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없는 말(言)만 천리를 가는 건 아니다. 발 있는 말(馬)도 천리를 갈 수 있다. <워 호스>의 경주마 조이가 증명한다. 1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의 영국 시골 데본. 소년 앨버트(제레미 어바인)는 아버지가 술김에 사 온 망아지 조이와 우정을 나눈다. 하지만 전쟁의 공포는 조이와 앨버트를 피해가지 않는다. 전쟁이 터지면서 조이는 영국 기마대의 군마로 차출되고, 앨버트는 그런 조이를 찾아 나이를 속이고 군에 입대한다. 이들은 과연 만날 수 있을까?
<워 호스>의 출발은 영국 아동문학가 마이클 모퍼고의 동명 베스트셀러다. 영국에서 뮤지컬로 제작 돼 인기를 얻은 작품은 뉴욕 브로드웨이로 진출, 공연 두 달 만에 토니상 5개 부문을 석권하며 공연계를 달궜다. 말과 인간의 감동적인 우정은 공연을 관람하러 온 스필버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책 속의 조이가 할리우드로 진출하는 순간이다. “<워 호스>는 전쟁 영화가 아니라 가족 이야기”라고 밝힌 스필버그의 얘기를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전쟁을 배경으로 하지만, <라이언 일병 구하기>처럼 전쟁의 참상에 현미경을 들이댄 영화는 아니다. 스필버그의 관심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는 읽힌다. 외계인이 침략해도(<우주전쟁>), 부모에게 버림받아도(<A.I>), 지구로 떨어져도(<E.T>), 사기 행각을 벌이며 살아도(<캐치 미 이프 유 캔>),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려는 주인공들의 ‘회귀본능’이 이번에도 발견된다.(스필버그가 원작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워 호스>를 스필버그의 최고 작품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가 왜 거장인가를 확인케 하는 작품임에는 분명하다. <워 호스>는 소재나 주제가 특이한 영화는 아니다. ‘인간과 동물의 우정’이라는 소재가 그렇거니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는 주제도 빤해 보인다. 주목해야 할 건, 이 빤한 이야기가 스필버그를 거치면 ‘스필버그식’ 감동 드라마가 된다는데 있다. 독특한 소재와 주제를 자기 식으로 만드는 건, 수월할 수 있다. 하지만 흔한 소재와 주제를 자기화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보편적인 주제를 식상하지 않게 제조하고 흥미롭게 재구성해내는 역량에서 스필버그의 관록이 느껴진다
조이로 분한 14마리 대역마(代役馬)의 연기는 일품이다. 전장에서 만나 친구가 된 흑마의 마지막 순간을 바라보는 조이의 눈빛에서 웬만한 배우의 연기력을 뛰어넘는 공력이 발견된다. ‘말이 연기를 한다’는 이 말은, 절대 말같지 않은 소리가 아니다. 이 영화에는 오래 두고 기억하고 싶은 순간도 있다. 영국군과 독일군이 대치한 상황. 그 사에 중립지대 철조망에 갇힌 조이를 구하기 위해 두 나라가 군인들이 힘을 모으는 장면은 마음에 훈풍을 드리운다.
3D를 비롯한 첨단 영상기술들은 극장을 하나 둘 점령해가는 이 시점에서 <워 호스>는 과거의 향수를 기꺼이 선사해 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가 고전주의의 향취를 풍길 수 있었던 데에는 스필버그의 오랜 친구이자 영화적 동지인 촬영 감독 야누즈 카민스키(<쉰들러 리스트> <라이언 일병 구하기> <뮌헨> 등을 스필버그와 함께 작업한 감독)의 역량이 큰 몫을 한다. 카민스키는 디지털이 흉내 낼 수 없는 필름만의 정취를 최대한 살려 고전 영화의 느낌을 재현하고, 초원의 정취에서 전장에 이르는 다양한 화면을 최대한 사실적인 영상으로 잡아냈다. 특히 영화가 담아낸 푸른 하늘은 사진으로 스캔해서 집안 구석구석에 걸어두고 싶을 정도로 아름답다. 야누즈 카민스키가 있다는 건 스필버그 뿐 아니라, 관객에게도 축복이다. 아카데미 작품상, 촬영상을 포함한 6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됐다더니, 그럴만한 이유가 충분함을 영화를 보니 알겠다.
2012년 2월 11일 토요일 | 글_정시우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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