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백'이니 '된장녀'니 하는 풍토에 거부감을 가진 여성이라도 한번쯤은 샤넬의 트위드 수트와 체인 달린 2.55백을 꿈꿔봤을 것이다. 현대여성에게 샤넬은 패션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비단 부를 상징하는 명품 브랜드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여성을 코르셋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남성복을 변용한 여성복을 만들면서 여성에게 자유를 가져다준 디자이너가 바로 샤넬이다. 장례식복으로나 사용됐던 블랙은 그녀로 인해 재발견 된 색이다. 샤넬이 패션계에 등장하면서 비로소 현대여성의 시대가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샤넬 스타일은 문화 혁명 다름 아니었다.
고아원에서 자란 샤넬(오드리 토투)은 성인이 된 후 카페를 전전하며 가수의 꿈을 키운다. 그녀는 카페에서 부호 에티엔 발장(브누아 포엘 부르드)를 만나 상류층 문화를 접한다. 노래와 재봉 일을 병행했던 그녀는 상류사회 여성들의 의상들을 유심히 보게 되면서 당시 여성 복식문화에 반감을 갖게 된다. 급기야 자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옷을 직접 제작하게 된 샤넬. 요통을 유발하는 코르셋과 두꺼운 벨트를 버리고 움직임을 제한한 치렁치렁한 치맛단은 잘라버린다. 그녀의 심플하고 자유로운 의상은 처음엔 이단 취급을 받지만 점점 여성들의 눈길과 마음을 사로잡는다. 남다른 안목과 재능은 발장의 저택에서 보이 카펠(알렉산드로 니볼라)을 만나면서 날개를 단다.
<코코 샤넬>은 현대 여성의 정신적, 물질적 지주로 추앙받는 샤넬의 전기 영화다. 하지만 일반적인 전기 영화를 기대했다면 영화가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인물의 전 생애를 아우르거나 신화적인 성공 스토리에 초점을 맞춘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는 샤넬이 디자이너가 되기 직전, 한 시절을 들여다본다. 외로운 유년기를 보낸 샤넬은 성공하기 위해 남자를 노골적으로 유혹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발장은 그 과정에서 만난 남자다. 급기야 염치 불구하고 발장의 저택까지 찾아간 샤넬. 하지만 발장 저택에서의 생활은 숨겨진 재능을 끄집어낸다. 재봉사보다 가수가 되고 싶었던 그녀는 파리의 최신 유행을 가까이 접하면서 의복 디자인에 대한 수많은 영감을 받는다.
하지만 훗날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되는 샤넬의 결정적인 시절에 대한 묘사가 극적으로 연출된 것은 아니다. <코코 샤넬>은 그녀의 패션처럼 심플하고 정갈한 스타일의 영화다. 영화는 샤넬이 의복 디자인에 관심을 갖게 되는 심적 변화나 영감을 얻는 과정에 대해 구구절절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새로운 환경과 사람들에 의해 미묘하게 변하는 그녀의 디자인을 마치 풍경을 담듯이 차분하게 응시할 뿐이다. 신들린 재봉질이나 현란한 손놀림이 오가는 디자인 스케치 장면도 나오지 않는다.
이는 영화가 그녀의 화려한 이력보다 그것을 만들어낸 내면에 집중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화는 인간 샤넬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순간들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며 그녀의 내면으로 들어간다. 고아원에서 보낸 유년기와 변두리 카페를 전전하던 가수시절, 발장 저택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짧고 빠르게 훑어나가던 이야기가 방점을 찍는 것은 로맨스. 그녀의 디자인을 최초로 알아봐준 보이와의 사랑은 으레 격정적인 사랑이 그렇듯 그녀의 모든 것을 뒤흔든다. 이루어지지 못해서 안타까운 사랑은 그녀를 확실한 디자이너의 길로 인도한다. 물론 가슴 절절한 로맨스를 담는 태도 역시 담백하고 간결하다. 로맨스 이후 샤넬이 어떻게 패션 왕국을 건설했는지에 대한 과정은 일절 생략돼 있다.
이야기든 감정이든 심지어 배우들의 연기까지도 최대한 압축하고 절제한 <코코 샤넬>은 불멸의 패션 아이콘을 다룬 영화치고는 확실히 다소 심심한 영화다. 하지만 영화 자체를 샤넬의 패션 관점에서 바라보면 <코코 샤넬>은 지극히 '샤넬'다운 영화다. 영화는 불필요한 장식을 버리고 절제 속에서 가장 실용적이고 여성스러운 디자인을 찾아냈던 샤넬과 꼭 닮았다. 샤넬 스타일에 매료된 관객에게 <코코 샤넬>을 관람하는 것은 샤넬의 새로운 수트를 입어보는 것과 비슷한 경험일 수 있다. 그래도 허전해할 관객을 위해 영화는 엔딩에 보너스 같은 장면을 마련해놓는다. 샤넬이 집대성한 모든 아이템들이 등장하는 패션쇼 장면은 여느 액션 블록버스터의 스펙터클 못지않은 진풍경이다. 오두리 토투가 입은 흰색의 트위드 정장을 비롯한 패션쇼 의상 제작 작업에는 샤넬의 수석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가 직접 참여했다.
2009년 8월 27일 목요일 | 글_하정민(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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