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용의 영화세계는?
김수용 감독을 일러 흔히 ‘한국 문예영화의 대부’라고 일컫지만 그의 작품 세계를 온전히 소개하기에 이 수식은 2% 부족하다. 백편이 넘는 작품을 남긴 감독의 세계를 단 한 줄로 요약한다는 것은 일종의 태만에 가깝다. 김수용 감독의 필모그래프는 거대한 시간의 흔적과 같아서 켜켜이 쌓인 두터운 퇴적물처럼 특정 태도를 담은 여러 겹의 세계가 발견된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문예영화가 그 첫 번째 층에 해당한다. 그의 대표작 대열에서 가장 선두에 선 <갯마을>(1965)은 이후 한국영화계에 문예영화 붐을 이끈 시발점이었다. 당시의 여느 감독처럼 영화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코미디와 멜로드라마를 오가며 흥행 영화감독의 대열에 합류한 김수용 감독의 작가로서의 야망은 좀 더 높은 곳을 향했다. 예컨대, 일본 영화 베끼기가 횡행하던 1960년대 당시 그는 소설을 돌파구로 삼았다. “난 그때 문학과 영화 사이에서 뭔가를 찾아야 할 것 같은 심정이었다. 뭘 만들면 얘기를 꾸미게 된다. 꾸미다보면 이미 있는 얘기다. 그럼 얘기를 꾸미지 말고 소설을 갖다 쓰자.” (<영화천국> 12호 ‘김수용과 만나다’ 중)
그 시작은 모파상의 <첫사랑>을 각색한 <돌아온 사나이>(1960)였지만 이효석, 김유정, 현진건, 염상섭 등의 작품을 좋아했던 그는 한국인의 삶과 정서가 짙게 깔린 소설을 스크린에 옮긴 문예영화로 명성을 쌓았다. 오영수의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한 <갯마을>은 그런 감독의 의지가 가장 높은 수준으로 발현된 작품이라 할만하다. 남편 잃은 갯마을 과부들의 삶의 애환과 생활상이 거친 파도의 풍광 속에 짭조름하게 배어 있는 것. <갯마을>을 필두로 <유정>(1966, 이광수 원작) <까치소리>(1967, 김동리 원작) <산불>(1967, 차범석의 희곡 원작) 등 다양한 장르의 원작물을 다루면서도 여기에는 일관되게 토속적 사실주의가 그 바탕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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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김수용 감독은 이전까지 사건과 인물 묘사에 중점을 두었던 것과 달리 <안개>(1967)를 발표하면서 연출의 방향키를 미학적인 성취 쪽으로 틀기에 이른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원작으로 한 <안개>에서 이야기 구성보다 편집과 음향, 그리고 촬영에 역점을 둔 영상 미학의 실험으로 사실주의를 신봉하던 한국영화의 새 지평을 연 것. “그들은 입을 모아 한국영화를 매도한 다음 자신들이 기획 중인 <안개>가 우리 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 것이라고 호언하면서 협조를 부탁했다. 새로운 한국영화, 그것은 먼저 스토리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완성도가 높아야하고 투명하며 세련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렇다면 이제까지의 영화는 줄거리에 얽매여 조잡하고 유치하고 애매했단 말인가. 오냐. 너희들이 원한다면 그렇게 만들어주지.” (<나의 사랑 씨네마> 김수용 저 ‘<안개>, 새로운 영상 미학의 시도’ 중)
<안개>는 도시에서 출세한 남자(신성일)가 고향으로 돌아와 정신적 방황을 겪는 과정을 따라간다. 한 여자(윤정희)를 만나 그녀를 통해 순수했던 과거를 떠올리지만 세속적 도시 삶의 유혹을 끝내 떨치지 못하는 것. 김수용 감독은 이야기가 아니라 의식의 흐름을 쫓아가는 <안개>를 통해 현재의 시간에 과거를 소환하고, 현실의 공간에 꿈을 불러내며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무(無)로 돌려놓는 등 한 화면에 두 개의 시간과 공간을 병행하며 파격적인 연출을 선보인다. 마치 영화를 시(詩)의 언어로 대하는 것 같은 그의 태도에는 필연적으로 당대 사회가 안고 있는 ‘급격한 근대화 속에 소외당하는 인간’이라는 테마가 근저에 흐르고 있었다.
영화를 한낱 국민 교화용으로 인식하던 당시의 몰상식한 정권 하에서 이는 결국 김수용 감독을 한국 검열 역사의 가장 큰 피해자로 몰아넣었다. 대표적인 사례만 꼽아보면, <시발점>(1969)은 이청준의 <병신과 머저리>를 영화화했지만 검열 때문에 영화 제목으로 사용할 수 없었고 <야행>(1977)은 사전 제작 심의에 걸려 1973년 완성하고도 창고에 묶여있다 53군데가 잘려 나간 채 개봉했으며 <허튼소리>(1986)에서는 열 세 장면이 삭제 당하는 등 검열에 항의해 감독이 은퇴선언을 하기도 했다. <도시로 간 처녀>(1981)는 경우가 좀 다르지만 버스안내양의 열악한 근로환경과 비인간적 처우를 고발했다는 이유로 버스회사가 동원한 노조의 압력에 영화 상영이 중지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때의 심정을 김수용 감독은 이렇게 표현했다. “그래, 영화에 무슨 사회성이냐. 폭로 항변 메시지는 잠시 접어두고 더 좋은 세상 만날 때까지 사랑하고 정사하고 눈물 짜는 이야기나 찍자.” 그렇게 해서 완성된 작품이 바로 <만추>(1981)이었다. (<나의 사랑 씨네마> ‘국토를 세로 질러 단풍을 좇으며’ 중)
<만추>는 어떤 영화?
