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설경구)와 함께 즐거운 하루를 보낸 진희(김새론)는 다음날 그의 손에 이끌려 보육원에 맡겨진다. 홀로 남겨진 진희는 아빠가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그녀는 먹는 것을 거부하며 보육원에서 도망치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점차 그곳에 적응해 나간다. 하지만 보육원에서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하나 둘씩 입양되어 떠나가고 다시 홀로 남겨진 진희는 세상과 이별을 준비한다.
<여행자>는 한국계 프랑스인인 우니 르콩트의 첫 번째 작품이다. 의상 디자인을 전공한 우니 르콩트는 전공을 살려 의상 담당으로 영화계에 처음 입문했다. 이후 다른 감독 작품에서 각본가와 배우로 참여한 그녀는 직접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하고 9살 때 한국에서 프랑스로 입양된 자신의 기억을 덧붙여 <여행자>를 완성했다. 그러나 <여행자>가 입양이라는 소재를 선택했다고 해서 눈물을 훔쳐내기 바쁜 영화는 아니다. 이와 반대로 영화는 한 소녀, 아니 한 어린 여성의 이별과 체념 그리고 또 다른 인생의 시작을 담담하게 그린다. 프랑스어로 ‘Une Vie Toute Neuve’ (아주 새로운 삶)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원제목은 영화가 말하려는 메시지를 확연히 드러내고 있다.
<여행자>는 소녀의 얼굴에서 시작해 얼굴로 끝을 맺는다. 그 만큼 영화에서 진희의 얼굴은 극중 분위기를 좌지우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영화 속 분위기는 소녀의 표정으로 활기를 띠기도 하고 슬픔에 잠기기도 한다. 이를 위해 카메라는 진희의 키 높이에 맞춰 그녀의 얼굴을 계속해서 보여준다. 그러므로 극중 자신에게 첫 이별을 안겨준 아버지는 얼굴이 나오지 않고 소녀를 둘러싼 보육원의 울타리는 더욱더 커 보인다. 세상의 높은 벽을 실감하게 하는 카메라의 적절한 배치는 온전히 진희의 시선으로 대체되며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감정선에 성큼 다가서게 만든다. 또한 진희 역을 맡은 김새론의 연기는 영화의 흡입력을 더한다. 1000:1의 경쟁률을 뚫고 주인공으로 발탁된 김새론은 연기가 처음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모습을 보여준다. 이 당찬 소녀는 각각의 상황에 맞는 표정을 내보이며 영화 내내 감정을 억누르는 듯한 연기를 선보인다. 이를 바탕으로 세상에 두려움이 가득한 진희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여행자>에서 진희의 삶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것은 바로 이창동 감독이 제작과 공동 각본을 맡았기 때문이다. <오아시스> <밀양>에서 보여줬던 감독의 인간탐구적 스타일은 우니 르콩트의 섬세한 소녀이야기와 맞물려 극중 진희가 보여주는 감정의 굴곡을 돋보이게 만든다. 특히 아버지를 대신해 보육원에서 의지했던 친구들이 떠나가고 그 슬픔과 외로움에 땅속에 자신을 묻어 자살을 기도하기까지 후반부의 진희의 모습은 마치 삶의 목표를 잃은 <밀양>의 전도연을 보는 것 마냥 감정의 울림이 대단하다. 게다가 이창동 감독이 제안한 헤은이의 ‘당신은 모르실꺼야’를 영화에 삽입하면서 진희가 이별을 경험하기 전과 후의 감정을 극명하게 전달해준다.
<여행자>는 김새론의 새로운 발견 이외에도 두 아역배우의 매력을 만날 수 있다. 보육원에서 진희와 친자매처럼 지내는 숙희역에 박도연은 그동안 <오즈의 마법사> <라이온 킹> 등 뮤지컬 무대에서 연기를 펼친 배우이다. 이번 <여행자>를 통해 첫 영화에 출연한 박도연은 무거운 감정을 유지하는 진희와는 다르게 밝고 안정된 연기를 보여주며 관객들에게 웃음을 선사한다. 또한 몸이 불편하지만 보육원 아이들을 돌보고 남몰래 짝사랑을 키워가는, <괴물>에 출연했던, 예신역의 고아성은 극중 다리를 저는 모습을 선보이며 좀더 캐릭터에 집중하는 연기를 보여준다. 게다가 그녀는 첫사랑의 설레임과 이별의 아픔을 연기하는 원숙함도 보여줘 이후 성인 연기자로서의 가능성을 열었다.
2009년 11월 3일 화요일 | 글_ 김한규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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