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했고
청년필름이라는 영화사를 만들고 나서
10년 동안 10편의 장편영화를 제작하면서도
영화 연출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연출은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2007년 가을,
갑자기 영화를 연출하고 싶다는 생각에 잠을 못 이루는 날을 맞았다.
연출이 너무 하고 싶은 들뜬 마음에 밤을 꼬박 새우게 되었다.
신내림이었을까?
신열도 있었던 것 같다. ㅋㅋ
그 날 이후 어떤 영화를 만들까 궁리하면서
제작과는 다른 연출이라는 영역의 재미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 난 내가 소년이었던 시절의 이야기를 짧은 영화로 만들게 되었다.
겁 없이 뛰어든 연출이라는 일,
부족한 자신을 발견하며 좌절에 빠져 허우적대다가도
맘에 드는 장면 하나를 발견하고는 해냈다며 우쭐해하기도 했다.
그렇게 내 감정은 하루에도 몇 번씩 널뛰기를 했다.
그리고 이제
부끄럽지만
첫 연출작을 세상에 내놓는다는 설렘에 행복하기도 하다.
나와 일하는 감독들이 그럴지도 모른다.
“너나 잘 해!”
그래도 두려움은 없다.
난 초보 감독인걸 뭐.
소년(나이는 중년이지만 데뷔감독이니까 ㅋㅋ) 감독, 시나리오를 쓰다.
영화를 만들기로 했지만 어떤 영화를 만들어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연출 데뷔작인데,
훌륭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부끄럽지는 않아야 할 것 아닌가?
마음이 무거웠다.
소년 감독의 데뷔, 출발선부터 삐걱거리는 건가?
어떤 게 좋을까?
머릿속에 그득했던 수많은 이야기들 중에 내 맘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작은 이야기를 찾아야 했다.
그러다가 떠오른 게 '솔직한 내 마음을 잘 담아내자'는 것이었다.
그래, 맞아.
내가 경험한 이야기를 잘 풀어 보자.
갑자기 마음이 홀가분해 졌다.
내 경험이라면?
옳지.
난 로맨티스트.
그래, 멜로를 하자. 멜로.
내 지난날의 로맨스 중에서 가장 영화적인 것을 끄집어내기로 했다.
이 건 어떨까?
지하철에서 만난 아저씨의 타우너 트럭을 타고 부산까지 출장에 따라 갔던 일?
그래, 지하철에서의 끌림.
눈빛 교환.
그 아저씨의 쑥스러웠던 소년 같은 얼굴.
출장 가는데 같이 가자며 부끄럽게 짓던 미소.
사무실에 들러서 차를 가져 오겠다고 떠날 대의 허둥지둥 대던 귀여움.
마침내 나타난 타우너 트럭.
푸하하. 이 아저씨 정말 귀여운 걸.
처음 데이트에 타우너 트럭이라니... ㅋㅋ
아, 아니야.
귀엽기는 한데 좀 샤방하지는 않은 것 같아.
더 샤방샤방한 이야기가 없을까?
내겐 샤방샤방이 필요해!
그랬다.
한국의 몇 안 되는 퀴어영화들이 지나치게 진지하고 무겁고 슬픈 쪽인데
나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나란 사람, 진지 무게와는 좀 거리가 있지 않은가?
난 발랄이 어울려! 맞아! 발랄 상쾌 샤방!!!
다른 거 찾아야 해!
또 며칠이 그렇게 흘렀다.
그러다가 전광석화처럼 나를 강타한 그 소년.
아, 석이.
그래 석이가 있었지.
20년도 넘은 나의 진짜 소년 시절, 나를 달뜨게 했던 소년 석이.
아~ 그 녀석을 다시 만나 보자.
그래 아주 샤방하게.
그리고는 타닥타닥 써내려간다.
'소년, 소년을 만나다.'
1. 버스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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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어느 날.
민수는 좌석에 앉아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잡지 혹은 책을 읽고 있다.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려던 민수는 뭔가(물건은 아직 뭔지 잘 모르겠다. 사과나 귤일까? 그냥 봐서는 평범한 건데 알고 보면 의미가 있는 거면 좋겠다.)를 흘리게 되고 그게 굴러가서 어떤 사람의 발 밑에 닿게 된다.
아니, 어떤 이의 발이 그걸 멈추게 한다.
인터컷. 누군가의 발.
그 발을 따라 올라가면 덩치 큰 소년 석이.
석이와 눈이 마주치는 민수.
