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주 전, 영화평론가 이용철을 우연히 만났다. 대뜸 <채식주의자> 이야기를 꺼낸 그는, “요즘은 이런 영화가 좋다”고 했다. “기회가 되면 꼭” 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공개 될 당시 우선순위에 올려놓았지만, 사정상 보지 못했고 기자시사도 놓친 바로 그 영화였다. 그의 안목을 믿고 있었기에 기회를 잡아 보리라 다짐했다. 대략 훑어본 평은 대체로 엇갈렸으며, 예상대로 여배우의 살인적 감량과 노출과 부도덕한 정사에 초점을 맞춘 기사가 대종을 이루고 있었다. 아직은 육식동물의 시대임에 분명한가 보다.
임우성 감독의 <채식주의자>는 섬뜩하면서도 아름다운 영화다. 한강의 연작소설 『채식주의자』를 바탕으로 한 작품답게 소설을 복기하는 데 충실하고 있는 영화는, 아픈 기억이 불러낸 무기력과, 나무가 되고 싶은 한 여자의 인생위에 도열한 가족주의의 잔재들을 보여준다. 그것은 우리의 무의식을 지배해온 일그러진 시대에의 알레고리다. 때문인지 폭력적 아버지로부터 시작된 트라우마를 ‘채식주의’라는 개인적 방법으로 선언하고 가장 적극적 행동으로 펼쳐내는 주인공을 보고 있노라면 슬그머니 눈물이 난다.
평범한 주부 영혜(채민서)는 갑작스레 채식주의를 선언한다. 멀어지는 가족과 남편과의 이혼, 그녀에게 남은 것은 언니(김여진)와 몽고반점에 집착을 보이는 형부(김현성) 뿐이다. 급기야 거식증까지 걸려 병원신세를 지는 영혜와 동생을 살리기 위해 애쓰는 언니와 영혜의 몸에서 예술적 감흥을 얻으려는 형부의 욕망과 금기의 이야기. 영화의 줄거리다.
박동훈 감독의 <계몽영화>에서 가부장의 폭력을 깊은 상처로 간직한 딸은 임종 직전의 아버지로부터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어 했다. 그러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계몽영화>의 딸이 자신의 상처를 타자에게 전이시키면서 더 큰 상처를 만들어왔고, 그리하여 쉽사리 이를 극복하지 못한 반면, <패식주의자>의 영혜는 자신의 몸의 권리를 내세워 이를 돌파하려고 한다. 몇 번의 좌절 끝에 획득하는 몸의 자유. 이는 예술에 가려진 삶의 무능력함 사이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아슬아슬하지만 솔직한 욕망으로부터 비롯된다.
근대화 과정에서 우리사회를 지배해온 것은 성공신화에 사로잡힌 자들의 세계관이었다. 이를 근거로 남성은 동물적 본능과 욕망을 여성의 나약한 육체 위에 무작위로 배설하면서 군림해왔다. 폭력을 잠재우고자 한 어떠한 노력도 성장과 발전의 이데올로기를 극복하기엔 역부족인 시절이었다. 그러나 주인공은 자신의 몸을 나무로 만들고 꽃을 피우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시킨다. 육체에 집착하는 자들에게 앙상한 육체를 전시하면서 스스로 방어막을 형성하고 의지를 관철시켜나간다. 그러므로 주인공의 채식은 폭력적으로 얼룩진 과거와의 단절이자, 나무가 되어 새로운 시대를 꽃피우려는 간절한 몸부림이다.
한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세상이 도래해도 사회를 지탱해온 폭력의 이데올로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원래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는 것일까? 영혜의 돌발적 행동이 불러오는 가족의 당황스러움과 폭력적인 ‘가족구하기’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강아지에게 물린 딸에게 (그 개를 잡아 만든)개장국을 먹으라던 아버지는, 육식을 거부하는 다 큰 딸의 뺨을 후려치며 강제로 입에 고기를 물린다. 하지만 지금은 가족을 위해 남편의 매질을 감내해야했던 어머니의 시대가 아니다. 그 시절 어린 첫 째 딸은 동생을 잠재우고 칼을 감추는데 그쳤지만, 성인이 된 둘째는 칼을 들어 자기 손목을 그어버린다. 혈연주의에 포박된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것이다. 과거와 단절하지 않고서는 자신이 꿈꾸는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선정적이고 폭력적이며 거칠고 거북한 장면의 연속이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당신이 지나치게 육식동물의 사고에 사로잡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만들어온 ‘폭력의 역사’를 스스로 넘어서기 위한 주인공의 행동이 익숙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즉 비열한 시대를 월경(越境)하는 방법으로써의 채식주의를 바라보는 주변인의 변치 않는 태도를 통해, 근대적 사고와의 절연의 가능성을 성찰한다는 것이다.
앨리슨 랜드버그는 ‘보철의 기억(prosthetic memory)’이라는 용어를 통해, 영화 텔레비전, 박물관등에서 재현되는 새로운 공적기억의 형식을 이야기 한다. 이것들은, 개인의 산 경험의 산물이 아닌, 매체에 의해 인식되는 것이고. 감각적으로 육체에 쓰여 지는 기억인 동시에, 상호교환 가능성과 변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상업 미디어가 상품과 스펙터클 형태로 기억, 과거, 역사의 생산 전송할 때, 기억은 상품 가치를 지닌 기억만을 재현한다는 점이다. 개인의 기억 또한 필요에 따라 사람에 따라 제각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공적기억들 또한 보철의 기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주인공을 제외한 가족들이 아버지의 폭력에 무감각한 것도 따지고 보면, ‘가족을 위해 평생을 살았다’는 온정주의 혹은 어쩔 수 없었던 ‘시대가 낳은 희생양’으로써의 가부장을 전파한 언론매체의 영향과 무관치 않다는 것이다.
