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소녀를 만나다
<500일의 썸머>는 그 흔한 사랑과 그 이후 벌어지는 이별을 다룬 영화다. 다만 마크 웹 감독은 뻔한 사랑과 이별 얘기를 연대기 순으로 진행하는 대신 시간을 재배열함으로써 전혀 다른 함의를 갖는 로맨틱영화로 탈바꿈시켰다. 로맨틱코미디영화에 <21그램>의 형식을 합했다고 할까. 영화는 초반 10분 동안 그런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오프닝과 함께 반지를 낀 여자의 손이 남자의 손 위로 포개지는 장면을 보여주는데 이는 마치 이들의 사랑이 결실을 맺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이야기는 곧 이은 장면에서 이들이 처음 만난 ‘1일째’로 돌아간다.
축하카드를 제작하는 회사에서 카피라이터로 일하는 톰(조셉 고든 레빗)은 사장의 새 비서 썸머(주이 드샤넬)를 보고 첫 눈에 반한다. 다소 소극적인 성격의 톰은 썸머가 사랑에 큰 관심이 없음을 알고는 일단 마음속에만 그녀를 담아둔다. 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더 스미스’의 음악을 썸머 역시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운명적인 사랑을 감지하니. 여타의 로맨틱영화였다면 이후 주인공 커플이 불같은 사랑을 나눴을 테지만 <500일의 썸머>는 별안간 290일째로 넘어가 썸머에게 이별 통보를 받은 톰의 좌절한 표정을 보여준다. 첫 장면에서 그렸던 톰과 썸머 커플에 대한 환상이 확 깨지는 순간이다.
이처럼 <500일의 썸머>는 톰과 썸머가 관계한 시간을 뒤죽박죽 나열하며 사랑에 대한 환상의 풍선을 터뜨리는 형식을 취한다. 톰과 썸머의 첫 만남의 에피소드 뒤에 바로 이별의 사연이 자리 잡고 가구 매장에서 소꿉놀이하듯 펼치는 이들의 닭살 행각을 따라가던 카메라가 홀로된 톰이 다시 매장을 찾아 씁쓸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비추는 식이다. 여기에는 사랑을 운명으로 대하는 남자와 사랑을 현실적으로 대하려는 여자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를 드러내 로맨틱영화의 공식을 재정의 하려는, 더 나아가 사랑에 대해 더 깊이 성찰해보려는 감독의 소박한 야심이 뽀얗게 서려있다.
이 영화가 시종일관 경쾌한 톤을 유지하고 선배 로맨틱코미디 영화에 대한 영향력을 숨기지 않는 것은 <500일의 썸머>가 다루는 사연이 사랑의 끝이 아니라 진정 사랑의 본질에 대해서 알아가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더 스미스’ ‘홀 앤드 오츠’, ‘사이먼 앤 가펑클’ 등의 음악을 극에 적극 개입시키는 연출은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2000)를 연상시키고 뮤지컬 영화에 대한 패러디부터 잉그마리 베르히만의 <제7의 봉인>(1957)과 <페르소나>(1966)에 대한 재치 있는 오마주까지, 겉보기엔 로맨틱코미디 장르의 최근 조류를 취하고 있지만 이상화된 사랑의 무책임한 결론을 향해 가지 않는 것이다.
이미 주인공 톰을 소개하는 내레이션부터가 심상치 않다. 내레이터(리처드 맥고나글) 왈, 톰은 <졸업>(1967)의 결말을 잘못 이해하고 사랑을 경험한 케이스란다. 톰은 ‘사랑은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소유자인데 사실 <졸업>의 마지막 장면은 운명론적인 사랑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낸 것으로 유명하다. 아마도 톰은 극중 벤자민(더스틴 호프먼)이 결혼식장에서 일레인(캐서린 로스)을 데리고 나오는 장면을 보고 사랑에 대한 환상을 키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사랑의 도피에 성공한 벤자민과 일레인이 버스 뒷좌석에 자리하고 긴장을 푸는 순간 이들을 바라보는 일군의 어른들의 걱정스러운 눈빛은 사랑이 운명만으로 충족되는 감정이 아님을 역설한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500일의 썸머>의 톰을 보며 <봄날은 간다>(2001)의 상우(유지태)를 떠올리는 건 자연스럽다. 사랑을 운명이라고 믿는 톰이나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고 떼쓰는(?) 상우나 사랑에 있어서 순진한 면모는 매한가지인 것이다. (더군다나 톰은 자신의 사랑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한참이나 나이 어린 여동생에게 카운슬링을 받고 안정을 취한다!) 그에 반해 썸머는 (역시 <봄날은 간다>의 은수(이영애)처럼!) 사랑에 대해 좀 더 유연한 태도를 취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랑을 감정의 의무라고 생각해 강제하지 않고 환상 따위 품지 않으며, 그래서 현실에 대한 감각도 톰에 비해 월등하다. 다만 그 나이 대 여자들에게서 종종 목격되는, 이미 사랑에 대해 모든 걸 아는 듯 젠체하는 태도는 썸머 역시 어느 면에서 톰과 다를 바 없이 유아적인 것이 사실이다.
