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개봉 소식이 들릴 때부터 <500일의 썸머>는 기대작이었다. 사랑에 관한 이야기는 발에 채일 정도로 많지만, 영화에 나오는 말처럼 ‘이 이야기는 그저 그런 뻔한 스토리가 아니다.’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화된 영화들 속에서 상큼 발랄하지만 솔직하고 담백한 로맨스 이야기를 본다는 것은 나름의 발견이다. 아마도 이 영화를 쓴 두 작가, 스캇 뉴스타터와 마이클 웨버가 한 사람은 가슴 아픈 실연 중에서 회복 중이고, 다른 사람은 한 사람과 오랜 연애를 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현실 감각을 제대로 살린 이야기는 공감지수를 높인다.
톰(조셉 고든-레빗)은 회사에서 사장의 비서로 들어온 썸머(주이 데샤넬)를 보고 한 눈에 반한다. 그리고 자신의 운명적 반쪽이라고 확신한다.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같이 탄 둘. 썸머는 톰이 듣고 있는 음악을 자신도 좋아한다고 한다. 회사 회식에서는 남자친구가 없고 자신은 사랑을 믿지 않는다는 말을 듣는다. 조금씩 호감을 표시하던 둘은 복사실에서 키스를 나누고 썸머의 집으로 초대받으며 관계가 급진전된다. 행복한 나날로 회사에서도 승승장구하는 톰. 하지만 연인보다는 편한 친구로만 지내길 원하는 썸머를 보고 있자니 불안함을 감출 수가 없다. 결국 이별하는 두 사람. 톰은 지독한 실연의 아픔을 겪다가 우연히 썸머를 다시 만난다. 그리곤 사랑이란 운명을 기다리기보다 만들어가는 의지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만난다. 둘은 어색하게 시작하지만, 잦은 만남을 통해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아간다. 같이 쇼핑을 다니고,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취미와 취향에 대해서도 얘기한다. 손을 잡고, 키스를 하고, 같이 잔다. 톰은 이 모든 과정으로 미루어보아 둘의 관계는 연인이라고 확신하지만, 썸머의 생각은 다르다. 사랑을 믿지 않는다고, 그냥 편한 친구관계였으면 좋겠단다. 괜찮겠지, 그렇게 지내다보면 연인이 되겠지라고 생각한 톰의 생각은 틀렸다. 썸머는 떠나버렸으니까. 이제부터는 실연의 아픔을 느끼는 시간이다. 썸머를 처음 본 1일부터 썸머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정리한 500일까지의 기간은 달콤한 사랑만 있는 것은 아니다. 즐거웠던 시간, 불안했던 시간, 이별로 인한 아픔의 시간, 다시 만난 재회의 시간, 영원한 이별을 통한 깨달음의 시간이 모두 담겨있다.
<500일의 썸머>는 기존의 로맨스 영화들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에피소드의 나열법이나 감정의 변화를 시퀀스대로 묶지 않았다는 점에서 신선하다. 만남과 이별의 과정을 순차적으로 늘어놓은 것이 아니라, 리와인드와 패스트 포워드를 반복하며 톰과 썸머의 연애 중 어떤 한 지점을 보여주는 식이다. 한창 뜨거운 연애를 하던 톰이 너무 행복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던 모습에서 이별의 아픔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 이별 후의 어떤 날로 넘어가버리는 형식으로 재미있게 구성되어 있다. 편집의 묘는 톰의 상상과 현실을 양쪽으로 분할하여 보여주는 파티장 장면에서도 재치를 발휘한다. 마치 ‘현실은 달라요’라고 말하듯, 톰의 꿈과 바램을 한 방에 무너뜨리는 이 장면에선 관객들 역시 절절한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시간을 거스르는 구성, 인물의 심리를 세세하게 보여주는 형식에 안성맞춤 캐스팅도 돋보인다. 사랑으로 행복해지고, 사랑으로 불행해지는 감정의 롤로코스터는 조셉 고든-레빗에 의해 잘 표현되며,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한 독특한 매력으로, 표정 하나 안변하고 사랑에 대한 믿음이 없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주이 데샤넬은 캐스팅 자체로 캐릭터가 완성된 느낌이다. 여기에 영화 <졸업>에 대한 언급과 장면의 인용으로 영화의 의도를 전달하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사랑에 빠져있던 톰은 점점 현실 감각을 찾게 되고, 이성적으로 사랑을 바라보던 현실적인 썸머는 오히려 사랑의 열병을 이해하게 된다.
공감 가는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소화한 배우들의 연기와 함께 영화의 중요한 요소는 바로 음악이다. 삽입곡이나 영화 속에서 인물들이 직접 부르는 노래 등은 영화의 감정을 더한다. 더 스미스, 비틀즈의 노래, 비틀즈의 멤버 링고 스타 등이 에피소드를 구성하는 주요 요소로 쓰이고, 귀에 익은 팝 음악으로 로맨스 영화 특유의 감정 이입도 유도한다. 특히 두 작가는 시나리오 작업 때부터 자신들의 기억 속 로맨스 음악들을 적극 가져왔다. ‘갓 블레스 더 USA’, ‘트레인 인 베인’, ‘유 메이크 미 마이 드림즈 컴 트루’ 등의 음악이 이야기의 완성도를 돕는다.
<500일의 썸머>는 흔하디흔한 사랑을 소재로 하지만, 지금까지 봐온 영화와는 다른 느낌을 준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하지만, 그 모습이나 사연들은 각기 다르다. 하지만 사랑과 연애에 관한 근본적인 공통 정서는 있는 법. 영화는 그러한 공통적인 감정의 흐름을 고루하지 않고, 상투적이지 않고, 전형적이지 않게 풀었다. 운명적 사랑을 기다리는 톰에게는 사랑은 운명이 아니라 우연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의지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사랑을 믿지 않고 구속되는 걸 싫어했던 썸머에겐 진짜 사랑을 전한다. 사랑은 원래 어려운 거다. 어떤 답을 내려고 한다면 더 꼬여버리는 공식처럼. 하지만 확실한 건 있다. 사랑하는 당신, 지금 행복하지 않은가?
2010년 1월 15일 금요일 | 글_김도형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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