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를 알 수 없는 전화 한 통과 함께 제리(샤이아 라보프)는 이상한 음모에 빠져든다. 자신의 계좌로 입금된 75만 달러와 자신의 방으로 배송된 각종 첨단 무기들 앞에서 어리둥절하고 있는 제리에게 신원을 알 수 없는 여자의 목소리는 방에서 달아나라고 경고하고 이윽고 FBI가 쳐들어와 테러용의자로 제리를 체포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전화 한 통과 함께 레이첼(미쉘 모나한)도 이상한 음모에 빠져든다. 연주를 위해 워싱턴으로 떠난 아들의 신변을 위협하는 신원을 알 수 없는 여자의 목소리는 레이첼에게 명령을 하달한다. 평범한 청년과 평범한 싱글맘은 그렇게 미궁 속을 헤매듯 정체 모를 음모의 게임 위를 날뛰는 두 개의 말이 된다.
<디스터비아>를 통해 히치콕의 <이창>을 하이틴 스릴러로 변주했던 D.J 카루소 감독은 전작에서 출연했던 샤이아 라보프와 함께 또 한번 히치콕의 껍데기를 뒤집어 쓴 듯 하다. <이글 아이>는 누명 쓴 남자의 광활한 도주를 그려낸 히치콕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를 모티브로 둔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 외부적 형태와 달리 내부적 야심이 좀 더 광활하다. 사실 <이글 아이>가 지닌 주제 의식은 현대SF무비나 근래 액션 블록버스터들에서 줄곧 발견되고 제기되던 일원화된 정보화 시대의 맹점에 대한 경고와 동일하다. 부분적인 이미지의 유사성이 발견되는 영화의 목록만 열거해도 상당하다. <본 얼티메이텀>이나 <다이하드 4.0>과 같은 액션 블록버스터에서 차용되던 무인화 정보 시스템의 폐해를 비롯해 <매트릭스>나 <터미네이터>와 같은 인공지능 시스템의 디스토피아 세계관, 더 멀리 나아가서는 스탠리 큐브릭의 어떤 대결적 구도의 세계관-직접적인 스포일러라 언급을 피함-과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거창한 의식구조는 황망한 내러티브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사실 <이글 아이>가 지닌 가장 큰 매력은 음모의 주체가 누구인가라는 의문을 발생시킨다는 점이다. 세상의 모든 정보를 조작하고 신호 체계를 조종하는 음모의 주체는 가히 절대자에 가까운 구도로 음모의 숙주들을 내몰지만 정작 그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 식상해진다. 문제는 단지 그것이 식상함으로 내려앉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이 구현했던 절대적 능력 자체에 대한 의문까지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디지털 신호 체계를 장악한 그 정체불명의 존재가 과감히 모습을 드러내는 지점부터 <이글 아이>는 현저히 무뎌진다. 종래엔 그 음모에 귀속된 인물에 대한 적절한 설득력을 제시하지 못한다. <이글 아이>는 제공권의 야심에 비해 빈틈 많은 전술을 구사한다. 흥미로운 초반설정은 호기심의 제공권을 장악하지만 지나치게 부풀린 궁금증에 비해 결정력이 부실하다. 초현실적 기대감이 비약적 논리로 몰락하는 양상이다. 물론 초반의 카체이싱을 비롯해 킬링타임용 볼거리는 틈틈이 제공된다. 하지만 그런 덕분에 정권교체의 뉘앙스를 풍기는 정치적 텍스트를 은밀하게 제시하는 이 영화의 태도는 그마저도 일종의 허세로 치부 당할 여지가 농후해졌다.
2008년 10월 1일 수요일 | 글: 민용준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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