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조티카> <달콤한 내세>로 익숙한 아톰 에고이안이 신작을 내놨다. 1990년 중후반, 젊은 거장으로 추앙받던 그의 최근작을 본다는 것도 흥미롭지만, 성을 통한 관계라는 꾸준한 관심사도 반갑다. 특이한 것은 이반 라이트만과 제이슨 라이트만 부자가 프로듀서와 라인 프로듀서로 참여했다는 사실. 누가 먼저 손을 내민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재능 있는 감독이 계속 연출 기회를 잡아야 하는 것은 우리나라나 할리우드나 지향해야 할 부분이다.
산부인과 의사인 캐서린(줄리안 무어)은 음대 교수인 데이빗(리암 니슨), 음악을 전공하는 아들(맥스 티에리옷)과 함께 성공한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과거와는 달라진 가족의 모습은 캐서린을 불안하게 한다. 어느 날 남편의 생일날, 친구들과 함께 깜짝 파티를 준비하지만 남편은 비행기를 놓쳤다는 핑계로 다음날 집에 온다. 캐서린은 남편의 바람기를 의심하고, 고급 콜걸인 클로이(아만다 사이프리드)를 통해 남편을 시험하기에 이른다. 클로이에게 남편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캐서린은 잊었던 욕구를 발견하고, 결국 클로이와 잠자리를 갖게 된다. 하지만 이후 클로이는 캐서린에게 강한 집착을 보인다. 이성적인 캐서린이 클로이를 밀어내자, 급기야 클로이는 캐서린의 아들을 유혹해 잠자리를 갖는다.
<클로이>는 드라마 <사랑과 전쟁>에나 나올 법한 통속적인 소재로 출발한다. 남편의 외도를 의심하고 콜걸을 고용해 그 진위를 파악한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야기지만, 남편의 외도는 진짜 이야기로 가기 위한 연막이다. 캐서린은 부부(또는 가족)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목적으로 남편의 외도를 밝히려고 했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고 급기야 동성애를 경험하게 된다. 현재의 관계를 극복하지 못한 채,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게 된 캐서린의 복잡한 심정은 또 다른 주변 관계를 통해 예상치 못한 결과를 향해 나아간다.
영화는 사람들의 여러 관계를 통해 진실과 거짓, 의심과 확인, 욕망과 절제 등의 상반된 감정들을 충돌시킨다. 타인을 통해 나 자신을 얼마나 알게 되는지, 나의 선입견이 타인을 판단함에 있어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누군가를 알기 위해 나를 얼마나 던져야 하는지 등이 관계를 통해 드러난다. 그런 이유로 영화에서는 거울이나 유리와 같은 투명이나 반투명 소재를 이용한 장면들이 많이 등장한다. 각자의 시선이 타인에게 직접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거울이나 유리와 같은 매개체를 통해 전해짐으로써 여러가지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영화는 겉으로 에로틱 스릴러라는 장르적 뉘앙스를 풍기지만 규칙을 따르지는 않는다. 언뜻 남편의 외도가 영화의 중심 소재인 것 같지만, 진실이 밝혀질 때 즈음, 인간의 욕망이라는 영화의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 처음 캐서린은 남편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클로이를 매개로 이용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고 주체할 수 없이 빠져든다. 클로이 역시 캐서린에 대한 사랑이 집착으로 발전하는 데, 두 사람의 관계는 의도했던 본연의 관계가 아니라 매개에 의해 틀어진 관계라는 점이 흥미롭다.
아톰 에고이안은 성적인 관계를 통한 심리 묘사나 관능적인 표현에서 여전히 실력을 발휘한다. 클로이의 치명적인 매력은 물론, 캐서린의 내면적 갈등, 혼란을 겪는 가족, 여러 관계를 통한 캐릭터의 다양한 해석 등에서 드러난 섬세한 연출도 여전하다. 또한 <세크리터리> <퍼> 등 인간의 관계를 에로티시즘으로 풀어내 신선함을 인정받은 에린 크레시다 윌슨이 4년 만에 내놓은 시나리오라는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여기에 시나리오 집필 때부터 주연을 낙점 받은 줄리안 무어의 복잡한 심리 표현과 <맘마미아>에서 순진한 소녀로 나왔던 아만다 사이프리드의 원초적인 매력이 더해지면서 영화의 완성도를 높인다.
<클로이>는 흔한 소재를 중심으로, 그 뒤에 감춰진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에 다가가는 영화다. 하지만 중심 소재로 사용된 남편의 외도는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면이 있으며, 그를 통해 파생되는 사건과 관계 역시도 참신한 맛은 덜 하다. 하지만 클로이와 캐서린의 관계가 주를 이루는 후반부의 전개에서는 두 배우의 서로 다른 매력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아만다 사이프리드의 도발적인 매력은 새로운 발견이다.
2010년 2월 19일 금요일 | 글_김도형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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