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내서 책을 읽을 때 책 속의 상황이 고스란히 현실로 나타난다면 책 속의 등장인물들은 현실 가운데서 어떤 일들을 할까. 이런 불가능한 상황을 가능케 하는 인물을 영화 속에서는 ‘실버통’이라는 대명사로 지칭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실버통 모(브랜든 프레이저)가 소설 속의 인물을 불러낼 때 현실 속의 인물이 소설로 빨려들어간다는 점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9년 전에 소리 내서 읽은 소설 ‘잉크하트’로 인해 책 속의 인물이 현실로 나온 대신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간 아내 리사를 찾기 위해 모는 딸 메기(엘리자 호프 버넷)와 모험의 나래를 펼친다.
판타지 영화에서 흔히 차용되는 선악의 이분법적 대립구도(모↔카프리콘)가 가족애와 결합하는 이 영화는, <황금나침반>(2007)처럼 현실을 뛰어넘는 초월적 상상력의 판타지에 모토를 두기보다는 <스파이더위크가의 비밀>(2008)처럼 현실을 토대로 구축된 이야기가 진행된다.
현실을 모토로 구축된 판타지라는 후자의 방식을 선택한 영화는, 영화 속 캐릭터들이 고유한 방식의 판타지적 질감을 가지고 관객과 대면하기보다는 현대 문명의 이기를 적극 받아들인다는 특성을 지니는데, 이는 기존의 판타지와는 차별화된 이 영화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약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카프리콘(앤디 서키스)이 말더듬이 실버통 다리우스를 통해 현실로 소환해낸 그의 부하들은 판타지물 특유의 고유하고 신비한 아우라를 지닌 캐릭터라기보다는, 얼굴의 문자 타투를 제외하곤 현실의 갱스터 이미지를 답습해냄으로 신비감을 영화 속에서 스스로 박탈한다는 점이다. 카프리콘의 부하들은 현대인의 복식에 기관총을 장착한 악당들로 상상하면 편하다.
모와 더스트핑거(폴 베타니)에 대한 영화 속 사연이 관객에게 납득이 되도록 설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영화 초반부가 진행되다 보니 몇몇 시퀀스에선 이 두 캐릭터의 행동양태 동인(動因)에 대해 선뜻 납득이 가지 않을 수 있다. 그와 더불어 책을 소리 내어 읽기만 해도 책 속의 상황을 현실로 소환 가능하다는 참신한 발상을, 영화는 구태의연하게 재생하고 만다. 가령 실버통이 소환해내는 문학 속 캐릭터 혹은 상황 - 이를테면 유니콘과 하늘을 나는 원숭이, <피터팬>의 악어들은 영화 속에서 유기적으로 캐릭터들과 상호 작용하지 못하고 단지 소환해낸 사례의 열거에만 그 역할이 편중된다는, 심하게 표현하자면 CG적 장식품으로 전락한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참신한 소재로 판타지를 이끌어내고자 한 영화의 이야기는 밀도가 다소 떨어지고 캐릭터는 산만하다. 심지 없는 캐릭터의 전형적인 사례는 불의 마법사 더스트핑거가 보여준다. 모를 위해 잃어버린 아내를 찾는 시퀀스를 유심히 살펴보라. 여하간, 전세계 30여개국에 출판되어 37주동안 뉴욕 타임즈 베스트셀러였던 동명의 원작을 영상화함에 있어, <케이 팩스>(2001)를 통해 탁월한 연출력을 보여주었던 이언 소프트리가 <잉크하트>의 메가폰을 잡은 것이 과연 적절한 선택이었나 의구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듯하다..
2009년 1월 22일 목요일 | 글_박정환 객원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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