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를 키워 본 적이 있으신가? 이제 겨우 1년 8개월을 같이 살았을 뿐이지만 내게는 네 발을 가진 ‘또 하나의 가족’이 있다. 2007년 6월 8일에 태어났고 두 달이 지난 그해 여름에 만나게 된 아메리칸 코커스패니얼 종인 그 녀석의 이름은 ‘찰리’다. 어릴 적부터 집 마당에서 개를 키워왔던 까닭에 녀석이 처음 집에 올 때만 해도 이 녀석을 키우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밥 주고 똥 치워주고 가끔 데리고 나가 산책시켜주면 끝일 것이라 믿었던 것은 판단미스였다. 뒤늦게 안 사실인즉 코커스패니얼이 비글, 슈나우저와 더불어 소위 ‘3대 지랄견종’으로 불릴 정도로 부산스럽고 말썽피우는데 일가견 있어 여간 키우기 힘든 종이 아니라는 것. 얼마나 산만하냐면 잠시도 가만있지를 못하고 온 집안을 돌아다니며 사고치기 일쑤인데, 신발을 물어뜯고 벽을 갉아먹는 것도 모자라 책이란 책의 표지는 죄다 뜯어 헤쳐 놓은 탓에 책장 하단에 있는 책은 모두 표지가 보이지 않게 거꾸로 꽂혀있을 정도다. 요컨대 단 10초를 가만 앉아있지 못하고 하다못해 머리라도 흔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이 녀석. 그런 녀석을 1년 8개월 동안 금쪽같은 내 새끼라 여기며 같이 살아올 수 있었던 힘은, 철저하게 개인주의를 지향해온 내 삶을 조금이나마 변화시킨 힘은, 바로! 찰리로부터 나왔다.
말과 글로는 생명존중과 타인에 대한 배려와 이타적 삶을 떠들어왔지만 정작 실제 삶은 그런 것에 발치도 가보지 못한 터였다. 그런데 이 녀석을 키우면서부터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고 나의 부모님이 나를 보며 때론 안타까워했을 수많은 순간들과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예컨대 몸이 아파 낑낑대는 녀석을 보고 있을 때면 오래전 앓아누운 나를 바라보던 어머니의 눈빛이 떠올랐고, 같이 놀아달라고 간식 달라고 집안을 어질러 놓으며 어리광피우는 녀석을 보고 있노라면 갖고 싶은 물건을 쟁취하기 위해 밥을 굶고 방에 틀어박히기 일쑤였던 철없는 내 어린 시절의 모습이 오버랩되곤 했다. 강아지 한 마리를 키우면서도 이렇듯 많은 생각과 삶의 변화를 경험하는데 하물며 사람 자식은 오죽할라고. 요컨대 애완견이 아닌 반려견(伴侶犬) 즉 단순히 키우는 강아지가 아닌 한 공간에서 같이 생활하고 세월과 추억을 함께하는 가족으로서의 찰리는 이렇게 내 마음 속에 들어온 지 오래다.
영화 <말리와 나>가 보여주는 것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일과 신혼의 단꿈을 포기할 수 없었던 주인공은 아이를 갖는 것을 대신해 강아지를 선택한다. 즉 맞벌이에 바쁜 현실 속에서 좌충우돌 말썽장이 말리를 키우는 동안 아이 갖기를 늦출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래브라도 리트리버 종인 말리와 존 그로건 부부가 한 지붕 아래서 살게 된 시발점이다. 그저 한 때 자신들의 편의적 판단에 의해 데려와 키운 강아지가 숱한 말썽을 피워도 웃을 수 있었던 것은, 아이가 없었기 때문이고 어쩌면 아이가 생기기전까지 마음을 나눌 대상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이때까지 말리는 가족으로의 편입이 유보된 상태였다. 수단일 뿐 목적은 아니었다는 것. 그러나 아이가 하나 둘 셋 태어나고 부부의 시선과 관심이 아이에게로 옮겨가는 동안 말리는 애물단지로 변해간다.
이처럼 <말리와 나>는 애완견이라는 미명하에 강아지를 키우는 인간이 한 번쯤 겪을 법한 심적 물리적 변화를 세밀하게 보여줌으로써 흔치 않은 보편성을 획득한다. 이를테면 허전함을 채우기 위한 대체품으로 데려온 강아지와 인간 사이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이야기들. 그러니까 예쁘고 귀여운 강아지시절을 지나 덩치 큰 개로 탈바꿈하면서 관심이 줄어들고 분산되며 때론 남 줘버리고 싶기까지 한 순간들을 겪은 이들에게 영화는, 인간과 개의 소통방식을 통해 생명의 소중함과 가족의 의미를 이야기하고 있다. 세월이 흘러 이별을 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깨닫는 존재의 의미와 무게는 비단 인간에 국한되지 않는 법.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지점 역시 그러하다. 인간과 세월을 함께해온 모든 생명체에 바치는 뜨거운 눈물. 그것은 기억을 부르고 추억으로 아로새겨지며 개인의 역사가 된다. <말리와 나>에 담긴 진정성 또한 여기에서 비롯된다.
희망을 꺾고 싶을 정도로 힘든 시절이다. 삶이 힘들면 마음의 여유가 없어지고 심성이 강퍅해지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모두가 잔혹한 마음을 품고 우악스럽게 살지는 않을 터. 극단으로 치닫고 싶은 마음을 잡아당기는 힘은 생명에 대한 경외감으로부터 나온다. 가족이 그렇고 자신과 관계 맺은 모든 생명체가 그 대상이다. 생명경시풍조가 만연한 세상, 죽음을 가벼이 여기는 세태에 한 마리 개 앞에서 흘리는 눈물이 소중한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분명 가족이었던 그러나 뒤늦게야 가슴절절하게 깨달았던 사실 말이다.
당신이 외로움에 지쳐 따뜻한 정이 그리운 사람이라면, 그러나 스멀스멀 밀고 들어오는 끈적끈적하고 복잡한 인간관계에 대한 거부감이 앞서는 사람이라면 강아지를 키워보길 권한다. 분명 그 녀석은 당신이 주는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의 많은 것을 당신에게 아낌없이 줄 것이고, 삶의 기적까지는 못 될지라도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소중한 가치를 얻기에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하긴 삶의 기적이 별 건가? 애초부터 가족이었고 앞으로도 쭉 가족일, 불과 두 살도 안 된 찰리와 함께하는 동안 인간적 이기심이 작용하지는 않았는지를 되돌아보게 만든 영화 <말리와 나>를 보고 돌아온 늦은 밤, 나는 녀석을 데리고 동네 한 바퀴를 돌았고 가장 좋아하는 고구마 간식을 듬뿍 주었다.
2009년 2월 26일 목요일 | 글_백건영 편집위원(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