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마지막, 기차를 타고 떠나는 기영은 “어둠이 깊다는 것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라고 독백한다. 그 시간, 그를 사랑했기에 살인을 할 수밖에 없었던 다방 여급 영숙은 경찰차에서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다. 물론 관객과 감독은 이 모든 상황을 알고 있지만, 사내는 그녀의 상황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설사 피치 못 할 사정 때문에 역에 나타나지 않아 혼자 떠날 수밖에 없을 지라도, 기영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독백에 최소한 “기다렸지만 어쩔 수 없이 혼자 떠나게 되서 미안하다”라는 말 한 마디 정도는 들어갔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민주화와 민족을 앞세워 자신을 사랑했던 한 여인의 기구한 운명 따위는 안중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영화는 이런 상황을 희망의 다른 이름이라며 내레이션토록 만들고 있으니 아연실색할 지경이다. 한 여자의 인생을 나락으로 밀어 넣는 것, 이미 바닥에 떨어져 탄광촌이라는 막장까지 흘러들어온 티켓다방 여급을 살인자로 만들면서까지 민주화로 상징된 남성이데올로기가 그렇게 소중한 것이었냐는 말이다. 1990년대 코리안 뉴시네마의 씨를 뿌렸다는 박광수 감독의 <그들도 우리처럼>에 대한 이야기다. 이러한 느낌은 이충렬 감독의 다큐멘터리 <워낭소리>로 다시 이어졌다.
지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선 보였고 2008서울독립영화제 장편경쟁부문에 이름을 올렸으며, 내년 1월 열리는 선댄스국제영화제 다큐멘터리 국제경쟁부문에 출품되기도 한 <워낭소리>는, 평생을 밭에서 살아온 촌로와 30년을 한 결 같이 그의 곁을 묵묵히 지켜온 늙은 소의 이야기를 그린 다큐멘터리다.
노인은 일흔 아홉 평생 동안 소를 도구삼고 벗 삼아 일만하고 살아온 사람이다. 소에게 해가 될까봐 농약도 안치고 우직하게 전근대적 농업방식을 고집한다. 소의 도움으로 9남매를 키워냈고, 평생을 함께했으니 자식보다 더 소중한 존재일 터이다. 영화 내내 할머니는 “시집 잘 못 와서 고생만 죽도록 하고 살았다”며 “소가 없어야 내가 고생을 안 할 텐데”라고 푸념해댄다. 그도 그럴 것이 소가 없다면 할아버지가 밭에 나갈 일도 없을 테고 그래야 할머니의 힘든 일상이 종지부를 찍을 것이기 때문이다. 젓가락처럼 가늘어진 왼쪽 다리에 발가락 탈골이 생겨도 몸에 밴 부지런함 때문에 노인은 쉼이 없다. 어김없이 소에게 꼴을 먹인 후 밭으로 끌고 나가니, 사람이나 소나 못 할 짓이다. 1년 밖에 살 수 없다는 수의사에 말에도 아랑곳 않고 소를 부리는 노인.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벌어지는 소의 죽음. 쓰러지기 직전까지도 땔감을 지어 나른 녀석이었다. 죽음 직전에서야 평생을 옭아맨 코뚜레를 풀어주는, 클로즈업 된 노인의 거친 손은 둘의 지나온 시간을 말해준다. 죽음을 앞두고서야 비로소 해방되는 기구한 운명이 여기에 있다.
<워낭소리>는 보는 이의 가슴을 한 없이 요동치게 만들다가 기어이 눈물짓게 만드는 놀라운 다큐멘터리다. 영상과 편집, 관객의 정서적 동참을 끌어내는 흡인력까지, 어느 것 하나 나무랄 데 없는 작품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른 것은 인간의 이기심 때문이었다. 어찌 이토록 매몰차게 일을 부린다는 말인가.
소를 좀 쉬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을까? 영화적으로 보자면(노인은 곧 소라는 점에서) 논점이 빗나간 것임을 잘 알고 있고 노인을 비난하자는 것은 더욱 아니다. 기계화영농을 거부한 채 유기농에 매달리는 노인의 고집스러움도, 농사로 아홉 남매를 키우자니 소의 희생이 요청되었다는 점도 이해하고 남음이 있다. 어차피 소의 역할이란 게 농사를 짓거나 고기를 제공하거나 품종개량에 이용되는 정도에 국한되지 않던가. 그럼에도 나는 이 영화가 한국적 정서와 인간과 동물의 교감을 진정성 넘치게 빚어낸 것과는 다른 측면의 교훈을 제공할 수도 있다고 믿는다. 달리 보면 영화 속 소의 일생은 분명히 인간의 이기심이 빚어낸 비극 그 자체일 수 있고 해외상영의 경우 동물학대 차원으로 해석될 여지도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식들과 할머니의 간청에 못 이겨 소를 팔러간 우시장 장면에서 소가 눈물을 흘릴 때 <식객>에서 대령숙수 경연의 최종 심사를 앞둔 성찬을 위해 도살장으로 들어가던 소의 눈망울이 오버-랩 된다. 영화의 마지막, 노인은 “좋은 곳으로 잘 가”라고 말한다. 할머니는 “저 놈이 노인네 겨울 따뜻하게 보내라고 나무를 다 해놓고 갔다”며 안쓰러운 표정을 짓는다. 다큐멘터리가 창작자의 의도와 주관에 따라 편집된다는 점에서 영상화된 완성판에 담기지 않은 더 많은 이야기도 있을 것이다. 소의 죽음이후 누워버린 노인의 뒷모습에서 차마 입으로 전하지 못한 그리움과 슬픔의 무게를 절절하게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돌아누운 노인의 신음소리가 미안하다는 말을 대신하는 것처럼 들리는 건 이 때문이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건넨다는 것, 생각처럼 쉽지 않은 일임에 분명하다. 사실이지 너무 미안한 지경에 이르면 미안하다는 말조차 잘 안 나오기 마련이다. 오죽하면 Sorry Seems To Be The Hardiest Word 라는 노래도 있겠나. 그래도 <나의 친구 그의 아내>의 재문은 말한다. “빈말이라도 미안하단 말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느냐”고. 그렇다. <그들도 우리처럼>의 김기영도, <나의 친구 그의 아내>의 예준도, “미안하다”고 말했어야 했다. 자신으로 인해 인생을 담보 잡힌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이기 때문이다. 마음에 담아 놓은 것만으로 부족할 때가 있다면 바로 이런 순간들이다. 입으로 소리 내어 미안하다고 말해야 할 때가 분명 존재한다는 것이다.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다. 마음의 짐이 너무 무거워 미처 말하지 못했다면 이제라도 말하자. 미안하다고.
2008년 12월 19일 금요일 | 글_백건영 편집위원(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