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진, 김혜성 둘을 데리고 언젠가는 게이바에 한번 가야지 생각은 했었지만
막상 둘을 데려가자니 좀 그랬다.
내가 가자고 했는데 “싫어요!”하면 어쩌나 했다.
그래서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데려갔다. ㅋ
인사동에서 저녁을 먹고 그냥 술 한 잔 하자며 슬쩍 데려갔다.
게이바라고 해서 뭐 다를 것도 없다.
손님들이 모두 남자라는 것,
그들이 모두 게이라는 것 외엔.
그래서 모르고 들어 간 경우에는 이곳이 게이바인지 모르는 사람들도 꽤 많다.
시간이 흐르면 게이들이 뿜어내는 기운에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게 되지만.
현진군과 혜성군 그리고 그들의 매니저와 프로듀서 이렇게 우르르 끌고
보무도 당당하게 게이바의 문을 열어젖혔다.
“어서 오세요.”
낭랑한 목소리.
현진, 혜성 어째 벌써 눈치를 깐 냄새다.
언뜻 얼굴을 보니 놀란 느낌이...
뭐, 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주문을 했다.
게이바에 있던 손님들도 놀라긴 마찬가지.
느닷없이 들이닥친 꽃미남 배우들 때문에 술렁이기 시작했다.
때마침 바 곳곳에 설치돼 있는 모니터에선 현진군이 출연한 캔커피 광고가 나오고.
오호 분위기 묘하게 흘러간다.
술이 몇 잔 오가고 두 청년에게 “혹시 남자에게 대시 받은 적이 없냐?”고 물었다.
혜성군은 없다고 했고 현진군은 모델 일을 하던 시절 그런 적이 있다고 했다.
오호, 다들 귀가 쫑긋.
그러나 뒤이은 그의 말.
“무서워서 도망 갔어요~~~”
이구.
다들 뭔가 뒷 이야기가 궁금했던 탓에“뭐가 무섭냐?”, “얘기라도 해보지”타박을 한다.
현진군은 그 때는 어렸을 때라며 지금은 무섭거나 그렇지는 않다고 했다.
“혜성이처럼 예쁘고 귀여운 남자가 대시한다면?”
“친구가 될 순 있지만 사귀자고 한다면 아주 곤란할 것 같다.”는 답이 나온다.
역시 현진군은 모범생과.
그렇게 진지한 대답을 원한 건 아니었는데 말이다. ㅎㅎ
술이 좀 더 들어가면서 내 소년 시절의 연애 얘기,
광수가 석이를 만났을 때의 얘기들이 나왔다.
“석이가 꼭 현진이 너를 닮았다.”고 하니까 현진군의 얼굴이 금세 빨개진다.
모범생 청년 현진군을 놀려 먹는 게 재밌어서 자꾸만 현진군에게 얘기를 하게 된다.
프로듀서였는지 조감독이었는지 자기의 동성애적 경험담에 대해서 털어 놓았다.
친구에게 끌린 적이 있다는.
모두의 눈이 쏠린다.
하지만 그 다음도 거의 허무.
그냥 끌리기만 했을 뿐이란다.
그 때 불쑥 웨이터가 우리 테이블로 오더니 맥주 한 병을 건넨다.
저쪽 테이블에 있는 손님이 혜성군에게 술을 보냈다는 것.
혜성군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또 그 다음엔 다른 테이블에서 현진군에게 술을 보내 왔다.
현진군도 마찬가지로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내가 건배를 제의했고 다들 아무 생각 없이 술을 들이켰다. 쭈욱.
여기서 잠깐.
게이바 수칙 1.
게이바에서는 다른 테이블로 술을 보내는 건 “니가 맘에 든다."는 얘기.
그 술을 받으면? 말해 무엇 하리오 “OK!"싸인.
둘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깜짝 놀란다.
그 모습이 귀엽다.
설마 오늘 술을 보낸 이들이 이 배우들에게 그런 흑심을 품었겠나?
혹여 흑심을 품었던들 언감생심 꿈이라면 모를까 진짜 대시는 아니었을 터.
술을 보냈던 이들이 싸인을 받으러 왔고 둘은 흔쾌히 싸인을 해주었다.
잔뜩 긴장했던 자리는 그렇게 풀어졌다.
둘은 사람들을 관찰하기도 했고 내게 묻기도 했고 서로 이야기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게이들과 섞여 즐겁게 밤을 보냈다.
한 번의 게이바 술자리로 게이들을 알게 되는 건 아니지만
낯선 곳에서 수많은 게이들과 아무렇지도 않게 어울린다는 것만으로도
이성애자 남자들에겐 정말 새로운 경험이 되고
어떤 벽 같은 게 허물어지는 시작점이 되는 지도 모른다.
그 이후로 두 사람 모두 나를 대하는 태도가 훨씬 가까워 졌다.