지금이라고 변한 건 하나도 없다. 영구집권을 위해 부정선거를 저질렀어도, 건국과 정부수립의 혼돈의 시대였기에 강력한 통치력과 지도자가 필요했다는 식의 사고. 그리하여 ‘공과를 제대로 가림으로써’ 건국대통령의 위상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부류들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이 작금의 상황이다. 언론매체와 방송이,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영리하게 지속적으로 ‘조국근대화에 이바지한 모든 것들’에 대한 헌사를 부각시키는 것도 ‘보철의 기억’의 힘을 믿는 까닭이다.
소설 『채식주의자』의 프롤로그는 다음과 같이 끝을 맺는다.
「그 외에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올해로 결혼 오년 차에 접어들었으나, 애초에 열렬히 사랑하지 않았으니 특별히 권태로울 것도 없었다. 지난 해 가을 이 집을 분양 받기까지 임신을 미뤄왔으니 슬슬 아빠 소리를 들을 때도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지난 이월 어느 새벽 아내가 잠옷바람으로 부엌에 서 있는 것을 발견할 때까지, 나는 우리의 생활이 조금이라도 달라질 수 있으리라고 상상한 적이 없었다.」
꿈을 꾸었고 꿈속에서 본 얼굴 때문에 채식주의자가 된 영혜지만, 여전히 그녀는 가정의 굴레에서 아내라는 위치를 점하고 있다. 문제는 아내의 채식을 남편이 감당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영혜의 남편은, 계란프라이조차 먹을 수 없고 섹스마저 거부하는 아내와의 이혼을 결심한다. 그는 동서와 처형 앞에서 “평생 남편에게 의지해서 살아야하는 데, 형님이라면 견딜 수 있겠어요?”라고 말한다. 뒤집어 말해서, 가장이 먹고 마시고 섹스 하는 것을 박탈하려는 아내의 선택은 사회통념상 용납될 수 없다는 것. 바야흐로 집단의 결정에 승복하고 맹목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시대가 아님에도, 사회 도처에는 여전히 집단의 이름으로 개인을 굴복시키려는 행위가 만연하고 있다. 그러나 개인의 의사와 반하는 그 어떤 행위도 폭력이요 인권유린이다. “다 너를 위해서”라는 말의 만능주의와 위험성이 극대화되는 순간, 주인공의 채식을 금지시키려는 가족의 폭력은, 음식을 거부하는 환자에게 강제급식하려는 병원의 더 큰 폭력으로 이어진다. 모든 의학적 치료 행위ㅡ불가피한 강압을 인정한다고 해도ㅡ가 정당성을 얻는 것은 오직 몸의 주인인 환자의 동의가 있을 때 만이다.
<채식주의자>가 마뜩한 점은 절망을 노래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금기와 욕망의 서사가 음울하고 건조하게 펼쳐지는 가운데서도, 스테레오타입에 그치기 십상인 삶과 죽음 사이의 긴장감을 세밀하게 묘사함으로써 온기를 유지한다는 점은 흥미롭다. 그리하여 후반으로 갈 수 록 증가하는 빛의 양은 생명의 증거가 된다. 병원의 차갑고 습한 기운을 뒤덮고도 남을 정도의 풍성한 빛. 이처럼 욕망과 도덕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을 넘나들면서 임우성이 그려내는 영상은, 건조한 듯 따뜻하고 끈적거리는 듯 찰기가 넘친다. 이는 점액질 욕망도 아니요 불순한 축축함도 아니다. 차라리 물기 먹은 채소를 만질 때의 미끈거림에 가깝다.
화자 격인 언니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영화에서 감독은, 동생의 보이스오버를 통해, 심지어는 삼자의 시점으로 진행되던 형부와 처제의 퍼포먼스 작업 장면마저도ㅡ동생의 집에서 종결짓는 작업의 최종본을 보는ㅡ언니의 전지자적 시점을 유지함으로써, 원작에 가까워지려는 고민을 드러낸다. 한편 배우의 연기는 전체적으로 만족스러운데, 부드러우면서 단호한 표정을 지닌 김여진의 열연은, 그저 그런 영화로 전락하기 직전에 극적으로 구해냈다는 점에서 특별히 언급할 만하다. 그러니까 채민서와 김현성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전체를 조율한 김여진이 아니었더라면, 일부 언론의 한심한 표현대로 ‘형부와 처제의 정사’나 ‘여배우의 노출’ 정도로 얼마간 회자되는데 그쳤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영화의 후반, 서서히 벽을 타고 주저앉으면서 절망과 배신과 분노가 뒤엉킨 표정으로 “개새끼!” “아직 몸도 성치 않은 애를…”이라고 내뱉을 때의 표정연기는 가히 화룡정점이다.
“죽으면 안 돼는 거야?”라고 묻던 영혜의 나지막한 목소리. 피를 토하면서까지 자신의 몸을 지키려했던 한 여자가 언니의 품에 안길 때, 육식의 시대와 절교하고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주인공의 애처로운 눈빛과 몸짓이 꽃처럼 피워지는 순간, 우리는 그녀가 피눈물 속에서 피워낸 꽃 한 송이를 만난다. 그것은 빛과 색의 조화로 길어 올린 생명의 유의미성이다.
<채식주의자>는 엄청난 데뷔작은 아닐지라도, 원작의 섬세한 필치를 영상으로 묘파하는 데 충실했고, 자칫 선정성에 함몰 될 수도 있는 지점을 기민하게 돌파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충분한 아름다운 영화임에 틀림없다.
글_백건영 편집위원(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