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의 금요일>의 제작자 숀 S. 커닝햄이 제작하고 웨스 크레이븐이 연출한 <왼편 마지막 집>(1972, 국내 비디오 출시제 <분노의 13일>)은 이후 공포영화의 대표 감독 중 한 사람이 된 웨스 크레이븐의 데뷔작이었다. 당시 웨스 크레이븐은 공포영화에 관심은 고사하고 규칙이나 영화적인 문법조차 몰랐던 시기. 하지만 그의 놀라운 데뷔작은 B급 영화의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며 논란을 일으켰다. 그랬던 그 전설의 B급 공포영화가 좀 더 세련된 비주얼과 납득 가능한 이야기로 재무장했다. <하드코어>를 연출했던 데니스 일리아디스가 메가폰을 잡아 감각적인 영상과 인간의 폭력적인 본성을 파헤친다.
1년 전 아들을 잃은 존(토니 골드윈)과 엠마(모니카 포터) 부부는 딸 메리(사라 팩스톤)와 함께 호숫가 별장으로 휴가를 온다. 오랜만에 온 별장에 남아있는 오빠의 흔적에 가슴이 아픈 메리는 시내에 있는 친구 페이지를 만나겠다고 집을 나서고 부부는 오붓하게 둘 만의 저녁을 맞이한다. 페이지와 만난 메리는 낯설지만 착해 보이는 저스틴과 어울리며 그의 숙소로 가게 되고, 그 곳에서 도망자인 저스틴의 아빠 크룩(가렛 딜라헌트)을 만나 인질이 된다. 산까지 끌려간 메리와 페이지. 탈출을 시도하던 페이지는 죽임을 당하고 메리는 성폭행을 당하고 총상을 입었지만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한다. 한편 메리와 페이지를 놓친 크룩은 차까지 고장나 근처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하는데, 그 곳은 다름 아닌 메리의 부모가 있는 별장. 사정을 모르는 존과 엠마는 크룩 일당을 도와주며 별채를 내어준다.
<왼편 마지막 집>은 웨스 크레이븐이 1972년에 만든 동명의 영화를 리메이크 작품이다. 당시 문제가 됐던 캐릭터 설정과 무리한 이야기 전개는 <디스터비아>의 각본을 쓴 칼 엘스워드가 보완했고, <민 크리크>의 촬영을 맡은 샤론 메이어는 B급 영화의 자질구레함을 떨쳐내고 긴장감 넘치는 화면을 만들어냈다. 물론 제작을 맡은 웨스 크레이븐은 새롭게 만들어지는 자신의 데뷔작에 만족을 표했고, 묘한 심리로 긴장감을 유발하는 스릴러에 인간이 갖고 있는 잔혹한 본성이라는 주제가 더해지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했다.
<왼편 마지막 집>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은 크룩 일당과 존과 엠마 부부가 서로의 존재를 모르고 만나는 장면이다. 크룩 일당이 자신들의 딸을 해치려고 했다는 사실을 모른 채 그들을 돕는 부부의 모습과 크룩 일당이 하룻밤을 묵어갈 집이 메리의 부모 별장이었다는 사실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관객들에게는 긴장감을 최대한으로 끌어들이는 정점이 된다. 언제, 어떤 방법으로 두 집단은 서로의 정체를 대해 알게 될 것이며, 그 뒤로 어떤 이야기가 전개될 것인가에 흥미를 느끼게 된다.
이 이야기는 잉그마르 베르히만의 <처녀의 샘>을 모티프로 한 원작 <왼쪽 마지막 집>의 의도를 더 잘 살렸다. <처녀의 샘>은 종교적인 배경으로 복수를 그렸지만, <왼쪽 마지막 집>은 인간이 갖고 있는 본능적인 잔혹함에 무게가 실려 있다. 저스틴에 의해 크룩 일당이 메리를 해치려한 악당이라는 것을 알게 된 부부가 조심스러우면서도 침착하게 복수를 하는 과정 자체는 적당한 쾌감을 준다. 항상 악한 이들에게 당하기만 했던 보통 사람들이 반대로 그들을 공격한다는 설정은 ‘나에게도 저런 일이 생긴다면?’이라는 가정과 함께 상황을 뒤집는 통쾌함을 준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도 잠시. 보통 사람들이었던 존과 엠마 부부는 악당보다 더한 잔혹함을 드러내며 처절한 복수를 마무리 짓는다. 딸에 대한 복수로 시작된 격한 감정과 흥분은 마지막 장면에서 침착하면서도 차분한 잔인함으로 드러나며 관객에게 충격을 준다. 단순히 자신과 가족을 지키려는 폭력이 아닌, 그들이 원래 지니고 있던 본능적인 폭력을 까발린다.
이러한 이유로 <왼편 마지막 집>은 단순한 잔혹영화로 보기 어렵다. 크룩 일당과 부부의 대치 관계가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고, 시점 쇼트를 적극 활용한 핸드 헬드도 극적인 비주얼을 만들어내지만, 장르적인 특성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다. 이는 잔혹한 비주얼에도 마찬가지다. 장도리의 뒷부분으로 머리를 찍어 죽이고, 손을 분쇄기로 갈아버리는 등 고어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들이 나오지만, 단순히 고어적인 쾌감을 선사하는 것이 목적은 아니다. 단순한 장르영화보다는 조금 더 확장된 개념으로 바라볼 수 있는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물론 같은 이유로 장르적인 시각과 철학적인 접근이 서로를 갉아먹어 어느 쪽으로도 쉽게 판단하기 어렵지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관람한다면, 두 가지를 다 취할 수 있다.
공포영화의 특성이 다분한 영화를 철학적인 영화로 둔갑시키고 싶은 의도는 전혀 없다. 하지만 영화가 하나의 시각으로만 읽혀지는 것에는 아쉬운 생각이 든다. 극한의 상황에서 대치하고 있는 캐릭터를 통한 긴장과 사건이 해결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잔인한 비주얼 등에서 장르영화로서의 특성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관객은 이야기에 자신의 상상과 감정을 이입하면서 존과 엠마에 동의를 하거나 부정을 할 수도 있다. 그것은 각자가 가진 폭력성에 대한 스스로의 질문인 셈이다.
2009년 8월 28일 금요일 | 글_김도형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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