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뉴올리언스 병원을 배경으로 한 할머니가 임종을 목전에 두고 있다. 할머니 데이지(케이트 블란쳇)가 치료를 받고 있는 병원은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예상 진로에 따라 환자와 의료진들이 모두 대피해야 할 정도로 긴박한 상황에 놓여있다. 딸은 초로(草露)한 모습의 어머니가 생을 마무리하기 이전에, 그리고 어머니의 일대기를 정리하기 위해 지나간 과거들을 빠짐없이 기술한 일기장을 읽기 시작하면서 영화는 관객들로 하여금 영상 황홀경에 빠지게 만든다. 일기장을 들췄을 때의 과거 시제와 현재의 뉴올리언스 병원이 교차편집으로 구성되며, 교차편집은 일회적으로 그치지 않고 카트리나가 병원을 엄습하기 이전까지 과거시제의 플래시백과 플래시 포워드 기법을 꾸준히 교차하면서 진행된다. 일기로 시작되는 벤자민 버튼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전에 영화는 전사(前史)를 다룬다. 만일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 있다면 우리가 겪게 될 슬픔을 미연에 방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애상(哀傷)을 총체적으로 함의하는 전사는, 거꾸로 나이를 먹는 벤자민 버튼(브래드 피트)의 일대기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이전에 시간을 거꾸로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속성을 관객들에게 환기시켜주는 예습 차원의 시퀀스다.
강동원이 이명세 감독의, 정진영이 이준익 감독의 페르소나이듯, 브래드 피트는 데이비드 핀처 감독과 세 번째로 호흡을 맞추면서 핀처 감독의 페르소나로 자리매김한 듯하다. 영화를 진행시키는 영상 어법은 촌각을 다투면서 스피디한 즉각성을 요구하는 요즘 세태에 걸맞지 않게 시종일관 잔잔하면서도 차분한 어조로 관객들에게 다가온다. <포레스트 검프>의 각본을 맡았던 에릭 로스가 이번 영화의 시나리오를 맡았기에 두 영화는 전개 부분에 있어 상당 부분 유사성이 보인다. <위대한 개츠비>로 세인들에게 유명한 F. 스콧 피츠제럴드가 26살에 “인생에서 최고의 순간이 시작과 함께 오고, 최악의 순간이 마지막에 온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라는 마크 트웨인의 말에 영감을 얻어 집필된 원작은 50여 쪽 남짓한 분량의 매우 짧은 단편소설 <벤자민 버튼의 흥미로운 사건>이다.
일기를 통해 펼쳐지는 플래시백 시퀀스는 크게 세 단락으로 구분 가능하다. 첫 번째는 벤자민이 양어머니 퀴니(타라지 P.헨슨)의 사랑을 받으며 양로원에서 자라는 시기로 양로원에서 만나는 노인들을 통해 예측 불가능한 생의 바다를 간접적으로 체험한다. 블록버스터가 아닌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1억 5천만 달러라는 막대한 제작비가 영화 속 어느 부분에서 많이 소요되었는가에 관해서는, 유소년기 벤자민의 일찍 늙어버린 마스크를 구축하는 정교한 CG를 보면 납득 가능하다. 두 번째는 벤자민의 정신적 성장기를 구축하는 시기로 - 벤자민을 버린 생부 토마스 버튼, 선장 마이크와 엘리자베스(틸다 스윈튼)와의 조우를 통해, 세계대전의 격동에 휘말림과 더불어 삶의 다양한 스펙트럼과 육체적 정신적 교감을 배운다. 세 번째는 데이지와 더불어 경험하는 사랑과 행복의 중년 이후 시기다. 늙은 벤자민의 외모와, 연소했던 데이지의 외모가 비로소 밸런스를 맞추게 됨과 동시에 이들 커플의 정신적 유대감이 공고히 구축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에릭 로스의 전 시나리오인 <포레스트 검프>에서 “우리의 삶에 운명이 있는지, 혹은 그저 바람 같은 우연으로 이루어진 건지는 모르겠어요.”라는 대사처럼, 작가는 운명에 관한 함의를 영상 은유로 밀도 있게 묘사한다. 이와는 별개로 무용수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는 20대의 데이지가 파리에서 겪는 일화를 소개하는 시퀀스를 보면, 우연처럼 보이는 일련의 사건들이 군집해야 하나의 총체적인 사건이 형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총체적인 사건은 일련의 사건들이 모이되, 각각의 사건들이 적절한 타이밍에 자리매김 하지 않으면 결코 일어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카오스 이론적 발상의 시퀀스임을 알게 된다. 그와 더불어 데이지의 파리 시퀀스는,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으며 그 관계는 긴밀한 상호 유기적 관계를 지닌다는 인과론을 영상 가운데서 제시한다.
평범한 사람의 생체시계와 반시계 방향으로 작동되는 벤자민의 연대기는 보통 사람의 눈으로 바라볼 때엔 경이로움과 부러움의 대상이다. 하지만 그의 일대기를 통전적인 관점으로 바라보게 될 때 벤자민은 늙음의 생체 사이클에 있어서 보통 사람들과 역전현상이 있을 뿐 <하이랜더>(1986)처럼 불멸의 존재가 아니다. 시간 앞에서 영원한 것은 없음을, 영화는 벤자민의 젊음을 통해 역발상적 사고로 관통한다. 보톡스 중독과 매한가지로, 요즘의 추세를 통해 경외시되는 젊음 예찬이라는 트렌드에 대한 매서운 성찰이기도 하다. 플래시 포워드를 통해 시제가 현재로 넘어오면, 벤자민의 딸은 아버지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아버지 벤자민의 결단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딸은 아버지의 신체 증상에 대한 깊은 통찰이 전무했었기에, 벤자민이 그런 행동을 취하게 된 동기화에 관한 이해를 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남과는 특별한, 벤자민의 육신적 남다름이 사랑하는 가족과 트라우마를 유발케 됨을 알 수 있는 가슴 아픈 대목임과 더불어 벤자민의 젊음에 관한 역설적 비극이기도 하다. 사람이 일생을 순리대로 살든, 거꾸로 살든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에는 차이가 없음을 보여주면서 말이다.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소품은 두 가지로, 역 안에 설치된 시계와 벌새다. 시계는 벤자민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전의 전사(前史)와, 카트리나가 창고 안의 아날로그 시계를 침수하는 후반부가 매우 밀접하게 맞닿으면서 시간론에 관한 영상 함의를 제공한다. 그리고 영화는 심오한 영상 고찰로만 가득 차진 않는다. 관객의 웃음을 자아내는 코드도 하나 있는데, 생애 가운데 번개를 7번 맞은 사나이를 주목하라. 늙음에 관한 역발상을 통한 삶의 심오한 통찰과, 나이를 거꾸로 먹는다는 판타지적 소재와 환상적으로 결합하는 러브 스토리, 영화 속에 함의된 시간론과 인과론에 관한 통찰은 감각적 자극적 영상에 익숙한 관객들에겐 지난하게 다가올 수 있겠지만 심오한 영상 미학을 탐미하는 관객에겐 깊은 통찰력을 제공해줄 수 있는 놀라운 영화다.
2009년 2월 2일 월요일 | 글_박정환 객원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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