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는 일은 하나도 이해 못하면서” “그런 게 어디 있어.” “있어요. 예를 들면, 사랑.” 영화의 오프닝,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크루즈 폭발사고의 결정적 실마리를 증명해 보이는 유카와 교수(후쿠야마 마사하루), 그리고 그런 논리적인 사고로 무장한 물리학의 천재가 못마땅한 형사 우츠미(시바사키 코우). 시작부터 명쾌하다. 영화의 주요 키워드들이 제시되어 있다. 상식적으로 해결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사건, 이를 해결하는 ‘갈릴레오’ 유카와의 천재성, 그리고 사건의 해결할 결정적 실마리인 ‘사랑’이라는 감정까지. 그 만큼 이 영화는 군더더기가 없다. 과학이나 논리 따위가 증명할 수 없는 사랑의 실체란 화두를 제시하는데 있어 정직하고 우직하다. 분명 단순한 장르영화일 법 하지만 그게 또 그렇지가 않다.
<용의자 X의 헌신>은 잘 알려진 대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동명 원작 소설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감독을 비롯하여 그 누구도 그 사실은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본 대중문학의 선두주자인 그는 <비밀> <호숫가 살인사건> <백야행> 등 수많은 작품들을 영화나 드라마의 모태로 제공해 왔다. 단편 <탐정 갈릴레오>를 심화, 확장시킨 장편 <용의자 X의 헌신>은 134회 나오키상을 수상하며 완성도를 입증 받은 바 있다. 이러한 원작의 기운을 수혈 받은 영화는 짐짓 딴청을 부리는 듯하다 예상치 못한 감정의 파고에 맞닥뜨리게 만든다. 코미디로 말하자면 시종일관 웃음을 터트리게 만들다가 종국엔 진심어린 눈물 한 방울 떨구게 만드는 채플린의 영화들처럼. 그러니까 두 천재의 맞대결을 그린 추리극을 예상하고 극장으로 들어섰다면, 분명 한 방 얻어맞은 것 같은 묵직한 감정을 안아 들고 극장을 나서게 될 것이다. 그게 다 논리적인 트릭에만 몰두하지 않고, 인간 감정의 결들을 잡아낼 줄 아는 히가시노 게이고 덕분이란 말씀이다.
범인이 누군가 하는 ‘후더닛’ 구조는 관심 밖이다. 오프닝 시퀀스가 끝나면, 호스티스 출신으로 중학생 딸과 같이 살고 있는 야스코가 우발적으로 전남편을 살해한다. 야스코는 폭력을 일삼고 돈을 요구해왔던 남자를 피해 온 터다. 안절부절하던 차에 옆집에 사는 수학교사 이시가미가 벨을 누른다. 사건의 전모를 이미 알고 있던 그는 자신만 믿으라며 야스코를 다독인다. 곧바로 우츠미를 위시한 형사들의 수사가 시작된다. 얼굴과 지문을 일그러뜨린 전남편의 시체가 발견되자 야스코는 제1의 용의자로 지목된다. 그러나 수학 천재 이시가미가 파놓은 트릭은 깊숙하고 철저하다. 바로 이때, 대학 동창인 유카와가 이시가미의 존재를 알아채게 되면서 두 남자의 두뇌 싸움이 시작된다.
“예를 들면 기하학 문제인 것처럼 보이면서도 사실은 함수 문제라는 식이죠.” 이시가미가 낸 문제는 이렇듯 관점을 달리해야만 풀 수 있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치밀한 논리나 숨 막히는 긴장감을 과시하는 서스펜스 드라마나 할리우드 스릴러를 예상하면 낭패감을 맛보기 십상이다. 원작자 히가시노 게이고는 소설에서 이미 이시가미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관점을 달리할 것을 요구한 바 있다. 그러니까 이시가미가 왜 두 모녀를 도와주었는지, 또 답을 알게 된 유카와는 왜 고통스러워하는 지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이를 위해 영화는 원작의 구조를 충실히 따르면서도 영화다운 무엇들을 배치해 놓았다. 드라마 <갈릴레오>의 팬들을 위해 신참 우츠미를 유카와 교수의 파트너로 내세운 것은 기본. 주로 진술을 통해 독자가 상상할 수밖에 없는 사건의 진상을 친절하게 영상으로 설명해주는 것은 물론 영화라는 장르의 기본적인 장점이다. 눈에 띄는 것은 두 남자의 심리적 대결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유카와가 이시가미가 떠나는 둘 만의 산행. “지금 오르지 않으면 평생 기회가 없을 것”이란 이시가미와 “무슨 의미냐”라고 반문하는 유카와. 팽팽한 긴장감과 각자의 고민이 잘 묻어난다. 더불어 혹시나 이시가미가 진상을 알아챈 유카와를 죽이지나 않을까 하는 서스펜스도 제공된다. 폭설로 뒤덮인 산을 오르는 두 사람을 풀 숏으로 잡아낸 이 시퀀스는 볼거리를 염두에 뒀음이 분명하지만, 원작의 갈등을 한층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영화적’인 변형이 아닐 수 없다.
쿨하게 앞만 보며 내달리던 영화는 깊숙이 장전해왔던 감정의 탄환을 클라이맥스에 한꺼번에 분출해 낸다. 사건의 진상이 밝혀진 뒤 경찰서에서 야스코가 맞닥뜨린 이시가미. 그의 나레이션(편지 글)과 회상을 통해 그가 왜 한 여인과 그의 딸을 도왔는지가 밝혀질 때, 영화는 사랑과 헌신이란 사소한 감정에서 어떤 숭고함을 이끌어낸다. 누구는 눈물을 떨 굴 것이고, 누구는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용의자 X의 헌신>은 원작에 충실하면서도 제 할 일을 120% 다 했다고 볼 수 있다. 드라마 <갈릴레오>의 팬들이나, 원작의 독자들, 그리고 아무런 준비 없이 극장을 찾은 관객들 모두가 만족할 영화 한 편이 탄생했다.
2009년 4월 6일 월요일 | 글_하성태(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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