과 어느 과학자의 슬픈 환타지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 그리고 차가운 미래상을 보여 준 [에일리언4] 등을 만들었던 감독 장 피에르 주네라면 능히 그럴 만한 것이다. 물론 전작들이 동화적 상상력으로 암울하고 차갑게 채색된 세상을 보여준다면, [아멜리에]는 밝고 따스한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는 점이 그답지 않긴 하지만.
목석 같은 아빠와 히스테릭한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아멜리에(오드리 토투)는 의사인 아빠가 진찰해 줄 때, 평소와는 다른 살가운 느낌의 아빠 때문에 가슴 뛰고, 이를 그네의 아빠는 심장병이라고 생각해서 학교에 보내지 않는다.
그나마 유일한 친구였던 금붕어마저 떠나고 엄마마저 갑작스런 사고로 돌아가시자 철저히 아멜리에는 외톨이가 된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 주어진 삶에 적응하는 법. 심상치 않은 오프닝으로 우리를 놀래켰던 감독의 장난기마저 어린 기발한 상상력은 또 발동이 걸린다.
그러던 그네에게 어느 날 인생의 전환점이 될만한 일이 벌어진다. 우연히 보게 된 예전 그 집에 살았던 아이의 장난감 발견하고 아멜리에는 그걸 이제는 초로의 아저씨가 된 과거의 소년에게 전해준다. 사람들에게 행복을 전해주는 것이 얼마나 즐겁고 그 자신 역시 행복해지는 일이라는 것을 안 그녀는 그 이후에 자기 주변의 사람들에게 행복을 전해주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것도 그녀다운, ‘아멜리에’적인 방식이다.
그녀가 일하는 카페의 종업원을 좋아해 하루 종일 죽치고 있는 사네를 다른 종업원에게 소개시켜 주며, 자신을 배신한 채 남편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미망인에게 예전 편지들을 조합해 죽기 직전 보냈던 편지처럼 보내낸다. 그리고 집 밖에 나가길 꺼리는 아버지에게는 그가 아끼는 인형을 외국 나들이하는 친구에게 주어 아버지에게 사진을 보내게 하는 등 너무 귀엽다 못해 사랑스러운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행복을 전해 주는 것이다. 또 그가 싫어하는, 채소조차 사랑을 알건만, 채소만도 못한 채소 가게 주인에게 하는 짓은 [나홀로 집에]의 매컬리 컬킨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그 어느 때쯤, 어느새 우리가 영화 [아멜리에]에, 더 정확히는 ‘우리의’ 주인공 ‘아멜리에’에 길들여져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어느 틈엔가 그네가 우리에게도 와서 자그마한 행복 하나쯤 놓고 갔다는 것도 함께. 스크린 속, 귀엽고 순수한 영혼을 지닌 사람은 그렇게 스크린 밖으로 나와 우리를 감화시킨다. 분명 배경은 파리지만, 그건 현실 속의 그곳이 아니다. 비현실적인, 동화적임에도, 아니 그렇기에 더더욱 영화 [아멜리에]는 현실의 우리에게 깊은 잔상을 남긴다. 살아가면서 가끔은 우산 같은 외피가 필요한지도 모른다. 영화 [아멜리에]는 적어도 그 외피 한 꺼풀쯤은 우리에게 전해준다. 우리가 잊고 있던 순수와 행복이라는 이름의 얇은 막을. 또한 어느 시인의 시처럼 ‘실상 하늘 아래 외톨이로 서 보는 날도 하늘만은 함께 있어 주지 않던가/ 혼자는 아니다/ 누구도 혼자는 아니’라는 작은 깨달음을 정신 없는 장면들과 느슨한 장면들을 교차하는 강약 조절을 통해 생긴 리듬에 얹어 전해 준다.
영화를 보고 나왔을 때 어느새 비는 그쳐 있었고, 성큼 다가온 다른 계절처럼 우리의 마음 속에는 그녀, ‘아멜리에’의 미소가 어느새 자리잡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 계절의 변화 언저리쯤 어디선가 귀여운 웃음으로 웃고 있는 아멜리에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2년 전이던가, [쉘 위 댄스]를 이미 본 선배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다. “이 영화 볼 거니? 보고 나면 사는 게 다 행복해질 거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