김수용의 <만추>는 이만희가 만든 동명의 원작(1966)을 김기영(<육체의 약속>(1975))에 이어 두 번째로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당시 38세의 나이로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던 탤런트 김혜자와 갓 TV드라마에 출연하던 정동환을 캐스팅해 만든 <만추>는 시한부 사랑을 나누는 남녀의 이야기를 다룬다. 모범수 혜림(김혜자)이 특별휴가를 받아 어머니의 산소를 찾아가던 중 젊은 청년 민기(정동환)를 만나 짧지만 애틋한 사랑을 나누는 것. 비교적 이만희 감독의 원작(필름 소실)에 충실한 것으로 알려지지만 여기서도 김수용 감독의 예술적 자의식은 황금빛의 가을 낙엽만큼이나 선명하다.
김수용 감독의 설명에 따르면,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자브리스키 포인트>(1970)에 등장하는 히피족처럼 민기 역할을 데모에 가담했다가 쫓기는 대학생으로 설정했지만 시나리오 사전 심사에서 삭제 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열대의 사막 한복판에서 더욱 뜨거운 사랑을 불사르는 <자브리스키 포인트>의 남녀 주인공처럼 <만추>의 커플 역시 바람에 쓸려가 콘크리트 피부만 선명한 휑한 도로 위를 가을 낙엽 같은 사랑으로 점점이 흩뿌려놓는다. 언제 바스러질지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온 몸으로 원색의 빛을 발하는 그들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김수용 감독은 설악산에서부터 속리산으로, 내장산에서 지리산으로, 결국 부산까지 가을 단풍을 찾아 전국을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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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추>(晩秋)는 제목처럼 ‘늦가을’의 정취를 고스란히 스크린 속에 살리기 위해 20여일의 짧은 기간 동안 촬영을 마친 것으로 전해진다. 감독의 말을 빌리자면, “이만희 감독, 문정숙 주연의 영화가 가장 재미있다.”고 하지만 이와 상관없이 김수용의 <만추>는 단독적인 작품으로도 뛰어나다. 영화 내내 한곳에 정착할 수 없는 주인공들의 처지는 계속해서 이동할 수밖에 없는 기차의 속성에 비유된다. 그래서 이들 커플은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서로에게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역(驛)으로 기능한다. 마치 여름 발(發) 겨울 행(行) 그 사이 존재하는 가을이라는 이름의 간이역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텅 비어있는 이들의 마음을 사랑과 눈물처럼 원초적인 감정을 앞세워 작은 지분이나마 구원의 순간으로 채워가는 것이다.
이만희의 <만추>가 무려 세 번씩이나 리메이크 된 데에는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태생적인 구조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인다. 시대를 타지 않는 사랑 이야기라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무(無)의 인물들을 여러 가지 사연과 감정으로 ‘채워가는’ 구조의 연출은 어느 감독이라도 탐낼만한 소재다. 현빈과 탕웨이의 캐스팅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는 김태용 감독의 <만추>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지만 김수용의 <만추>를 통해 대략적인 만듦새를 예상해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극도로 말을 아끼며 온 몸으로 감정의 연기를 발산하는 김혜자의 캐릭터에서 탕웨이의 캐스팅 의도를 이해할 수 있으며 미국 올 로케이션인 만큼 기차레일 대신 도로 위에서의 만남과 이별의 엇갈림이 이뤄지지 않을까 짐작해볼 수 있다.
최근 들어 한국 영화계에 리메이크 시도가 심심찮게 이뤄지고 있다. 그중 김태용의 <만추>와 김기영 감독의 동명영화를 리메이크한 임상수 감독의 <하녀>가 대표적이다. 이들 영화의 존재는 한국영화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긴밀하게 이어져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사례다. 과거의 감독과 영화를 현재에 다시 거론하고 재평가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김수용 감독은 거의 매일 한국영상자료원의 시네마테크KOFA를 찾아 자신의 회고전에 참석한 관객들의 반응을 살피고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는 관객들을 향해 “한국영화를 사랑해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진심으로 감사해하지만 젊은 관객의 부재에 대해서는 안타까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역사는 기록이기도 하지만 우선적으로는 목격이다. 목격이 이뤄져야 기록이 가능한 까닭이다. 김수용 감독과 그의 영화에 대해 모르고 있는 젊은 관객들이 이 글을 통해 단 한 명이라도 김수용 감독 회고전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글_허남웅(고전영화 애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