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 가득 햇살이 가득 찼다. 보기만 해도 따스한 광경이다. 집안 구석구석까지 빛이 들어서있다. 그 광경만으로 반 허공에 뜨는 기분이다. 예쁘게 내려앉은 빛이 곱고 화사하다. 하지만 동시에 어딘가 내 것이 아닌 것만 같은 이질감이 느껴진다. 그 채광 좋은 집엔 젊은 부부가 산다. 자상한 상인(김태우)과 천진난만한 모래(신민아)가 아기자기하게 살아가는 둘만의 공간이다. <키친>은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이들이 어느 정도의 진심을 공유할 수 있는가에 관한 사연이다. 한 공간을 공유하고 있지만 때로 다른 것을 보고 생각하게 된 어떤 이들의 마음을 비추려 한다.
제목처럼 <키친>은 공간의 역할이 중요하다. 과장된 명도로 내리쬐는 그 구석구석엔 인물간의 감정이 먼지처럼 켜켜이 내려앉아있다. 상인과 모래는 서로를 신뢰하며 한치도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감정을 도발할만한 사건이 생긴다. 약 기운에 취하듯 어느 좁은 공간에서 마주한 외딴 남자의 스킨십에 몸을 맡겨버린 모래는 난생 처음 이상한 맛(?)을 느낀다. 따스한 햇볕에 기분이 나른해지듯 그 남자와의 망중한 같은 시간이 나쁘지 않다. 그렇다고 남편에 대한 마음이 변한 것도 아닌데 자꾸만 그 남자가 떠오른다. 그리고 그 남자를 만난다. 우연히도 한집에서 살게 된다. 특별한 비밀을 공유하게 된 그 남자 두레(주지훈)는 한식당을 차리려는 남편이 믿는 사부라 한다. 기이한 삼각관계에 놓인 세 사람은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한 집을 공유하는 관계로 거듭난다.
우연과 필연의 접합으로 이뤄진 삼각관계는 그 투명한 명도만큼이나 인공적이나 설득력을 지닌다. 보다 중요한 건 우연에서 비롯된 필연적 사연의 본심이다. 순수한 캐릭터로 위장에 성공하고 있으나 관계를 흔들기 위한 불순한 의도가 내재돼 있다. 마음이 변한 건 아니라지만 또 다른 누군가가 좋아진 모래의 마음을 마냥 두근거리듯 바라볼 순 없다. 궁극적으로 마냥 순수한 경험담으로 보존될 수 없는 것이다. 갈등을 느끼는 주체는 모래가 아니라 두 남자다. 비밀의 유효기간이 파기되는 순간 화기애애하던 두 남자 사이에 긴장감이 흐르고 웃음을 공유하던 공간은 침묵과 호통으로 채워진다. 애초에 소유하던 쪽과 새롭게 공유한 쪽의 감정이 점차 치열하게 맞부딪힌다. 결국 상황을 무마시키는 건 여자다. 엄밀히 말하자면 거듭나는 쪽은 여자다. 두 남자는 그저 무기력할 뿐이다. 소유하고 있다고, 소유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상대로부터 공유 당하고 있었음을 깨닫는 남자들은 허탈하게 주저앉는다.
<키친>은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한 도발적 물음을 품고 있는 듯 하지만 맺음과 끊음에 대한 사유에 가깝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서 뒤늦게 이해해버린 여자는 결국 어느 쪽도 택하지 않음으로써 새롭게 거듭난다. 그렇다고 그 모든 관계가 단절되는 것은 아니다. 결국 그것은 선택의 역량에 달렸다. 결혼과 이혼을 시작과 끝의 대립적 성향으로 인식하는 풍토 안에서 <키친>은 나름 진보적인 영화다. 그 변화를 결정짓는 주체도 여자다. 소유하기 원했던 남자들은 그저 선택을 기다릴 따름이다. 장사가 되지도 않는 양산가게를 경영하며 풍선처럼 부풀어오르듯 살아가던 모래는 그 특별한 경험을 거쳐 홀로서기를 꿈꾸고 시도한다. 남녀의 관계보다도 그 여자의 변화가 눈에 띈다. 항상 남자의 요리를 먹던 여자가 스스로 요리를 시도하고 남자들에게 요리를 떠먹여준다.
이야기 흐름은 명료하고 딱히 막히는 구석이 없다. 하지만 때때로 그 상황에 내재된 감정보다도 그 감정을 품은 그릇에 눈이 간다. 깔끔하고 정갈한 미장센은 안으로 삭힌 감정을 숨기기 좋은 수단이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지나치게 값비싼 그릇처럼 보인다. 보일 듯 말 듯 얕고 천천히 흐르는 감정선 사이로 시각적 묘미가 더욱 흥미롭게 파고 든다. 세심한 조리사의 손놀림 끝에 차려지는 빛깔 좋은 음식들의 향연은 트렌디한 재미를 더하고, 밝고 화사하면서도 뚜렷한 색감의 영상은 눈길을 끈다. 그 사이로 인물들의 감정변화가 확인되고 갈등의 양상이 감지되나 정작 그 감정에 몰입하기란 쉽지 않다. 영화 속의 인물들은 개성이 뚜렷한 만화주인공처럼 비현실적이다. 그 비현실적인 상을 통해 풍겨져 나오는 감정의 내음 역시 어딘가 비현실적이다. 그래서 머리로 이해가 가나 마음으로 체감되지 않는다. 다만 그 주변부의 다양한 정보를 즐기느라 여념이 없다. 깊은 맛보단 인공적인 자극을 제공하는데 익숙하다. 고운 빛깔로 치장해 눈요기에 좋지만 정작 손이 가지 않는 음식과 같다. 착향료나 감미료처럼 인공적인 색과 맛이 인지된다. 너무 예뻐서 되려 맛보기 불편하다.
<키친>은 예쁘고 아기자기한 영화다. 투명하고 또렷한 색감처럼 인물들도 또렷하고 투명하다. 도발적인 사연을 품고 있지만 착하기만 한 인물들은 그 사연마저 순수하게 표백시킨다. 그 덕분에 <키친>은 극히 특별한 사연으로 속박된다. 보편적인 질문을 던지려 하지만 그 특수한 실례가 답변의 영향력도 제한한다. 너무도 투명하여 이 세상 것으로 보이지 않는 햇살만큼이나 세 사람이 이루는 사연도 반 허공에 떠있는 느낌이다. <키친>은 편향적인 답변으로 이뤄진 앙케이트다. 보편적인 수치를 얻고자 했던 물음의 가능성이 국한된다. 물론 그게 잘못은 아니다. 사랑에 정의가 없듯 어떤 로맨스도 가능성을 의심받을 수 없다. 단지 그것을 사랑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의 차이다. 도발적인 질문이 품은 답안지의 가능성에 비해 편향적인 답변을 수집했다.
2009년 1월 22일 목요일 | 글: 민용준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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