<500일의 썸머>는 한편으론 톰과 썸머 중 누가 먼저 사랑에 대한 환상을 깸으로써 좀 더 빨리 성장하는지를 비교, 분석하려는 뉘앙스를 강하게 풍긴다. 그리고 당연히 더 오래도록 실험대상(?)을 남는 쪽은 톰이다. 남자라는 동물 자체가 그렇다. 사랑에 거품을 잔뜩 치장하고 거품이 빠져도 오랫동안 헤어 나올 줄은 모르며 그걸로 세상 끝이라고 생각하는 게 그 놈의 남자다. 한마디로 여자에 비해 덜 현실적이고 조금 더 비하하자면 철이 없다.
<500일의 썸머>의 각본 자체가 그런 남자에 의해 쓰였다. 이 영화의 각본가 스콧 뉴스타터는 첫사랑 여자와 헤어진 뒤 겪은 감정을 고스란히 <500일의 썸머>에 담았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마이크 니콜스의 <졸업>이었고 ‘더 스미스’ 노래에 꽂혀 몇날 며칠을 이어폰만 꽂고 살았으며 그러면서 사랑은 운명으로 굳게 믿었던 것이 바로 스콧 뉴스타터다. 그는 자신을 떠나간 첫 사랑을 이해할 수 없었다. <500일의 썸머>가 시작되자마자 나오는 자막, ‘등장인물들이 현존하는 사람과 닮았다면 그건 순전히 우연일 뿐입니다. 특히 당신, 제니 베크먼... Bitch!'인데 제니 베크먼이 바로 스콧 뉴스타터의 첫 사랑이었더랬다.
다만 각본가 스콧 뉴스타터는 이제 어느 정도 객관적인 선에서 자신의 사랑을 돌아볼 만큼 몇 번의 사랑을 경험하고 나이도 더 먹으면서 좀 더 현실적인 인물에 가까워졌다. <500일의 썸머>의 각본을 썼다는 것이 그 증거다. 그 중에서도 썸머의 손이 톰의 손 위로 포개지는 장면을 전략적으로 영화의 앞뒤에 구성한 배치는 <500일의 썸머>의 의도를 명증하는 구조의 핵심이라 할만하다. 처음 제시될 때는 관객들에게 이들의 결혼을 암시하는 역할을 하지만 영화의 결말부에 다시 한 번 반복되는 이 장면의 의미는 정반대로 그들의 사랑이 완전히 끝을 맺는 순간이면서 또한 톰이 운명의 사랑에 대한 환상을 깨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톰이 깨닫는 사실이란 사랑은 바로 우연에서 비롯되는 일종의 현상이라는 것. 운명적인 사랑이란 관계를 맺으며 그 관계 속에서 꽃을 피우는 것이지 이미 피운 꽃을 갖는 게 아니라는 지극히 당연한 의미를 내포한다. 이미 지나간 버스 후회하며 쫓아간들 무슨 소용이며 앞으로 다가올 버스를 놓치지 않는 것이 사랑에 더욱 충실한 태도가 아니냐는 거다. 그러니 허구한 날 운명의 사랑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우연적으로 맞닥뜨리게 될 사랑을 제 때 알아보는 것이야말로 진정 ‘사랑의 기술’임을 <500일의 썸머>는 잘 보여준다.
봄, 여름 그리고 가을
사실 톰과 썸머의 사연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사랑 이야기라 해도 틀리지 않다. 처음부터 사랑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연애를 하는 사람은 없다. 사랑에도 단계가 있고 그래서 우리는 수많은 사랑의 실패를 통해 성장한다. <봄날은 간다>의 상우도 은수라는 첫 사랑의 실패로 한 뼘의 성장을 이루었고 <500일의 썸머>의 톰 역시도 썸머와의 이별 후 오랜 가슴앓이 끝에 사랑을 조금 더 알게 됐다. 그리고 만나게 되는 새로운 사랑은 ‘Autumn', 즉 가을이다.
개인적으로 <500일의 썸머>에 대한 글을 쓰면서 <봄날은 간다>를 언급한 것은 단순히 사랑의 성장통이 가져오는 감정의 변화를 계절의 속성으로 암시하는 구조의 친연성에 있지만은 않다.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거리를 사이에 두고 흡사한 구조의 영화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다만 사랑의 형태는 다양할지언정 속성에 있어서만큼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니까 <500일의 썸머>의 톰과 썸머가 경험하는 사랑은 결국 너와 나, 그리고 우리들의 이야기인 셈이다. 그리고 모두가 한 번쯤은 겪은 (혹은 겪게 될) 추억이기도 하다. <500일의 썸머>는 사랑이란 공식 같은 것이 아니라 기억처럼 순서 없이 좌충우돌 하는 경험에서 완성된다고 말하는 영화다.
글_허남웅(영화 칼럼리스트 http://www.hernamwoo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