헉, 그 놈 참 잘 생겼다.
민수의 가슴이 콩닥콩닥 뛴다.
얼른 눈을 피한다.
주우러 가야 하나? 잠깐 망설인다.
물건을 줍기 위해 석이에게로 가는 민수.
더 크게 뛰는 민수의 가슴.
물건을 줍다가 스치게 되는 소년들의 손. 너무나 장르적인 설정. 코믹하게? 될까?
다시 마주치는 소년들.
떨리는 가슴 때문에 민수는 석이를 제대로 보지도 못한다.
가슴은 또 왜 이리도 크게 뛰는 거야?
이 소리 설마 저 녀석에게도 들리는 건 아니겠지?
설마?
아, 쪽팔려.
자기 자리로 돌아오는 민수.
어느새 아줌마 한분이 자리에 앉아 있다.
천연덕스럽게 민수의 가방을 챙겨주는 아줌마.
민수, 석이 쪽을 보고 싶지만 용기가 없다.
더 두근거리는 가슴.
용기를 낸 민수, 석이 쪽을 보는데 바로 앞에 와 있는 석이.
민수의 놀란 눈.
진정되지 않는 민수.
얘가 왜 내 옆에?
그럼 얘도 나를 좋아한다는 뜻?
한참을 보는 소년들.
이번에는 석이가 먼저 눈을 돌린다.
혼란스러운 민수.
그렇지만 다시 석이를 보지는 못한다.
민수가 내려야 할 정류장에 다 와 간다.
어떡해.
이제 내려야 한다구!
그런데 석이는 민수를 보는 건지 아닌지 모르겠다.
내리는 척 하면서 석이의 앞을 지나쳐 문 쪽으로 간다.
석이의 눈빛이 살짝 흔들린다.
민수의 가슴이 또 방망이질 한다.
민수가 벨을 누른다.
이어 들리는 벨소리.
나 내린다구.
알겠니?
나 이번에 내려!!!
석이를 본다.
석이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하고 민수가 심호흡 한 번 크게 하고 내린다.
2. 정류장
버스에서 내린 민수, 뒤 돌아 보지 않는다.
보고 싶지만 보면 안 된다.
이 때 등장하는 연애 박사.
‘록키호러픽쳐쇼’에 등장하는 해설자처럼 차트를 보여 가면서 설명할 수도 있다. 더 재밌는 아이디어가 필요한 장면.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처럼 기타맨을 등장시켜? 아, 뭔가 더 재밌는 아이디어를 찾아야 해.
길거리 게이 연애 수칙.
길거리에서 식성이 되는 상대를 만났을 때.
바로 대쉬한다.
퍽. 상대가 바로 주먹을 날린다. 탕. 총을 쏜다. 아니면 칼로 몇 번 쑤신다. “고마해라. 많이 묵었다 아이가.”
나를 좋아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계속 쳐다본다. 상대도 나를 그윽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그리고 내 앞으로 다가온다. 와서는 지갑을 뽑는다. 놈은 도망친다. 아, 내 지갑~~~
그러면 어떡하나?
확인하는 방법.
일단 천천히 걷는다.
최대한 천천히.
그러다가 따라오던 넘이 나를 앞지르면 쫑이다.
나를 따라 오는 게 아닌 것.
내가 최대한 천천히 걷는 데도 나를 앞지르지 않으면 그건 나를 따라오는 게 맞다.
일단 확률 50% 이상.
그러다가 속도를 조절한다.
조금 빠르게 걷기도 하고 또 느리게...
내 속도에 그 넘이 맞추면 확률 100%.
지독히도 계속적으로 살피라. 그렇지 않으면 개망신 당하거나 맞는다. ㅠ.ㅠ
다시 현실로.
민수가 천천히 걷는다.
뒤 돌아 보고 싶은 마음 굴뚝이지만 참는다.
속도를 조절한다.
버스가 출발하고 100미터 이상 갔을 때 쯤 돌아본다...
더 알려주면 스포일러에 해당하니 여기까지만. ^^*
그래, 이 이야기로 하자.
그럼 지금부터 시나리오를 써야지.
아, 문제가 생겼다.
시나리오가 써지질 않아.
당췌 써지질 않는다구.
어쩌나.
이야기는, 장면은 다 떠오르는데 시나리오가 한 줄도 써지질 않았다.
아, 난 어쩌면 좋아.
감독되기 이렇게 어려운 거야?
다음에 계속... to be continue...
글_김조광수 감독(청년필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