그렇게 우리는 소소만을 만들기 위한 준비를 착실하게 해 나갔다.
드디어 촬영을 하루 앞둔 날이다.
좀처럼 잠이 오질 않는다.
뭘 빠트리고 있는 건 아닌지
아니, 내가 정말 연출을 해도 되는 건지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어떡하지?
촬영을 하려면 잠을 좀 자야 한다는 생각에 잠자리에 들었지만 잠이 오질 않았다.
그렇게 한 두 시간 흘렀을까?
안 되겠다 싶어 다른 사람의 영화를 꺼내 들었다.
집에 있는DVD를 뒤지다가 <와니와 준하>, <8월의 크리스마스>를 발견하고 좋아라하며 틀어 보았다.
둘 다 내가 좋아하는 멜로 영화.
첫 촬영을 앞두고 보는 맛이 남다르다.
어떤 장면은 몇 번을 돌려 보기도 했다.
다른 게 없나 하고 서랍을 뒤지다가 <폴라로이드 작동법>을 발견했다.
어?
이 게 왜 여기 있는 거지?
김종관 감독이 우리 사무실에서 단편 작업을 할 때 받았던 건가?
그랬던 것 같기도 했다.
<폴라로이드 작동법>을 보니 더 두려워 진다.
종관이는 저렇게 배우들의 감정을 잡아 냈구나.
저렇게 호흡 조절을 했구나.
정유미의 저 연기는 지금 봐도 좋구나.
그런데 난?
난 종관이만큼이나 할 수가 있을까?
난 준비가 돼있나?
다시 또 끝 모를 불안감이 나를 괴롭혔다.
결국 새벽까지 뒤척이며 괴로워하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아뿔싸, 눈이 떠진 건 집합 시간을 채 30여분 남긴 6시 30분.
부랴부랴 이를 닦고 고양이 세수를 마친 다음 지하철을 탔다.
가면서도 내내 불안하다.
지금이라도 연출은 못한다고 할까?
아니다.
돌아가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와 있다.
아, 어쩐다...
그래, 어쩔 수 없어.
스태프, 연기자들을 믿고 가는 수밖에.
촬영장에 도착했다.
벌써 분주한 스태프들.
나를 믿고 저렇게 열정을 불태우는 사람들이다.
저예산 독립단편영화에 참여하는 연기자, 스태프들은 모두 노 개런티다.
돈 한 푼 받지 않고도 새벽부터 밤까지 며칠씩 고생할 수 있는 건 오직 영화를 좋아하는 그 열정 때문이다.
그래, 결심했어.
오늘 나의 임무는 감독이야. 두 주먹 불끈 쥔다.
카메라 셋팅을 준비하는 동안 연기자들과 리허설을 해본다.
넌 여기서 이렇게
또 너는 저기서 이렇게...
“이 때 민수는 무슨 생각을 할 것 같아?” 누가 봐도 딱 고등학생으로 변신한 혜성에게 물었다.
“처음부터 겁을 먹지는 않을 거 같아요.”
내게 동의라도 구하는 듯 빤히 쳐다본다.
혜성이는 여리게 보이지만 강단이 있는 녀석이다.
작지만 몸도 다부지다.
내가 생각한 민수도 그런 인물.
처음부터 조짐이 좋다.
오늘 찍어야할 분량은 모두 26컷.
그것도 모두 낮 장면이다.
초보 감독이 첫날 소화해 내기에는 좀 무리가 아닐까?
다시 또 걱정이 된다.
그렇지만 할 수 없다.
이 영화는 저예산 독립단편영화이고
난 충무로에서 장편영화 10편을 제작한 제작자 출신 감독이 아닌가!
“슛 들어갑니다.”
조감독의 슛 싸인 소리에 드디어 촬영이 시작된다.
배우들이 움직이고 카메라를 맨 촬영감독이 배우들을 쫓는다.
“컷.”
모든 배우와 스태프들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NG."를 외치며 배우들에게 달려간다.
.......
어둑어둑해질 무렵 현진이의 연기를 끝으로 촬영이 끝났다.
하루가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겠다.
오늘 주어진 분량은 모두 찍었다.
“해냈다. 광수, 잘 했어.”
초보 감독으로 변신한 나를 향해 잘 했다고 칭찬을 해 주었다.
이제 겨우 첫발만 뗀 거지만 벌써 행복하다.
그리고 나를 믿고 같이 달려가는 배우들, 스태프들 모두에게 고맙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소름이 쫙 끼친다.
헉, 근데 안 붙으면 어떡하지?
다시 온갖 걱정이 쓰나미처럼 몰려온다.
오늘 또 잠자기는 다 글렀다. ㅠ.ㅠ
다음에 계속... to be continue...
글_김조광수 감독(청년필름 대표) 광수닷컴 놀러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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