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닝을 연 것은 가와세 나오미 감독의 <코마>. 재일교포 3세 강준일(키타무라 카즈키)은 할아버지의 유언 때문에 ‘코마’라는 일본의 산간지역 마을을 찾는다. 그는 할아버지의 유품을 전달하기 위해 찾아간 집에서 하츠코라는 여자를 만난다. 준일은 어딘가 그늘이 있어 보이는 그녀에게 끌리고 무미건조한 삶을 살아가던 하츠코 역시 낯선 방문자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영화는 산간 지방 특유의 고즈넉한 풍경을 차곡차곡 담는 것을 통해 이들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좇는다. 처음 만난 남녀의 운명적인 이끌림이라는 다소 작위적인 설정에도 불구하고 두 남녀의 교감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은 이런 섬세한 터치 덕분이다. 교차적으로 나오는 한국과 일본의 민요는 남녀관계 위에 한일관계를 슬쩍 포갠다. 짧은 러닝타임의 한계로 그 이상 깊게 파고들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지만 2007년 <너를 보내는 숲>으로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가와세 나오미 감독의 세계를 엿보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첩첩산중>은 홍상수 감독의 인장이 분명한 작품이다. 영화에는 꼬이는 남녀관계, 먹물 근성의 지식인, 술자리, 모텔촌 등 홍상수 영화의 클리셰라 불릴만한 요소들이 대거 등장한다. 친구 진영을 만나러 전주에 내려온 미숙(정유미)은 엄마와 다투느라 못나온 진영대신 옛 애인인 전 교수(문성근)를 만난다. 오랜만에 재회한 자리에서 전 교수와 진영이 사귀고 있음을 알게 된 미숙은 홧김에 전 남자친구이자 전 교수의 제자인 명우(이선균)를 전주로 부른다. 이들의 기기묘묘한 만남은 이튿날 아침까지 이어진다.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판단이 안서는 아이러니한 상황 그리고 그 안에서 발현되는 유머와 한없이 인간적인 욕망은 이번 단편에서도 영화를 지탱하는 홍상수 감독의 힘이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상황, 인물, 대사가 오가는 <첩첩산중>은 모든 홍상수 영화들이 그랬듯이 웃기고 재밌다. 반복 속에서 진화를 거듭했던 전작들의 비범한 성취는 없지만 홍상수 영화의 세계에서 한 템포 쉬어갈 수 있는 소품 같은 영화다.
필리핀 감독 라브 디아즈의 <나비들에겐 기억이 없다>는 필리핀의 암울한 현실을 그린 흑백영화다. 필리핀의 한 작은 섬. 캐나다 금광회사가 철수하자 주민들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다. 윌리(윌리 페르난데스)와 페르딩, 산토스도 절망에 빠져 술에 의지하는 날들이 많아진다. 하지만 섬에 이들과 어린 시절 함께 자란 캐나다인 미사가 찾아오면서 섬 주민들의 마음에는 동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거대 기업에 대한 분노와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 싶은 욕망은 세 젊은이들을 돌이킬 수 없는 비극으로 이끈다. 필리핀에서 실제 일어난 사건에서 영감을 얻은 <나비들에겐 기억이 없다>는 식민지 문제와 개발도상국에서 일어나는 다국적 기업의 폐해를 짚는다. 섣불리 인물에 다가가지 않는 카메라는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변질되어 가는지를 찬찬히 지켜본다. 줄곧 필리핀의 사회적 이슈를 영화화해온 라브 디아즈 감독은 비전문 배우들을 기용해 영화의 사실성을 더한다. 개발이 가져온 풍요로움을 맛본 섬 주민들의 딜레마는 곧 경제적 번영에 대한 갈망과 정체성과 환경 파괴 사이에서 갈등하는 필리핀의 현실이다.
‘방문자’라는 공통의 키워드가 있지만 형식과 주제의 자유 속에서 도무지 접점을 찾을 수 없는 <어떤 방문>은 관객의 취향과 관심사에 따라 호불호가 극명히 갈릴 수 있다. 때문에 뚜렷한 개성의 차이가 영화의 장점이 될 수도 단점이 될 수도 있는 옴니버스 영화다.
2009년 11월 9일 월요일 | 글: 하정민(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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