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몰고 가던 진(오다기리 죠)은 차사고를 낸 뒤 뺑소니를 치려다 사람을 칠뻔한 상황에서 잠에서 깬다. 모든 것은 꿈이었다. 하지만 너무도 생생하여 그 현장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놀랍게도 현장엔 진짜 자신이 꿈 속에서 들이받은 자동차가 있었다. 하지만 사고의 용의자는 집에서 자고 있던 란(이나영)이다. 그녀는 집에서 자고 있다고 말하지만 차는 심하게 찌그러져 있고 무인 카메라에 찍힌 사진마저도 본인이 확실하다. 남자가 꿈을 꾸면 여자는 잠든 사이 자신도 모르게 행동한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두 사람의 관계 안에서 기이하게 뒤틀린다. 진과 란은 배타적인 성별의 육체로 구분된 자웅동체다.
꿈은 꿈이고 현실은 현실이라지만 진과 란은 그 속세의 진리로부터 타자화된 영역을 공유하고 있다. 너무나도 생생한 진의 꿈은 란의 몽유적 현실로 도래한다. 진과 란이 나란히 잠들게 되면 진이 꿈을 꾸고 란이 행동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람의 꿈과 현실은 각자에게 역설을 부여한다. 진은 자신의 꿈을 통해 사랑했던 과거의 연인(박지아)을 찾아가지만 그때마다 란은 자신이 혐오하는 옛 연인(김태현)에게 무의식적으로 발길을 옮긴다. 남자는 잊지 못한 사람을 매번 꿈으로 찾아가지만 여자는 지우고 싶은 사람을 자신도 모르게 대면하고 돌아온다. 진의 가상적 행복은 란의 현실적 불행으로 중첩된다. 마치 이란성 쌍생아의 육체를 지닌 도플갱어(Doppelganger)처럼 그들은 서로를 배반하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 ‘두 사람은 한 사람입니다’라는 의사(장미희)의 진단처럼 두 사람의 육체는 하나의 자아를 나눠 담은 일종의 경계와 같다.
흰색과 검은색은 같은 색이다(白黑同色). 두 사람의 분리된 삶은 별개의 자아가 꿈꾸는 배반적 욕망이다. 진과 란은 사랑으로부터 잉태된 배반적인 감정의 형태로 구현된다. 꿈과 현실의 괴리만큼이나 사랑이란 감정의 양극단에서 진과 란은 대립하면서도 서로를 감싼다. 하나의 욕망이 두 개의 극단적 자아로 분리될 때 그 이룰 수 없는 감정은 두 개의 욕망을 파국으로 몰고 간다. 하나의 욕망에서 비롯된 두 개의 자아는 서로를 배반하는 형태로 동떨어지려 하지만 결국 자석의 다른 극처럼 서로를 끌어당기는 운명으로 점철된다. 결국 진과 란은 동일한 감정이 형성시킨 극단의 양태로 물화되지만 비로소 하나의 운명으로 점철되어 완전한 일체를 이룬다.
<비몽>은 김기덕 감독의 자의식이 해부한 로맨스의 추상적 견해, 혹은 그로부터 건축된 로맨스의 피상적 추론이다. 강한 자의식에서 비롯된 추상적 이미지는 때때로 그 안으로 매몰되듯 아득해지기도 하지만 궁극적인 의지로 상징적 의도들을 일관된 양식으로 건축해나간다. 남자와 여자, 꿈과 현실, 그리움과 혐오, 재회와 이별, 삶과 죽음. <비몽>에서는 대립적인 형태로 구현된 심리적 잠재태들이 구체적인 양태로 나열되고 그것들은 하나같이 두 개로 양분된 육체적 자아로서 내면의 너비를 구체화한다. 하나의 감정을 완성하는 양면의 육체가 서로를 향할 때, 그 지난한 사랑도 완전해진다. 잠을 자는 것과 죽는 것이 다르듯, 꿈과 현실로 양분된 극단의 욕망은 비로소 자신의 육체를 소멸시킨 후에야 완벽하게 교감한다. <비몽>은 극단적인 수난을 통해 정신적인 변태를 거듭한다는 김기덕 감독의 양식적 지론이 부분적으로 날것처럼 복원된 작품이다. 그는 여전히 육체적 피탈(避脫)의 경지를 꿈꾸는 열반의 지향점을 그린다. 상징적인 욕망들로부터 구현된 화법은 <비몽>에서도 유효하며 이는 김기덕으로 수렴하는 개인적인 자의식에 충실하기에 영화를 사적인 사유 양식에 가둬놓은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대칭구도의 문학적 발상에서 비롯된 상징성은 극단적인 구체화를 거쳐 우아한 시적 양식으로 거듭난다. 궁극적으로 잿빛과 같이 출발되던 세계관은 고요하게 투명해진다. <비몽>은 흑백의 조화처럼 이상적인 공존을 꿈꾸고, 현실로 투영한다. 그 안에서, 얇은 삶 하이얀 죽음은 고이 접어 나빌레라.
2008년 10월 8일 수요일 | 글: 민용준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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