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기너스>는 기승전결이 뚜렷한 이야기가 아니다. 등장인물들의 감정선을 가만히 따라가며, 그들이 내뱉는 일상적이고 내밀한 이야기를 담담한 어투로 풀어내는 드라마다. 일흔이 넘어서 새 삶을 시작하는 아버지와 그를 지켜보는 아들의 사연은, 마이크 밀스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이기도 하다. 할은 암 4기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78세의 매력적인 게이입니다”라는 구인광고를 낼만큼 열정이 넘치는, 사랑스런 노인네다. 신비롭고 자유로운 매력으로 올리버를 첫눈에 사로잡은 애나는, 외톨이 인생에 지쳐 두렵지만 누군가가 자신을 잡아주길 바란다. 시한부 아버지와 젊은 시절 어머니의 기억 사이에서 헤매고, 애나의 등장에 동요하며, 그 모든 감정을 일러스트로 풀어내는 올리버 역시 고독하고 매력적이다. 모두들 무언가를 시작하고, 그것을 위해 조바심 내며, 새로운 인생을 꿈꾸는 사랑스런 초심자들이다.
개성 뚜렷한 인물 못지않게 돋보이는 것은 감성과 유머가 돋보이는 연출이다. 대표적인 것은 전광판 혹은 도시 벽면에 ‘역사의식이 담긴 낙서’를 하는 올리버의 취미다. “브리트니 스피어스 2003년 검색순위 1위”와 같은 문구의 낙서는 관객에게 지적인 재미를 선사한다. 이는 시대별 아이콘의 사진이나 당시의 뉴스 혹은 이슈를 이야기 곳곳에 배치해놓은 것과 같은 맥락이다. 강아지 아더의 씬에 자막을 입혀, 마치 강아지가 내면연기를 하고 대화를 하는 양 유머를 더한 연출방식 또한 사랑스럽다. 무엇보다 들뜨지 않은 분위기에서 자연스러운 온기를 발산한다는 점은 <비기너스>의 가장 큰 미덕이다.
<비기너스>는 생에 대한 통찰력, 인물에 대한 섬세함이 돋보이는 감성 드라마다. 스펙터클한 사건이나 자극적인 에피소드가 등장하는 건 아니지만, 이야기는 그 자체로 눈부시다. 내 주변 누군가의 모습을 본 딴 것처럼 세상에 흔들리는 인물군상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영화는 현실에 발을 딛고 있다. 판타지라는 거품이 빠진 슬림한 이야기는, 그러나 감성적으로 충만하다. 얼핏 단조로워 보이지만 개개인의 감정에 주력한 섬세함과 따뜻한 시선이 감지되는 까닭이다. 삶과 사랑에 서툰 이들이 숨 한 번 고르고 세상에 처음 노크하는 이야기, <비기너스>. 그게 무엇이 됐든, 무언가를 시작하는 이들을 위한 사려 깊은 이야기다.
2011년 11월 8일 화요일 | 글_유다연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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